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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하는 시선들 3 : 1962년, 마포아파트 혹은 혁명 한국의 상징

2010-01-29  

1962년에 1차로 완공된 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로 단지 개념을 도입한 아파트였다. 마포형무소 부속 채소밭 위에 축성된 독특한 Y자형의 6층 아파트 6동은, “450세대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현대식 생활의 전당”, “도시의 입체화를 위한 새로운 시민 주거공간”으로 선전되었다. 구상과 입안부터 마포아파트 건설을 주도한 이는 황해도 출신의 육사 8기 장동운 중령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2군 사령부 직할 공병대 대장으로 5.16쿠데타에 참여한 후, 대한주택영단의 ‘총재’로 부임하면서 현대식 아파트의 건설을 통해 군사 정권의 주택 정책의 표본을 제시하려고 했다. 흥미롭게도 그가 아파트를 택한 것은 전쟁 중에 경험한 미국 연수 덕분이었다.

“저는 195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休戰(휴전) 소식을 들었어요. 미군 공병학교 고등군사반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그해 초 미국에 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중인 데도 한국군 장교들을 데려가 교육을 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써먹기 위해서였지요. 어느 날 영어잡지를 읽다가 아파트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한 건물에 수십 가구가 사는 아파트 건물들이 거대한 단지를 형성하고 있더라구요. 저는 생전 처음 보는 건물들이었어요. ‘야! 우리나라는 앞으로 아파트를 지어야겠다. 땅이 좁으니까 아파트를 지으면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1)

장동운이 보았던 사진 속 건물들은 전후 유럽의 도시에 미국의 원조로 건설 중이던 아파트들이었다. 결국 장동운의 추진력 덕분에 1961년 7월,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 당시 주택공사의 건설이사를 맡고 있던 엄덕문의 주도로 서울대 공대 교수진들을 불러 모아 아파트 설계를 시작했고 석 달 만에 완료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최종적으로 결정된 아파트 설계안은 장동운의 원대한 야심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본래 그의 목표는, 50억 환의 예산을 들여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시스템을 갖춘 10층짜리 11개동 1천 1백여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반대 여론에 휘말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되는 나라에서 국가가 나서서 호화판 대저택을 짓느냐”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결국 10층 건물은 6층으로 낮춰졌고, 엘리베이터는 사라졌고, 중앙난방 시스템은 호실별 연탄 보일러로 바뀌었다. 수도 시설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수세식 화장실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수입한 양변기만큼은 원안대로 설치되었다.


마포아파트 전경, 국가기록원, 1962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마포아파트의 전경은 조감의 시선에 포착될 때서야 비로소 현대적인 스펙터클의 자태를 드러낸다. 창공의 시선을 염두에 둔 듯 보이는 Y자형의 건물은 단층 주택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지표면 위에 갑자기 불시착한 UFO같아 보인다. 엄덕문에 따르면, Y자형의 구조를 택한 것은 구조역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한강변의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압력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원인을 넘어섰다.

‘아파트’라는, 당시로선 낯선 발음의 번역되지 않은 축약형 외래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 새로운 형태의 주거 형식에겐 고립의 운명이 점지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의 사대문 안으로 유입되었던 모더니티의 문물과 유사한 운명을 되풀이하리라고 판단했다. 당시 그 문물들은 지체 높으신 사대부 출신이나 돈좀 만지던 중인들에게만 유한계급의 상징자본으로 전유되고 구경꾼들과 산보객들을 유령처럼 홀리는 판타스마고리아의 신기루로 향유되었을 뿐, 사대문 바깥으로 확산의 궤도를 마련하지 못했다. 식민 제국에 의해 철도는 놓였지만, 그 철도 위를 달리던 철마가 실어 나른 것은 여전히 봉건의 습속에 찌든 문맹의 몸뚱이뿐, 번들거리는 모더니티의 물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쿠데타의 주체들은 마포아파트가 그저 전시행정의 구경거리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야심차게 꿈꾸었던 것은 아파트에 내재한 확산과 복제의 모더니티였다. 박정희의 기념사대로, 그들은 마포아파트가 “장차 입주자들의 낙원을 이룸으로써 혁명 한국의 한 상징”이 됨과 동시에, “현대적인 집단 공동 생활양식”의 확산을 가져와 “구래의 고식적이며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 탈피”해 “국민 생활과 문화의 향상을 이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감의 시선에 포착된 마포아파트의 모습은, 조국 근대화의 대장정을 앞두고 창공의 시선을 의식하며 각반을 찬 채 군장을 꾸리는 병사들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쿠데타 주체들이 의식했던 시선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들이 상상적인 형태로나마 마포아파트를 내려다보며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해줄 것이라고 가정했던 대타자는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장동운의 이후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마포아파트의 성공 이후, 1963년에 장동운은 공화당 사무차장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육사동기인 김종필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다. 한직을 맴돌던 그가 1966년에 맡았던 직책은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가 전국 각지에 애국 선열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동시에 광화문 사거리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는 마포아파트를 조감하는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화답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국가-민족-사회의 삼위일체를 꿈꾸는 국가주의적 성웅이 바로 그 시선의 주인이었다. 전쟁 기계의 시선은 그렇게 건축의 시선과 자본의 시선을 간단히 제압한 후 토건적 국가 권력의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서울은 “돌격건설”의 구호가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시는 선이다”는 명제를 몸소 증명해보이기 위해 종로에서 여의도까지 온통 공사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1) 「주거혁명의 旗手 張東雲」, 『월간 조선』, 2006년 7월호.

글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한국과학기술원 산업디자인학과 박사과정. 저서로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역사(공저)』, 『인터페이스 연대기: 인간, 디자인,테크놀로지』 등이 있다.『디자인저널 양귀비』창간호, '지리정보와 지리감각'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가 아래 총 5편의 연재로 싣습니다.

01 1936년, 까마귀의 날개
02 1950년, 폭격기의 시선
03 1962년, 마포아파트 혹은 혁명 한국의 상징
04 1988년, 스타디움의 나르시시즘
05 2007년, 한강 르네상스의 모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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