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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2

2010-03-10  

이 글은 [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현대미술의 암호,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

그렇지만 현대 미술을 재생산하는 체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를 꼽자면 단연 미술의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미술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현대 미술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미술의 금융화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상징을 꼽자면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 Mei Moses Art Index’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교수였던 두 명의 경제학자, 메이와 모제스의 이름을 딴 이 지수는, 단순히 미술을 경제적 대상으로 가시화하는 지표를 계발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주요 미술 옥션에서의 미술품 거래의 동향을 추적하고 그것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미술품이 어떤 가격으로 거래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때 메이-모제스 지수가 알려주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태들에 대한 기록과 보고를 넘어선다. 그것은 경제가 금융화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연상하는 것과 대응한다.


그림3 메이 모제스 미술품지수 (Image courtesy Art2bank.com)

은행을 비롯한 다양한 금융기관은 심지어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융기관이 활동하고 그것이 경제적 활동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고 다양한 기능을 행하는 것은 과거에 견주어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굳이 경제가 금융화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본이 직접적인 생산 활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수익이나 이윤과 관계없이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직접적인 생산활동과 유리된 채,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정식을 빌자면, 상품-화폐-상품(C-M-C')의 재생산이 아니라 화폐-상품-화폐(M-C-M')라는 가상을 통해 자본이 움직이는 것처럼 현상하는 것, 그것을 경제의 금융화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응축하는 화폐는 이제 물신화되어 스스로 이윤을 창출하는 유령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증권시세표나 다양한 경제지수일 것이다. 이제 경제활동은 순수하게 숫자로 표상되는 가치의 증감을 통해 표현되지 물질적 삶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통해 체험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경제가 금융화되었다고 할 때, 다양한 경제적 활동을 표상하는 방식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수익은 이윤가능성(profitability)이나 성과(performance)같은 것을 통해 만들어지게 되었고, 얼마나 노동자를 고용할 것인가는 주주의 이해관계를 통해 결정되지 생산활동의 필요에 따르지 않는다. 이를 두루 망라하여 가리키는 말이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금융화라고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메이-모제스 지수 역시 매일 우리가 펼치는 신문 지면을 가득 메우는 증권 시세나 티비 뉴스에서 마주하는 나스닥이나 코스닥, 코스피, 항셍 지수같은 것과 다르지 않다. 미술 시장은 증권이나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주변적인 시장일 뿐 그것이 자산(asset)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런 연유로 금융화되어야 할 대상이란 점에서 다른 모든 상품적인 대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메이-모제스 지수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한다는 점에 특기할 만한 것이다.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는 겉보기에 미술이 상품으로서 어떻게 거래되었고 그것은 어떤 가격 변동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메이-모제스 미술품 지수는 그것을 초과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미술을 자산으로서 표상한다. 예를 들어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금이라는 임의적인 상품이 모든 상품의 가치를 비교하고 결정하는 준거가 되었듯이 귀중품의 일부로서 미술품 역시 석유같은 것과 유사하게 화폐적 교환관계를 조정하는 기준처럼 작용하였다. 이 때 금이나 석유, 혹은 귀중품으로서의 미술은 자본제적 경제활동을 구체적인 가시적 대상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금본위제가 붕괴하고 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화폐 가치는 더 이상 직접적인 생산활동의 결과로부터 도출되거나 규정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화폐는 이제 요술처럼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대상처럼 현상한다. 그런 점에서 화폐는 경제적 활동을 보충하는 대상이라거나 다른 상품과 같은 상품으로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모든 경제적 활동의 기원이자 목표가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상업화(commercialization)와 금융화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미술이 다른 상품과 다를 바 없는 상품으로 거래된다고 말할 때의 미술이 상업화되었다는 것과 미술이 자산으로서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것이 취하는 객관적 형태와 상관없이 화폐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추상화되었을 때 말할 수 있는 미술의 금융화는 전연 다른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림4 소더비 옥션 홍콩 (2008) (Image Courtesy Art and Asia)

