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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통로는 슬픔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2010-04-28  

“유럽을 만든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고야(Goya)이다.” 이 짧은 문구는 타데우즈 칸토르(Tadeusz Kantor)의 내밀한 일기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나는 “나의 미학 노트”라고 과장되게 일컬었던 것에다가 그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젊은 청년이었고,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앞뜰에서, 환각에 사로잡힐 정도의 그러한 아름다움에 놀라서 내 여행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폴레옹이 아니라 바로 고야가 유럽을 만들었다.”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폴란드인인 타데우즈 칸토르(Tadeusz Kantor )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일종의 문화 논리에 들어가지만, 유대계 모로코인이며, 방대한 북구 문화에 문외한인 내가 무엇을 경험했기에 일종의 스쳐 지나가는 통찰에서 그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일까? 나는 어떤 고통으로부터 탄생한 것일까? 칸토르는 절반은 유대인의 마을인 빌로폴(Wielopole)에서 성장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함에 있어서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의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민트와 고수(coriandre), 계피의 향, 커피 볶는 냄새로 둘러싸인 나는, 그 모든 전쟁의 잿더미에 대해 늙은 유럽에서밖에 공유할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을 어디서 알 수 있었을까?

그러나 왜 고야인가? 왜냐하면 영국은 나폴레옹을 패배시켰고, 에스파냐의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는 캉브론(Cambronne, 나폴레옹 시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 장군 - 역주)처럼, “불신의 알비온”(Perfide Albion,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들이 영국을 모멸적으로 지칭할 때 쓰던 표현 - 역주)의 전쟁범선의 화력 앞에서 역시 후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시, 고야야말로 세계의 부조리를 이해했고, 바로 그야말로 광기의 총구와 성스러운 카톨릭 종교재판소의 앙심 깊은 뼈저린 원한의 목격자였고, 또한 “이성의 무질서가 괴물들을 낳는다”라고 감히 썼던 것이다. 바로 그가 그의 황폐한 초상화에서, 그의 스케치와 동판화에서, 사실이건 아니건 설사 굴복시켜야 할 유대인들이 더 이상 없었더라도, 여전히 민중을 아연케 했던 전술한 종교재판소 만큼이나 잔인한 오합지졸인 에스파냐를 유린한 나폴레옹 군대들의 가차 없는 잔혹함을 포착했던 것이다. 고야는 바로 해방가이자 문자 이전의 포스터 도안가이며, 프랑스의 “구세주”에 저항한 덧없는 난봉꾼이었다. 이처럼 세계의 폭력을 그린 자는 그것을 성취한 자보다 훨씬 더 응집력을 발휘한다. 바로 그러한 것이 화가이자 시인의 전달이다. 견자의 전달이다. 지식의 통로는 또한 애도로 구조화되어 있다. 가장 비의적인 지식의 존속, 가장 해방적인 철학, 가장 예민한 신념, 가장 분노하는 의식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외설적인 점령의 고통과 거짓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 말이 몸을 배반할 때, 이성이 존재들의 동의된 교류 없이 적용될 때,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전달하기란 또한 탈구시키기이다. 여기에 입법자의 규칙에 마주한 광기의 지혜가 있다.

거짓 하나 없이, 상처에 대해 넋이 나가지 않은 채, 역사에 대해 엑스레이 촬영을 하지 않는다면, 예술과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자들을 다치게 하고, 쓸모없이 불구가 된 사람들 혹은 책을 든 유대인들, 간음죄를 범한 집시들을 더 이상 그들이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거세해야 한다고 믿고서 트레블린카(Treblinka, 폴란드의 유대인 학살 수용소 - 역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광적으로 때린 것은 유럽의 어느 한 구석에서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그들은 땀에 젖어, 마실 물도 없이, 라이히(Reich,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 영향을 받아 계급 해방과 욕망 해방을 새롭게 결합시킨 정신분석가, 그의 이론은 푸코, 가타리, 들뢰즈 등의 욕망이론에도 중요한 단서가 된 것으로 알려짐 - 역주)적인 동성애자들과 함께, 납으로 봉인된 열차 안에 던져져 거기에 있다.

