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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공연은 정치적이지 않다 : on ignorant performing art

2009-12-24  

 

무지한 퍼포먼스에 관하여/12개 챕터중 첫 번째

"예술은 우선 그것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전달하는 메시지들과 감정들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술은 그것이 사회의 구조들,갈등들, 사회집단들의 정체성들을 재현하는 방식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이 정치적인 것은 예술이 이 기능들에 대해 두는 간격 때문이고, 예술이 설립하는 시간과 공간의 유형때문이며, 예술이 이 시간을 분할하고 저 공간을 채우는 방식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 (The Emancipated Spectator)

노동자를 비롯한 소외계층을 다룬 <지하철 1호선>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며, 오줌을 독점화한 권력과 정치의 모습을 다룬 뮤지컬 <유린타운>역시 원작의 완성도뿐 아니라 대학로에 올려진 소규모 연출들로도 그 감동과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외연상 '사회 정치적 예술작품'으로 구분되는 이 작품들은 '비판적'예술로 불릴 수 있을지언정 더 이상 정치적 예술작품으로 호명 될 수 없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고 규정되어 있는 '정치적'예술이란 몇가지 이유에서 정치적이지 않다. 모리스 블랑쇼는 아무리 진보적인 문학작품일지라도 그 글이 '문고판'으로 대량생산, 유통 되어질때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게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정치적 공연예술 역시 모리스 블랑쇼의 지적대로 그 내용자체 보다는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관람자와 만나고 유통 되어지는가 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대학로/프로시니엄극장/정형적 뮤지컬 형식과 플롯 등으로 '이미' 분할되고 분배되어진 익숙한 감성의 유통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때 그 정치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또한 언급된 작품들은 20세기 공연예술 이론가들의 끊임없는 화두가 되어온 관객과 무대의 이분법적 구분 역시 뛰어 넘지 못한다.

"관람자가 존재하지 않는 공연이란 없다. 그러나 관람이란 나쁜것이다. 관람자가 된다는 것은 공연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구경은 두가지 점에서 나쁜것이다. 첫째, 구경이란 앎의 반대를 담지한다. 그것은 외양 또는 리얼리티 뒤편에 존재하는 것들이 생산되는 조건들을 알지 못한 채 외양 이전에 서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구경이란 액팅의 반대를 담지한다. 자신의 의자에 움직임 없이 앉은 채 개입할 어떤 힘도 없이 공연을 봐야 하는 것이다"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

21세기 자끄 랑시에르는 또다시 관객의 수동성에 대해 과감히 지적한다. 관람자가 된다는 것이 '나쁜것'이라니, 입장료까지 지불하고 비난받는 셈이다. 하지만 20세기 브레히트, 아르토 이래 모든 진보적 공연이론가들이 지적해 왔듯 현재의 자끄 랑시에르의 화두 역시 옳다. 브레히트가 관객이 무대위의 일루전에 몰입되는 것을 방지 하고자 했다면, 반대로 아르토는 관객이 무대속으로 합체되는 순간이야 말로 관극의 해방으로 보았다. 두 사람의  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전통적 블랙박스의 일루전을 경계하고 관극을 해방시키려고 했던점은 같다, 자끄 랑시에르는 조금 다른 논리로 두 매스터의 입장을 발전시킨다.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무지한 스승>에서 19세기 자코토라는 실제 인물의 경험담을 끌어내어 스승과 학생간의 불평등한 현대교육의 문제를 철저하게 해부한다. 자코토라는 인물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프랑스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찾아나갔을 때 놀라운 발전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학생에게 일 방향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 모양 끊임 없이 스승과 학생간의 간극을 만드는 교육학의 신화일뿐이라고 지적하며 스승은 자신이 가르칠 것에 대해 '무지'해야 한다고 랑시에르는 역설한다. 이미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 배우는 방식을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타고난 바, 역설적으로 일방적인 현대교육 방식은 이 능력을 퇴화 시키고 끊임없이 선생과 학생들의 갭을 창출하기 때문에 영원한 불평등속에 배우는자의 해방은 요원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흥미로운 것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을 공연예술에 적용하는 지점이다. 무대 위에서의 연출자와 퍼포머는 더 이상 준비된 메시지를 의자에 앉아서 꼼짝할 수 없는 관객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연출자와 퍼포머가 스승처럼 '무지'하고 관람자가 학생처럼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관람자의 해방은 시작된다. 그것을 위하여 연출자는 신적존재로 퍼포머뒤에 군림하며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연출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씌여진 텍스트(시나리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대위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무대밖 세상과 일대일의 상응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지한 연출자는 인정한다. 관객의 해방을 원했던 브레히트나 아르토 역시 관객에게 연출가의 '무언가'을 끊임없이 전달 함으로서 관객을 일깨우려고 했던점에서 '무지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셈이다. 도표 에서 처럼 랑시에르의 방법론에서 무지한 연출가는 퍼포머와 관객의 만남을 주선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누워있다.