어쨌든 미술이 금융화된 현 자본주의의 특성과 완벽하게 병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그에 경악할 사람은 미술을 언제나 경제적 합리성 외부에 놓여있는 대상으로 상상하였던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메이-모제스 지수를 통해 투자자에게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웹 사이트가 말하는 바에 따라면 자산군(asset class)으로서의 미술이 지닌 아름다움과 독특성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미술품이라는 대상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서적인 감동이고, 두 번째는 그 미술품을 얻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기쁨이다. 물론 이런 기쁨 속에는 지식을 얻고, 같은 생각을 가진 수집가나 전문가들과의 사교, 제작자와 만나는 등의 기쁨을 포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술품이 가진 아름다움은 그것의 재정적 성과(financial performance)이다! 지난 “50년간 메이-모제스 전체 미술품 지수와 S&P 500대 기업의 총수익 주가지수는 거의 똑같은 복리 수익률”을 보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또한 미술품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나아가 미술품은 다른 보통주보다 높은 성과를 보이고 대다수 다른 금융자산들에 비해 높은 휘발성, 낮은 유동성을 보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 내 앞에 한 권의 미술관 가이드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북경 대학가의 어느 카페 입구에서 집어 들었다. 이 잡지는 북경에서 무가지로 발행되는 이란 잡지이다. 이 잡지는 북경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를 소개하는 안내 책자이다. 2009년 7월호의 특집은 “Fine Art Beijing 2009”라는 이벤트에 앞선 포럼을 중계하는 것이다. 그 포럼의 주제는 미술품 시장과 투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미술 투자전문가와 분석가들이 나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마 21세기 초반 현대 미술의 세계에서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목소리를 듣는다. 이를테면 “미술품 구매와 미국 재무부 채권(American treasure bonds) 중에서 무엇을 사는 게 좋은가”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물론 북경에만 50여개가 넘는 옥션 하우스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모두 7개의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가 개최되고 있고 798 예술지구(art district)를 제외하곤 다른 예술지구가 없던 북경에 지금은 9개가 넘는 예술지구가 있으며, 30여개가 미처 되지 못하던 갤러리가 지금은 30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이야기가 유별나게 들릴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이 미술관 안내 잡지의 서두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잡지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미술을 조감하는 어떤 글도 읽을 수 없다. 각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와 작가들에 대한 소개가 뒤를 잇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어떤 비평적 언어를 통해서도 매개될 필요가 없는 사태로 제시된다. 이 책의 앞에 놓인 미술 시장과 투자에 관한 글은 흥미로우리만치 솔직하고 또 적절하다. 그것은 단순히 이번 호의 미술관 안내 잡지의 특집 기사에 그치지 않고, 이 잡지를 통해 소개되는 지금 여기의 미술을 미술 세계 혹은 미술의 현실로서 구성하고 매개하는 것이 무엇인지 군더더기 없이 표상한다.

이 때 미술관과 갤러리가 백화점이나 쇼핑몰 혹은 상점과 같은 공간으로 제시되고, 전시되는 미술작품은 진열된 상품처럼 현상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지금 거의 모든 쇼핑공간은 미술관화 혹은 갤러리화되어 간다. 상품은 제조되거나 생산되었다는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된 채 미술작품처럼 전시된다. 판매대와 그 위에 쌓인 상품은 사라지고 그 대신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체되는 진열 공간 속에 설치 작품처럼 전시된 상품을 마주한다. 물론 미술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은 이런 전시에 끊임없이 참여한다. 그리고 어떤 효용을 가진 상품이라는 인상을 모두 삭제한 채 상품은 그 자체 미술 작품처럼 개별적인 공간 속에 조명을 받으며 혹은 특정한 심미적 가치를 연상시키는 시리즈(series)처럼 모아져서 전시된다. 판매될 상품이 모두 진열될 필요도 없다. 나머지 판매되는 대다수의 상품들은 재고화되어 보이지 않는 창고에 놓이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니 하는 새로운 탈근대적 소비문화를 대표하는 쇼핑 공간은 상품이 브랜드의 심미적 가치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보여주는데 만족한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나 디자이너, 예술가를 동원하여 글로벌 도시의 쇼핑가에 세워진 그 상점들은 굳이 판매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브랜드가 판매하는 상품은 이제 그 쇼핑공간에서 획득한 심미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통해 다른 쇼핑공간에서 판매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브랜드의 모든 상품은 백화점과 대형할인상점, 공항의 면세점,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팔려나갈 것이고, 그 상품은 단지 그 브랜드의 로고를 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비싸게 팔려나갈 것이다.


