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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 시스템 :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1

2009-12-28  

오늘날의 인간이 가진 두려움 중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려 헤매는 것이 큰 것 같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운전하다 모르는 길에 들어서면 완전 패닉하여 초주검이 되는 경우도 봤다. 그래서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길을 찾아주는 장치들을 개발해 왔다. 나침판, 육분의(六分儀), 자이로스코프, LORAN(Long Range Navigation), GPS등의 장치들과 각종 지도는 길을 잃고 헤매다 낯선 곳에서 위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다. 운송수단을개인이 운용하기 전에는 이런 장치들은 선박이나 항공기의 항해사나 항법사등 전문직 종사자들만이 사용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승용차가 대중화되면서 수많은 길 모르는 대중들이 말 100마리 이상의 힘을 가진 고성능의 달리는 장치인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다. 그 중의 상당수는 차에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며, 설사 지도가 있다고 해도 아예 볼 줄을 모르니, 고성능의 주행 장치는 사실은 고성능의 지리적 문맹 장치인 셈이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장착되지 않은 차는 눈이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찌어찌 장소를 찾아가던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데를 가던가 아니면 최악의 경우 길을 못 찾아서 죽던가 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길잃어버리는 공포에 대한 대처도 다분히 아날로그적이었던 것이, 길을 가다가 모르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는 식이었다. 그가 어디를 가는지는 평소에 다니던 습관이나 운, 남들의 안내 같은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기술적인 것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좀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면 해의 방향이나 먼 산, 큰 빌딩 등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길을 찾겠지만, 우매함을 본질적 덕목으로 삼고 있는 현대의 대중들은 길 못 찾는 것을 차라리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 도시는 일방통행로가 너무 많아”라든가, “당최 시골에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너무 없어”라는 식으로 그때그때 핑계를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디지털의 관점에서 보면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없는 차라는 것은 차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필수적인 기능이 빠진, 반쪽짜리 기계일 뿐이다. 그런 기계가 길을 못 찾는 것은 차라리 당연해 보인다.

이제 디지털 시대가 오자 그런 오류가능성을 즐길 권리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의 편재(omnipresence)로 말미암아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디지털 시대의 길이란 여행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당혹스럽게도 했다가, 다시 어디론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신기한 통로가 아니다. 미리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필연적으로 꺼내 쓰는 프로그램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길 잃어버리는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동시에 모르는 길을 가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유쾌한 방랑의 즐거움도 빼앗기고 말았다. 에버랜드를 가기로 했으면 에버랜드를 가는 거지, 옛날처럼 에버랜드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지치고 목 마르고 더 갈 기운도 없는데 마침 시골 막걸리집에 들어가서 서울서는 맛 볼 수 없는 구수한 촌두부와 막걸리에 취하는 일은 없어졌다. 탈근대의 시민들은 길을 잃어버릴 여유가 없다.

문제는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다. 그것도 일종의 인터페이스인데, 그게 인간에게 더 넓은 세계를 만나게 하는가 아닌가가 문제이다. 모든 문명의 이기가 그렇듯이,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곳들을 여행할 수 있으며, 길 위에서 쓸데없이 헤매며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뭔가가 나타날 때 항상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듯이, 내비게이션 시스템도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한다.

우선,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보여주는 발전의 경로는 마냥 위로 상승하는 낙관적인 일직선적인 모양이 아니라, 호리병 같은 모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즉 겉에서 보기에는 광대하게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목이 좁아져서 세계가 다시 작아지는 식이다. 일단 이런 것을 호리병형 발전경로(CTP: Cucurbit Type Progress)라 부르기로 하자. 호리병형 발전 경로는 근대의 모든 기술장치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패턴이다. 즉 자동차가 나와서 사람들은 더 먼 곳을 빨리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자동차가 가는 만큼만 가고,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상하기를 멈추게 되었다. 컴퓨터가 나와서 데이터 처리를 빨리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컴퓨터가 제공해 주지 않는 정보에 대해서는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는다고 자만하게 되었다. 선풍기에서 핸드폰까지, 대부분의 기계 장치는 인간에게 호리병형 발전 경로를 제공한다. 문제는 어떤 장치가 가져다 주는 편의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호리병형 발전 경로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빠르고 편안하게 데려다 주는데 뭘 문제 삼겠는가. 기껏해야 현대자동차에서 새로 나온 모델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도요다의 어느 모델을 모방한 의심이 간다는 정도밖에는.