성은 언제나 권력, 여성의 통제, 몸의 우상화, “외모”의 통제, 그리고 서류의 제재에 굴복한다... 분노가 메타포의 어머니이며 기억의 딸이 아니라면, 우리는 젊은 예술가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까? 매끈한 예술, 순수한 예술, 시류에 편승하는 예술, 잘 포장되어 치명적이며 연막에 휩싸여 급히 사라져버리는 예술을 원하는 공화국은 거짓된 것이다. 소비적 자본주의는 거짓된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인 쾌락의 의무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거기에 고야가 있으며, 아무리 교양 있는 귀족의 말쑥한 관리인들일지라도 그러한 고문관들이 수여하는 상에 그는 아니오, 라며 거부하는 자이다. 테크닉 효과가 된 노스탤지어의 역사가 아니라면, 수십 세기 전부터 살갗 아래로 흐르는 무한의 신화가 아니라면, 패션쇼와 같은, 언어와 재료 변화에 대한 문법학자들의 결코 중단되지 않는 공모를 문제 삼지도 않았던 공허한 수사학과 같은 스타일의 기계적인(mécanique) 변천이 아니라면, 장인들의 굼뜬 관능성이 아니라면, 순수예술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카탈로그 페이지를 넘기듯 스타일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시간 채우기 식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조형 예술의 유사 수업에서, 화려한 복제를 확실히 금지하자.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 채우기, 현실을 관찰하고 그 동요와 한숨을 회복시키지 않기. 살아있는 예술은 죽음의 인류학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빈치가 시체와 해부에 대해 용기를 냈듯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테크닉? 더 이상 그림 그리지 않는 존재들에게 포토샵의 신기루를! 가상은 욕망의 열매이지 그 원인이 아니며, 픽션을 향한 몸의 증식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규범(code)도 없고 손의 훈육도 없는 픽션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자신의 회복의 제스처에 자양분을 공급하게 될 것을 고안해낸다. 그의 내밀한 애도의 충동은 숫자상의 것이기 이전에 신체적인 것이다. 모든 예술은 공공화된 내밀성이다. 한 대상을 만들어낼 합당한 이유를 정립하기 이전에, 각자가 자신의 비밀스런 밤을 탐색할 수 있기를. 가슴에 달라붙은 유방의 곡선을 그리는 법 배우기. 병의 무지갯빛 역광 반사. 알려지지 않은 언어의 각운법. 그랑제콜(grands-écoles,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주로 국가 고급공무원을 배출하는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알려져 있음 - 역주)에서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하며, 썩은 고기로, 납골당의 썩은 냄새로 되돌아가야 하며, 모든 테크닉이 폭력이자 또한 구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술과 과학의 역사를 지하묘지의 창백한 빛 아래 다시 쓰기. 현실의, 그리고 환상화되지 않은 지하. 단지 관념의 통로일 뿐인 전달에 대한 거세된 이상주의와 함께 끝내기.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시체를 통과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며 시간은 귀중하다. 관료들이 관리하는 것은 경제이지 창조성이 아니다. 모든 탐색은 실수와 뉘우침으로 가득한 열광이다. 걸작의 엑스레이 사진은 오늘날 우리에게, 베르메르(Vermeer)가 소실점에서 길거리의 빛을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그림에서 길 한 구석에 앉아있던 거지를 지우는지 보여준다. 상업적인 사고는 과학자와 시인의 손을 이끄는 근본적인 의심을 건너뛴다. 고위관리의 사고는 익명의 상품을 즐기기 위해, 기억은 없어도 부유한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탐구자들의 사회가 아니라 항의자들의 사회를 초래한 방식이다. 전달이라는 것은 잡지의 복사본이 아니라 스승의 활발한 구술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풍요로운 사회는 펼쳐지는 위험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비지(非知, non-savoir)의 불합리한 직관 내에서. 자신의 역사에 대해 듣는 토양 내에서. 일본은 불필요한 돌들에 관해 명상할 줄 알기 때문에 창안을 한다. 이스라엘은 탈무드의 오래된 물음이 탐구자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새로운 테크놀로지 안에서 혁신을 일으킨다. 라틴 아메리카는 세상의 상처들에 붕대를 감아주며, 또한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 생각을 점유하는 만큼이나 고통과 함께 자라난 억압된 기억에 붙들려 있다.