그림5 뉴욕 프라다 플래그쉽 스토어 (Image Courtesy OMA)

그렇지만 이것은 어떤 시차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쇼핑공간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닮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쇼핑공간으로 바뀌는 것일까. 특정한 미술가와 주제에 따른 전시를 개최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외려 쇼핑공간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까. 거기에서 전시되는 대상이야말로 지금의 쇼핑공간처럼 브랜드화된 예술가, 명사화된 미술가가 내놓은 상품을 진열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무엇이 무엇을 모방하고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초점을 놓친 시차적 혼란에 불과할 것이다. 쇼핑 공간과 갤러리가 서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가 동일한 논리를 통해 움직이는 것임을 입증할 뿐이다. 그 논리란 현대 자본주의를 기호와 상징의 경제라고 말하는 이들이 일컫는 그것과 유사하다. 기호와 상징의 경제를 말하는 이들은 이제 제품(product)이나 쓸모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징적 가치나 심미적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주요한 경제활동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우유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우유를 구입한다. 그래서 그저 우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첨가제와 특성화된 효용을 가진 우유들이 판매대 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런 우유들이 더 잘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기호와 상징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삶이 문화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삶이 문화화되었다는 것, 따라서 문화적인 것이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되었고, 경제적인 것이 직접적으로 문화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계기를 시야에서 놓친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경제의 금융화일 것이다. 경제의 금융화는 앞서 언급했던 제임슨의 말을 빌자면, 구체적인 사회적 삶을 추상화하고 가치화하는 원리에 따른 것이다. 경제적 삶이 심미화되거나 상징화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적 삶을 추상화하는 즉 특정한 재현체계가 존재하고 현실을 체험하기 위하여 그것을 통한 매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임슨은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초기 자본주의와 리얼리즘, 그리고 제국주의화된 산업자본주의의 단계를 모더니즘, 그리고 그가 후기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각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시킨 바 있다.

제임슨은 각각의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와 문화적 체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할 때 자본주의가 발전시키는 경제적 삶의 추상화가 그것에 대응하는 문화적 혹은 미적 표상의 체계를 규정하는가에 착목한다. 물상화(reification)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삶을 추상화하는 규정적인 논리이다. 제임슨은 전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미적, 지각적 체험을 규정하였던 것이 물러나면서 부상한 지배계급이 요구하였던 새로운 미적 체계가 리얼리즘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적 삶을 안정적인 실재로서 고정시키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리얼리즘이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흥미롭게도 리얼리즘을 대체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 안에 내재한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모더니즘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변증법적 반전의 이론(dialectical theory of the paradox)”을 통해 효과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전이란 리얼리즘이 현실의 문화적 생산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리얼리즘 안에서 현실은 곧 표상된 것이란 믿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기에 그것은 곧 모더니즘으로 반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안정적인 외적 현실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다양한 차원, 즉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생활에서부터 대도시에서의 사회적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해 유지된다. 고백이나 자전, 에세이같은 글쓰기의 형태에서부터 본격적인 소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리얼리즘을 통해 생산된 모든 근대적 문학 형태는 바로 초기 자본주의에서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추상화하는 과정과 연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모더니즘의 등장은 바로 현실이 표상된 것이란 자각을 보다 강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문화적 대상이 바로 표상된 것이라는 반성에 기반하여 형식 자체에 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인 예술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테면 리얼리즘에서는 현실의 반영이 문제였다면 모더니즘에서 반영 자체의 반영적 성격을 문제삼는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모더니즘의 언어적 성격 자체에 대한 반성은, 미술 같은 것에서 재현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던 그린버그의 유명한 주장 같은 것을 통해 이미 상투어구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려 이런 모더니즘의 존재 조건을 가능케 했던 것이 자본주의적 추상화의 원리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분절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럴 것이다.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테일러화(Taylorization)가 노동과정을 단순화, 표준화하는 것처럼 문화적 생산에서도 역시 전체의 부분으로 여겨졌던 것이 자율화되고 자기충족적인(self-sufficent) 것으로 변모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예컨대,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피카소나 칸딘스키의 회화, 나아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운동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탈근대에 접어들며 이러한 모더니즘의 특성은 더 이상 충격 효과를 발휘하지 않고 반대로 대중문화를 비롯하여 광고를 비롯한 상품 소비문화, 나아가 예술적 생산에 이르는 전 영역을 통해 확산되고 지배적인 미적 지각이자 형태가 되었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전체 체계가 한 때 반사회적이었던 모더니즘에 기반”하게 된 것이다.