연출자의 일방향적인 권력이 사라진 무대에서 정치성이란 단선적인 메시지로 존재할 수 없다. 현실정치,인권,페미니즘등에 대한 무대위의 직설화법은 사실 '정치적'인것이 아니라 '체제 비판적'인 것이다. 실로 정치적인 작품들은 외연적으로 상당히 정치적이지 않은 작업들이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아도르노의 시각은 거시적으로 틀린말이 아닐지라도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동시대에 이미 분배되고 배정되어 있는 감성질서 즉, 말해지고 보여지는 것과 그것들의 방식을 흔들어서 그 질서를 재배정 하는 일이야 말로 실로 정치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블랙큐브 내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프로시니엄과 각종 전형적인 규범속에서 세상의 인권을 비판하는 일이란 이미 권력에 의한 질서에 순응하는 방식이기에 정치적 힘을 얻을수 없다. 인사동 골목에 2-30명의 미술인들이 모여 나체로 퍼포먼스를 벌이는것 은 문제가 안되지만 종로2가로 진출하면 경찰에 체포된다. 그것은 권력이 분배 해놓은 (감성의)경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대 예술에서 정치적인 예술작품이란 기존의 질서에 따라 배분되어 있는 감성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며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이란 예술작품에 대한 시학이 아니라 바로 감성의 질서와 권력의 관계이다. 즉, 미학의 정치 또는 정치의 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미학이 곧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에 의해 질서를 배분하는 일은 정치의 핵심이며, 그 배분되는 질서란 바로 감성을 구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배된 감성과 감각을 다루는 예술은 굳이 정치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정치적인 셈이며 그것이 곧 미학인 것이다. 동시대 모든 좋은 예술은 이미 정치적이다.



-리미니프로토콜/자본론-


2009년 페스티발 봄에 초대된 리미니 프로토콜의 <자본론>이 정치적인 작품일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주제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리미니 프로토콜의 프리젠테이션의 형식에서 기인한다. 아마츄어 배우들을 만나서 극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수행성performitivity, 칼맑스의 텍스트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관객과의 수행성을 통해 퍼포머는 관객들에게 군림하지 않고 연출가는 퍼포머를 강제하지 않는다. 바로 '무지한 연출'이 성립되는 동시에 관객과의 평등을 구현함으로서 관객을 해방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제가 <로미오와 줄리엣>이어도 그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연출가는 스토리텔링(시나리오) 을 고안하여 퍼포머에게 익히게 하고 퍼포머는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칼맑스와 퍼포머, 퍼포머와 퍼포머, 퍼포머와 관람자 간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한다. 그것은 '칼맑스를 읽은 그가 콜센터직원이 되었다' 라는 통합체Syntagma가 아니라 콜센터직원,비싼양복을 맞춰입은 맑스주의자,세일즈맨,교수등 계열체Paradigm 의 게임이 된다. 인터페이스는 말뜻데로 '얼굴과 얼굴사이'이지 그것 자체가 콘텐츠가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콘텐츠이며 그것은 많은 경우 기존 권력의 감성분할 방식에 종속되어 따라가거나 기존질서를 대변할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무지함'과는 대척점에 있다.(많은 대학,에니메이션 산업, 오세훈 서울시장이 '스토리텔링'을 주장하는 역설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단 리미니 프로토콜 뿐 아니라 동시대 유럽의 진보적 공연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무지한 연출'들에 의해 연출된다.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텍스트의 진본성을 획득하였다면 '무지한 연출'은 앎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배분된 감성의 기존 요소들의 시간과 장소의 배치를 이동시킴으로서 기존의 분할을 흔들어 관객을 해방시킨다.

1953년 초연부터 파리에서 예외적으로 관객을 동원시켰던 '고도를 기다리며'역시 '무지한 연출'이란 차원에서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한국의 대학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여전히 '명작' 이긴 하나 정치적이지 않으며,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은 동시대적이지 않다는 말과 동일하다.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이란 지금 현존하는 (분배된 감성의)질서에 반하는 예술이다. 동시대성은 따라서 반시대적 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이 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 동시대 예술은 관객에게 낮설 수밖에 없고 커튼콜에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수를 받을 수 없다. 기립박수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관객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미학적 질서'에 부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며, 약한 박수,큰박수,기립박수로 등급화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결국 발신자로서의 무대, 수신자로서의 관객을 구분하며, 퍼포머들이 얼마나 무대 위에서 '잘노는지' 평가해야 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관객으로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무대뒤 어깨에 힘준 연출자를 상기 시킨다. 반면 락공연에서는 기립박수가 없다. 퍼포머의 드럼스틱 소리와 함께 관객은 머리를 흔들고 노래를 따라부르며 슬램을 시작한다. 퍼포머는 이들의 기운을 받아 즉흥과 가변적 공연 퍼포먼스를 벌인다. 무대와 관객이 상대적으로 평등해지는 셈이다.

기존의 분배된 감성에 반하는 동시대 공연예술이란  '잘짜여진 스토리텔링' 이나 연주의 숙련도 또는 기예에 가까운 숙달된 몸이나 절묘한 무대연출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누가 스토리텔링의 주인인지 분석하는 내러톨로지에 가깝고,연주와 몸은 어떤관계를 맺는지, 몸과 무대연출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관객에게 물으며, 구획되어진 예술장르간의 경계를 이동시키며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시한다. 기립박수를 받는'명품'으로 인정받는 순간 더 이상 동시대의 예술일수 없다. 해외에서 인정받은 '명품'을 쇼핑 해오는 여러 국제 페스티발과 고전을 재방송하는 수많은 대학로의 극장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한 동시대 예술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 '이미' 입력되어 있는 일루전과 (모호한)감성을 만족시킴으로서 기립박수를 쳐줄 공연을 만나기 위해 공연장을 찾고 있는것은 아닐까.

 

 

홍성민/ 작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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