진정으로 창조하기 위해서, 그러한 슬픔들의 재료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고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비어있음”으로 구원의 구조를 만들기.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보잘 것 없는 수단 때문이다. 최선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클리셰(cliché)를 개념화한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키치로 기념비를 만든다. 바로 그 때문에 언론이 효과와 경향에만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론인, 홍보담당자, 마케팅 담당자, 광고인 -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시적인 것이 오랜 흔적을 앞서고, 만일 시간이 있다면, 그로부터 존재하고 살아가는 역설의 프레스코화를 출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의 새로운 세대의 문화와 지시 대상들의 결핍을 통해 마치 하나의 규준처럼 반영된다. 예술가들은 흔들리거나 후퇴한다. 불모의 틀에 순응하는 데서부터 제작에 대한 회귀적 생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극의 뿌리이다. 즉, 예술이 마치 하나의 기교, 기계장치처럼 투사된다고 믿는 것이다.

삶에 관한 하나의 윤리가 들고 일어나 아니오, 라고 발언한다. 바로 고야가 나폴레옹보다도 훨씬 응집력이 있다. 화형대와 수용소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측면을 부정하면서가 아니라, 바로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을 법 안에서 키워가면서이다. 오로지 어린 시절의 강력한 직관만이, 엄격함과 놀이의 즐거움 사이에서, 그 다음으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 예술은 재료에 대한 하나의 이교도적인 형식과 동시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속죄의 정신에 근접한다. 걸작의 고요한 힘은 연민과 거리감, 가공하지 않은 본능, 온건한 하늘에서 출현한다.

다름 아닌 고야가 유럽을 만든 이유는, 유럽이 그의 앞에 나타난 그대로 그가 감히 그것을 글로 썼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누가 역사를 만들었는지를 글로 쓴 것이며, 역사를 고문하거나 겪은 자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타데우즈 칸토르가 자신의 황폐화된 조국 폴란드를 추억할 때, 그가 자신의 「죽음의 교실」로써 죽은 유럽을 만들 때, 마침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스실과 화장터의 화덕을 짓도록 강요당한 유대인들의 무리를 보여주었던 그의 동료 예르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처럼, 마침내 거기에 뛰어든 것이다. 칸토르와 그로토프스키는 단지 두 세기 떨어져서 걸쳐 있는 고야의 형제들이다. 예술이 상실과 슬픔의 알레고리들을 통해 그 두 세기를 결합시킬 때,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세기들은 무엇인가?

건전한 사회는 유행 효과의 모든 건망증 혹은 지름길에 대항한 현재와 과거의 거장들에게 오마주를 바친다. 예술가는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 아니며, 그가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추억으로 축소된 기억은 타락을 통과해간다. 가능한 전달은 매 순간 출현하고 변신하는 감각의 리듬감 있고 구체적인 전체성에서 비롯될 뿐이다. 또한 주문용 카탈로그의 가구와 벽지 리스트보다 질문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필수적이다. 비지식(non-savoir)의 위험 없이, 좀이 쑤시는 열광 없이, 천사장은 자신의 고통 너머로 승천할 수 없다. 하나의 사회는, 만일 공공의 영역이 된 내밀성의 품위를 통해 그 슬픔의 노고와 그 비상에 합법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파멸에 처하게 된다. 거기에 고야의 천재성이 있다. 고래로부터 폭력과 어리석은 짓은 끊임없이 병행되기에, 각 예술가에게 있어서 천재성은 매 세대를 위해 매일의 「게르니카」를 다시 만드는 데 있다. 세기의 폭력을 남기는 것, 그것은 죽음과 애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초상을 통해 후대에 살아남는 일이다.
 

글 : 세르주 우아크닌(Serge Ouaknine)
(다원예술잡지 『무브망(Mouvement)』 53호, 2009년 10-12월호)
번역 : 허명진

<무브망> 53호 특집의 주제는 ‘전달하는 예술(L'art de transmettre)’이다. 한 필자가 지적한대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종말 등의 논의를 거치면서 예술의 전달이라는 물음이 다소 적절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성화되고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그것이 지금 현재에 또 다시 어떻게 작동되는지 고민하는 수행성에 관한 논의에 관심이 쏠리면서, 전달의 문제 또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특집의 취지이다. 즉, “전달은 지식이라기보다 욕망(le désir)의 문제이며, 언표라기보다 관계, 코드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 활성화된 구어(parole active)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Jean Caune) 이외에도 교육과 문화의 나눔 등에 관해 폭넓게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윗글 역시 예술가의 전달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역자 주)

 

Tadeusz Kantor (1915-1990, P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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