금융-자본-미술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금융자본주의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앞서 말했듯이 화폐가 자기 목적적인 대상으로 되어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 자체를 위해 모든 실재적인 세계를 등질화하는 것,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통해 말하자면 등가화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실재하는 어떤 물리적인 대상, 리얼리즘에서 가정하고 있던 안정적인 대상, 그리고 그것이 전제하는 철학적인 범주로서의 실체(substance)와도 전연 다르고, 또한 리얼리즘의 반전, 다시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상쇄된 리얼리즘(cancelled realism)”이라고 할 모더니즘의 형식 자체의 자율화를 통한 재현의 거부와도 구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품이 화폐 자체의 맹목적인 운동을 위한 하나의 핑계거리로 제시되어 버리는 금융자본주의의 세계와 대응한다. 이미 말했듯이 상품은 구체적인 사용가치, 어떤 사회적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질적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상징적, 심미적 가치를 부여함에 따라 끊임없이 가변적일 수 있는 순수한 추상적 형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따라서 현실과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리얼리즘이나 현실을 재현하는 형식 자체에 대한 자기 반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외적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부정적으로 보전하던 모더니즘과도 전연 다른 새로운 추상화의 논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흥미롭게도 “리얼리즘과 형상(figuration)”의 의기양양한 대두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현대미술의 추세에 관심을 둔 이라면 추상표현주의와 개념미술 등의 몰락 이후에 대대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와 형상적 미술 작업(숫제 그것을 좁은 의미에서의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조류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의 리얼리즘이나 형상의 복귀는 추상화에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적인 경제활동이 금융자본주의를 통해 화폐 자체의 운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추상화되듯이, 추상화 자체를 보충하는 문화적 논리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구체적인 효용을 가진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소비한다고 할 때, 그 브랜드를 구체화하는 것은 로고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그럴듯한 사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형상적인 것이지 않으며, 달리 말하자면 객체의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사실주의이며 새로운 사실주의적이며 재현적인 언어의 지배라기보다는 형상의 로고로의 변형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라는 제임슨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로고 자본주의라고 불렀던 신경제 체제, 새로운 자본주의의 특성은 적절한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또한 미술의 금융화를 통해 규정되는 미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앞서도 말한 바 있던 미술가의 명사화는 영웅적인 예술가로서의 미술가와는 전연 다르다. 미술가는 이제 스타처럼 혹은 연예계 명사처럼 처신하고 대접받으며 또한 스스로를 드러낸다. 언제부터인가 미술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것이고 작가노트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버렸다. 나아가 그렇게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자신의 삶에서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는 비엔날레에 초대되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 갑자기 부상한 주요한 미술상을 수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상이 에르메스 미술상이 되어버린 현상은 의아스럽거나 놀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술상은 에르메스라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쇼핑 공간을 구성하는 갤러리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잡다한 의류와 잡화를 판매하는 기업이 자신을 상품의 판매자가 아니라 브랜드적 가치를 판매하려고 하는, 즉 이미 제조된 상품이 아니라 마케팅을 통해 상품을 구성하는 명품 기업의 활동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를 통해 미술과 소비상품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고화된 상품과 작가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하는 미술가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런 차이 없음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금융화가 만들어낸 경제의 보편적 추상화일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투자와 이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한 그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어느 때보다 형상에 집착하고 사실주의적이고자 한다. 그것은 비판적인 리얼리즘이나 고답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를 사회주의적 미학에서의 전형과 같은 형상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그림6 1964년 32회 베니스비엔날레 [painting by Roy Lichtenstein] (Image courtesy labiennale.org)

