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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1

2010-03-09  

아마도 아직 그런 것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면, 미술 비평이란 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흥미로운 일 가운데 하나는 역시 그 정체가 의심스러운 패션 비평이라 할만한 것과 슬그머니 닮아졌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핵심적인 특성은 미술이 이론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극구 은폐하는 몸짓에 열중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싸구려 패션잡지를 펼칠 때마다 무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그렇지만 너무나 익숙한 상투어들로 가득한 표현들과 마주한다. 우아하거나 섬세하거나 쿨(cool)하다는 식의 수사들로 뒤범벅된 그런 비평적 어조는 지금 우리가 보는 미술 비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션이 있다기보다는 패션 디자이너만이 있는 것처럼 미술 역시 하나의 총체적인 대상으로서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름난 미술가들만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언급하고자 하는 대상을 총체화할 수 없음을 가리는 좋은 구실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가들과 새로운 미술적 현상을 언급하면서 미술이란 것이 존재하고 있는 듯 한 시늉을 되풀이한다.


그림1 Damien Hirst next to his sculpture 'Anatomy of an Angel' at Sotheby's auction (2008) (Photo: Peter Macdiarmid/Getty Images Europe)

알다시피 현대 미술사 책을 펼치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만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미술운동 혹은 미술사조라 할만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난데없는 종결 혹은 폐쇄(closure)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종착을 알리는 징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나마 미술운동 혹은 아방가르드 이후의 미술사를 구성하는 특기할 만한 흐름을 찾자면 유별나게도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s; Young British Artists)를 들 수 있을 따름이다. 이는 여러 가지 점에서 각별하게 보인다. 사실 YBAs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를 대표하는 이름난 미술가들의 이름의 목록을 드는 것을 제외하면 YBAs를 미술사 안에서 자리매김할 여지를 찾기는 어렵다. 근대 미술의 역사를 재현할 때 흔히 등장하는 전제인 사상가(thinker)로서의 미술가라는 가설과 대조할 때, YBAs 안에서 미술가는 단지 명사(celebrity)와 다르지 않는 모습을 취한다. 그리고 미술은 담론이라기보다는 미술가 개인의 은밀한 어떤 재능과 발상을 표현하는 그 무엇으로 전락한다. 언젠가 근대 미술에서 미술가를 정의하는데 강력하게 작용하였던 사상가(thinker)로서의 예술가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예술가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언젠가 우리는 그들을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지금의 미술가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명사-미술가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술비평이 수많은 미술가들과 관련된 소소한 전기적인 서술과 그들이 가진 개인적인 열정과 관념을 실현한 것으로 상품 카탈로그 식 소개처럼 지루하고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로 비평을 대신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름난 패션 디자이너의 패션 상품을 다루는 것과 전연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서 분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영화 주간지나 라디오 프로그램 따위에 등장하여 요즈막의 미술을 소개하는 미술 비평가들의 입담이 패션잡지의 기자들의 입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그들이 상상하는 현대 미술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물론 그들은 그것을 말할 수도 없고 또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 비평의 괴사(壞死)는 미술을 둘러싼 이론적 실천의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단말마적인 몸짓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미술 비평이 전례 없이 흥행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미술 비평이 흐지부지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허튼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미술비평가가 이렇게 위세를 발휘하는 것은 미술이 무엇보다 즐겁고(그것은 아서 단토라는 ‘최후’의 미술이론가가 퍼뜨린, 미술을 향한 축복을 가장한 저주의 핵심적인 요지일 것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이것은 미술은 무엇보다 시장원리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며 미술에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역설하는 이데올로그 데이브 힉키의 주장에서 집약될 것이다), 나아가 그 사이에 끼어있는 들리지 않는 속삭임인 팔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목소리와 병행한다.

미술비평가는 인기 있는 대중잡지 칼럼의 저자로, 쿨한 라이프스타일을 선취하는 미술가들의 세계를 소개하는 취향제조자(taste-maker)로 혹은 고수익을 보장하는 아트펀드의 컨설턴트로서 살아가고 있고 아마 장차 그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미술이 총체적인 대상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 가능성을 금지한다. 미술은 그저 미술가들이 만들어낸 이런저런 대상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술을 전유하기 위해 이를 매개하는 (무엇보다 비평을 통해 제공되었던) 언어들이 미술 안에서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현대 미술에 더 성가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 미술을 둘러싼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재앙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미술뿐 아니라 모든 예술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이를 미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각별한 사태라고 생각하며 침울해 할 일은 아니다. 나아가 이는 예술로부터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고 나아가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역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나 참담한 일일 뿐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상을 예술화하라는 주장에서부터 모든 경제적 활동은 예술가적 창의성에 따라 운용되어야 한다는 예술지상주의적 자본주의, 이른바 유연한 자본주의적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유복한 처지에 놓인 미술을 두고 서글퍼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있다면 그들은 잘난 체 하는 후기 근대의 미술평론가들로부터 아직도 아방가르드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철지난 유행의 추종자들로 조롱을 받을 뿐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예찬하는 상황이 벌어진 이후 우리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장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장인 예술의 종말이란 담론이 유행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행 현상에는 의미심장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술의 지성적인 역할을 금지하는 즉 예술을 감각성의 세계로 유폐하면서 예술 자체를 구성하는 특정한 문화적인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성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정치적 압력과 떼어놓기 어렵다. 예술이 정치화된다고 말할 때 그를 두고 예술이 직접적인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거나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마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통념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해서 예술과 정치의 연관을 생각하는 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예술에 관한 가장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운반하는 사고일 것이다.  