기능과 종류는 다르지만 구글 어스, 위키피디아, 유튜브 등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들이 아날로그 장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능으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 만큼, 자동차 내비게이션 시스템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나는 처음 내비게이션 장치를 보았을 때 이건 정말 꿈에나 나올 수 있는 놀라운 기계라고 생각했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길을 찾아가는데 뭐라 불평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가진 호리병형 발전 경로에 대해 좀 불평을 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호리병형 발전 경로란 문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문을 닫아버리는, 대단히 변증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가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얻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리스에게 영혼을 팔았듯이, 현대의 이동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영혼을 팔고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다. 괴테가 1832년에 인조인간을 상상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렐 차펙이 로봇이란 말을 처음 쓴 것이 1920년이다) 메피스토펠레스에 이끌려 이 세상의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파우스트가 죽음의 나라에서 불려나온 고대 그리스의 미녀 헬레네를 보고 정신을 잃었을 때 그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도록 고대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데려온 것은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가 만든 인조인간이었다. 그때 이미 괴테는 오늘날의 인간들이 디지털 기술이 창출해낸, 실체가 없는 헛것의 이미지에 이끌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예측했을까.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시대를 가로 지르고 밤과 낮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끌고 다니듯이, 오늘날의 디지털기술은 인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따라서 디지털 기술이 차량 내비게이션 시스템으로 구현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싶지 않은 나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요즘 사람들이 차에 달아두는 그런 형태는 아니다. 내 차의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나’라는 인간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지도책이라는 내가 일생 동안 신뢰해온 내비게이션 자료이다. 나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 목소리가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것 보다는 나의 눈과 지도에 대한 인지력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쓰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는 옛날 어른들이 말하듯이 ‘땅의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즉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땅의 상실에 대한 거부이다. (앨런 세큘라는 해양의 다양한 면들에 대한 비평서인 『Fish Story』에서 오늘날의 인간이 휴양지로서의 바다만 볼 수 있을 뿐, 노동의 바다, 과학의 바다, 교역의 바다, 지식의 바다는 볼 기회가 점점 없어진다는 의미에서 바다의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는땅의 상실이다. 땅은 금전적인 가치나 면적 등 추상적인 가치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국에 아파트가 서서히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로 변할 무렵, 옛 어른들은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며 아파트에 사는 것을 거부했었다. 지도책을 보면서 멀리 있는 산과 강, 건물의 위치를 참조하며 길을 찾는 행위는 땅을 밟고 살아가는 것과 어느 정도는 비슷한 일이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차에 지도책을 두지 않고 운전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긴 아예 지도를 보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으니 사람들이 차에 지도책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낯선 곳을 처음 갈 때 어떻게 길을 찾느냐고 물으니 일일이 물어본다고 한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은 ‘대한태권도회관은 저 쪽 끝에 있는 한일은행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가다가 두 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 한 다음에 바이더웨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데서 왼쪽 길을 택한 다음 세 번째 건물’이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구세주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운전함’이라는 원시상태에서 ‘첨단의 디지털 정보에 의지해 운전함’이라는, 역사의 단계를 수백 단계도 넘게 뛰어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엄청난 비약이다. 그 대신 그들이 치르는 댓가는 땅의 상실이다. 하긴 돈의 가치로만 남아 있는 땅이 물질로서 의미가 사라진 마당에 그깟 땅쯤 사라지면 어떠랴. 아파트 값만 안 떨어지면 그만인데.

사실 땅이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일단 사라진 땅은 디지털 기술의 덕분으로 다시 태어난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실제의 땅과 어느 정도는 인지적으로 설득력 있게 동일시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라진 땅이 조그만 LCD스크린에 환생했다고 믿을 만도 하다.

이어읽기 「내비게이션 시스템 :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2」

글 이영준
기계비평가. 저서로 『사진 이상한 예술』, 『이미지비평』, 『기계비평』, 『사진이론의 상상력』, 『비평의 눈초리』 등이 있으며,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 《FAST Forward》, 《서양식 공간예절》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계원디자인예술대학의 교수이며, 인문학 연구소인 H-CENTER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계원디자인예술대에서 발행한 『양귀비』저널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가 아래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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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 이미지 ⓒ시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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