후기자본주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미술의 금융화?

그러므로 미술의 금융화는 금융자본주의의 추상화가 생산하는 문화적 논리에 비추어 이야기되어야 한다. 미술이 자산으로서 시장 안에서 취급되는 것, 미술품을 구매하는 것이 더 이상 미술 애호가나 그것의 공적인 전시를 위한 공공미술관이 아니라 미술펀드이거나 아니면 미술품의 시장가치를 증대시키고 그것을 통해 수익을 증대시키려는 옥션의 몫이 되었다는 것. 그 역시 미술의 금융화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금융화를 새로운 자본주의에 기반한 문화적 논리로서 받아들인다면 미술의 금융화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비에날레의 부상은 중심과 주변, 제국주의와 식민국가 사이의 구별에 기반한 전 단계의 자본주의와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지구화를 구분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탈식민화가 초래한 의미심장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문화에 등록된 인간과 나머지 세계의 원주민이라는 구분을 지우고 모두를 인구학적으로 평등한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취향의 국제화(우리는 모두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를 경축한다 등)는 물론 문화적 리터러시의 일반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계적인 지구적 질서가 상실한 것이 아님은 지구화가 잘 보여준다.

지구화가 복잡한 관료적, 군사적 장치를 동원한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했던 전단계의 자본주의와 달리 초국적 투기 자본이 시공간을 초월한 직접적인 흐름을 통해 세계를 넘나들며 전지구적 삶을 통제하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융 자본은 직접적인 생산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삶의 리듬이 아니라 투자와 수익이라는 원리에 따라 순식간에 이동한다. 따라서 생산과 판매, 호황과 불황 등의 리듬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지수의 변화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이동하는 자본의 리듬으로 대체된다. 이는 미술의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비엔날레는 이제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며 현대 미술의 지리학을 새롭게 마름질한다. 비엔날레는 특정한 미술 운동이나 유파가 결집되고 발언하는 심미적-정치적 행위의 공간이 아니라 강박적으로 지역적인 것을 추켜세우고 동시에 지구적인 것을 강변한다. 마치 초국적 기구나 금융자본이 경제의 지역성을 강조하며 지역을 넘나들 듯이 비엔날레는 지구적인 미술의 세계에서 수많은 지역의 미술적 실천을 호혜적인 공존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대상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미술의 금융화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비엔날레라고 말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금융화를 설명할 수 있는 계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대 미술이 생산하는 미술적 현실이란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미술의 금융화로부터 만들어지는 다양한 계기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술의 금융화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심미적 지각 체계와 예술적 생산의 원리를 더욱 깊이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은 현실과 미술의 관계 나아가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본의 삶이 우리의 시각적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분석하는 일을 망각했거나 혹은 적어도 게을리 하고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가 비록 이론적 추문에 불과하다는 비난에 휩싸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려고 했던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의 시각적 삶을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삶의 세계와 상관시킬 수 있는 인지적 지도를 그리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예술로부터 어떤 정치적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역시 그런 이론적 작업에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또다른 실패로 결과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실패의 잔여로부터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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