예술은 정치의 시녀가 아니지만 언제나 정치의 타자이다. 사회의 관리란 뜻에서의 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란 뜻에서의 정치를 생각한다면 정치란 평화롭고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적대의 세계로 구성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실 세계가 언제나 구성적으로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무엇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예술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예술은 지금까지 감각하고 상상하던 바와는 전연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고 감각하며 상상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직접적인 정치적 활동과 전연 다른 것이지만 또한 현실의 부정성(negativity)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예술을 정치와 연관시키는 방식은 예술이 어떤 감각적인 세계를 생산하는지 헤아리며 그것의 부정성을 분절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미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된 현상, 예컨대 비엔날레의 잇단 등장, 예술지구 혹은 미술과 특별히 연계된 도시 공간의 부상, 명사화된 미술가의 활약, 갤러리의 범람 그리고 옥션 하우스의 광란적인 활동 등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나는 이 글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적인 논리 하나를 던지고 이를 다듬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미술의 금융화란 것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현대 미술을 규정하는 논리와 대응하며 과잉규정(over-determination)하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하나의 구체적인 요소가 다른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직접적인 규정이라면 과잉규정이란 하나의 요소가 단지 하나의 요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전체를 규정하는 논리를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본의 금융화란 자본이 어떻게 자신의 지배를 생산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삶의 현실을 과잉규정하는 논리를 생산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가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로부터 현대 미술의 형세를 조감할 수 있는 이론적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2 Guggenheim Museum in Bilbao, Spain

기업가적 도시의 세계에서의 미술관

현대 미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한 제도와 테크놀로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느새 시대착오적이게 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백색 큐브(white cube)로 대표되는 근대적 미술 전시 공간을 비판하느라 열중하고 있는 동안, 이미 세상은 창조적 도시, 문화도시 혹은 글로벌 도시가 되겠다는 명목으로 다투어 새로운 미술관을 짓고 그 미술관들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기획 전시하는 탈근대적인 오락 시설, 어쩌면 테마 파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그런 장소가 되고 말았다. 물론 거기에 덧붙여 비엔날레라는 국제적인 미술 이벤트를 빼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어느 글에서 말했듯이 1970년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했던 관리주의적 도시(managerialist city)는 이제 기업가적 도시(entrepreneurial city)로 변신하였다. 다시 말해 신경제 혹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주된 도시 형태는 기업가적 도시가 되었다. 관리주의적 도시가 집합적인 인구로서의 주민을 자신의 거주자로 상정했다면 기업가적 도시는 언제나 부유(浮遊)하는, 언젠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개념을 빌자면 유목민을 위한 도시가 되었다. 물론 그 유목민의 인격적인 모습은 알다시피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투자자, 기업가, 연예인, 예술가, 학술계 명사 같은 이들로 이뤄진 제트족(the Jet tribe)에서부터 불법이주노동자, 인신매매로 타지에 내팽개쳐진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를 데 없이 다양하다. 물론 그들은 우리 시대의 유목민이다. 그러나 같은 인터콘티넨탈, 힐튼, 하이야트, 리츠 칼튼 등의 호텔 방을 순회하며 CNN과 블룸버그 통신 티비 뉴스에 열중하고 사케와 초밥을 즐겨먹는 노마드와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을 두려워하며 가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마드를 모두 어떤 장벽도 사라진 세계의 새로운 인간적 형상으로 예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 못해 구역질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마드란 말에 그다지 정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은 이방인으로서의 노마드라는 인상은 유목민과 관련된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려 우리는 도시란 장소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노마드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장을 보고, 산책을 가고, 이웃을 만나는 서식지 혹은 생활공간으로서의 마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마치 여행객을 위한 공간처럼 바뀌어버린 도시를 주유한다. 1990년대부터 등장한 흥미로운 도시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도시의 ‘맛집, 멋집’이란 곳을 찾아다니는 일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서울에서 ‘사는’ 이라면, 그 혹은 그녀는 ‘홍대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저녁을 먹고, ‘삼청동’에서 술을 마시는 식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처럼 자신의 도시생활을 체험하는 이들을 위해 숱한 가이드북, 여행 안내서가 소비되고 있다. 아울러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다투어 새로운 도시 속의 명소를 소개하고,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은 수시로 조만간 찾아가야 할 곳을 검색한다. 따라서 노마드는 굳이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여행지처럼 겪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보자면 근대적 관광객과 다른 모습의 여행자, 얼마간 하이데거적인 혐의가 있을 표현을 빌자면 우리 모두가 장소에서 더 이상 서식하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가 도시 속의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잿빛 콘크리트 도시’를 힐난하며 전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도시 형태를 비난하였던 다양한 주장들이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생활환경으로서의 도시 자체를 소멸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관리주의적 도시가 중앙집중적인 도시 정부가 공급하고 관리하는 기본적인 하부구조와 근린 환경을 통해 공적인 삶의 세계를 도시 속에 도입한다면 기업가적 도시는 보다 많은 수익을 내야하는 투자 대상처럼 도시를 상품화시킨다. 지난 몇 년간 유행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상상하는 공공성은 그런 점에서 적잖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전체 주민의 삶과 연관된 공공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인 공공성은, 비록 그것이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특정한 사회적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체’를 상정한다. 그렇지만 기업가적 도시가 채용하는 주된 캠페인 가운데 하나일 공공미술, 그것이 말하는 공공성이란 기업가적 도시 만들기를 위한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이 때 도시는 보다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각적 대상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보다 많은 여행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도심 환경의 재구조화는 언제나 그것과 짝을 이루는 예술 공간 설립과 짝을 이룬다. 여기에서 공공성이 가리키는 ‘전체’란 사실 부재하는 주체로서의 시민을 가리킬 뿐이다.

기하학적이고 추상화된 도시 공간을 ‘장소상실(placeless)’이라고 힐난했던 이들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기업가적 도시로 압축되는 현재의 도시 형태는 도시 안에서 집합적인 공동생활을 경험하는 시민을 추방한다. 그리고 기업가적 도시를 구축하려는 전략 속에는 현대 미술을 둘러싼 제도 역시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대안근대(altermodern)’라는 표제어를 내세우면서 2009년 올 해 ‘테이트 트리엔날레 Tate Triennale’를 조직했던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주장 역시 되짚어볼 만하다. 부리오가 말하는 대안근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멸 이후 혹은 근대가 여전히 지속하는 여건 속에서 근대성을 향한 새로운 반성을 모색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그는 21세기는 하나의 대륙이 아니라 군도(archipelago)처럼 되었으며 수많은 관념들과 형식들의 섬들로 이루어져있고, 예술가들은 여행객처럼 항상 분야와 형식(format)을 넘나들고 있고 하나의 언어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탈코드화하면서 재코드화하면서 이동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대안근대를 위한 선언문에서 제시한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여행, 문화 교환 그리고 역사의 재검토가 세계를 향한 우리의 시각은 물론 그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심대한 전환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는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담론으로 집약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기 위해 크레올화(creolisation)라는 유랑적인 운동을 실천해야 하며, 획일성과 대중문화 그리고 전통주의적 극우적 퇴행이라는 두 겹의 위협에 맞서는데 별반 쓸모가 없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해체 역시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대안근대를 실현할 미술가의 형상으로 제시하는 다언어적 주체(polygot) 그리고 떠돌이(homo viator)라는 인물은 이미 실현된 것이 아닐까. 목적지는 없고 움직여 다니는 궤적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꿈꾸는 그의 몽상은 이미 미술 안에서 실현될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조건부 속에서 그러할 것이다. 여행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주민 없는 삶의 세계로서 변모한 도시에서 미술을 전시하고 생산하는 공간은 이미 그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크레올화라는 그의 이상은 전지구적인 투기적 금융자본과 저명한 미술가와 건축가, 초국적 브랜드가 합작하여 만드는 수많은 미술적 이벤트를 통해 진행되는 것임을 목격하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개념을 빌자면 탈코드화, 탈영토화된 세계는 다시 코드화되며 그것을 구성하는 코드의 이름은 기업가적인 도시이다. 하나의 상품처럼 다양한 매력적인 경관을 제공하고 도시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최상의 편의시설을 제공하며 문화적인 체험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 예술 시설과 이벤트를 마련하는 기업가적 도시는 언제나 미술을 동원한다. 전통적인 산업 도시로부터 벗어나 독특한 장소 서사를 갖춘 그리하여 탈영토화된 유목민에게 개방된 새로운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저 악명 높은 토니 블레어 정권의 “쿨 브리태니카(Cool Britanica)”의 핵심 전략이며, 그 안에 테이트 미술관을 비롯한 영국의 주요 미술관과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미술 교육기관이나 전시공간, 미술적 이벤트를 비롯한 미술적 실천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장치들이 환영하는 주체는 당연 유목민이다. 그러나 그 유목민의 세계는 다언어적 주체도 아니며 또한 떠돌이도 아니다. 그들은 지구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적 논리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이며 미술가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일 뿐이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문화평론가)

원문이 길어, 둘로 나누어 올립니다.
이어읽기: [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금융자본주의 혹은 미술의 금융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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