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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눈이 멀었다―정보과학의 폭탄이 된 사진 2

2010-07-06  

글 이영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H센터

사진은 눈이 멀었다―정보과학의 폭탄이 된 사진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3. 인덱스론 비판

사진이 담론적 구성이며 그것은 배제의 규칙에 의거하여 진리의 기능을 한다는 주장을 하다 보면 사진이론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떠받들어온 인덱스론을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카메라의 렌즈는 인간의 눈과는 다른 구조와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지각하는 것과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피사체의 형태, 원근감, 색채, 톤 등 모든 시각적인 요소들에서 그러하다. 일반적인 사진은 ‘반드시‘ 피사체를 왜곡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낸다는 신화가 생겨난 이유는 사진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이 피사체와 닮아 보이는 것은 카메라의 여러 가지 기능을 정교하게 조절해서 생겨난 기능일 뿐이다. 예를 들어 건축사진에서 카메라의 틸트기능을 사용하여 수직선을 세우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이 경우 ‘건축물의 벽은 수직선으로 되어 있다‘는 선입견에 따라 눈으로 볼 때의 원근법상으로는 휘어 있는 벽을 수직으로 보이도록 조작을 한 결과 빌딩은 똑바로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4]

인덱스론을 부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사진에는 사물에 속하지 않는 것도 많이 찍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점이 맞지 않아 블러가 된 이미지나 왜곡상들, 렌즈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할레이션 등의 광학적 현상들은 피사체와는 전혀 상관 없이 사진에 묘사되는 것들이다. 이런 요소들이 피사체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으며, 사진의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사진은 그림들보다도 지시대상과 더 완벽하게 닮았다”고 했지만[15] 닮았다는 것은 도상적, 개념적인 것이지 인덱스적인 것이 아니다. 사진과 대상이 닮았음을 확증해주는 것은 관습적 능력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사진에 대상의 물리적 현존의 자국이 찍힌다는 사실 때문에 사진이 초현실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썼지만 사진이 초현실성을 가지는 것은 대상의 현존성이 직접 사진 속으로 찍혀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지 속에 대상이 시각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이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즉 사진적인 이미지구성방식이 초현실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진은 사진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예술이 된 것이 아니다. 정화상과 동화상의 구분의 절대화는 사진의 현실적 기능(기록, 기념, 자료, 등등)에 힘입어 잔존하는 것이다. 예술사진의 가치는 상당 부분 그런 기능분리에 의존하고 있다. 이때 사진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말대로 이론적 대상이고 역사적 대상이다. “사진 프린트는 그 자체가 거울”[16]이라는 크라우스의 말은 버닝, 다징 등 여러 가지 손작업을 통해 프린트를 변형할 수 있음을 안다면 즉각 수정되야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징으로 "우리가 사진 앞에서 실제로 갖게 되는 사물들의 현존성“[17]을 들고 있으나 사진은 사물의 현존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며, 인덱스는 더더욱 아니며, 다중적 매개가 개입해 있는 번역이고 치환이다. 그것은 의미론적(hermeneutic)이고 담론적이며, 역사적인 치환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크라우스가 ‘사진적’이라는 말로 부른 어떤 구성체를 통한 치환이다. 그러나 ‘사진적’이란 말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사진에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둘러싼 패러다임과 담론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거기에는 사진으로 대상을 묘사할 때 개입하는 피사체-렌즈-필름(혹은 CCD)-뷰파인더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선의 장치들의 특수성도 포한된다. 이런 이치로, 주민등록증 사진 속의 이미지는 내가 아니다. 그 사진 속의 이미지와 내가 닮았다면 그 진실성은 사진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정제도의 진리체계이다. 이때 진리란 사물을 해석하고 세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행정제도가 관리를 위하여 사람을 체계 속에 할당하고 그 인물이 서류철 속의 그 번호와 일치함을 확증해주는 사무체계의 진리일 뿐이다.

크라우스는 인덱스론을 스냅사진에까지 밀고 나가, “스냅사진이 대상과 정확히 닮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스냅사진에 대한 과도한 신화화이다. 역사적으로, 스냅사진을 통하여 벤야민이 말한 ‘광학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 구현되어 있으며, 그를 통해 논리를 초월한 어떤 진실의 순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신화적 담론일 뿐이다. 1985년 오사카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산중턱에 추락한 JAL123기의 경우 어떤 사람이 자기 집 베란다에서 우연히 찍은 스냅사진을 통해 추락원인을 알아냈으나, 추락원인이라는 진실은 사진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해석하는 방법과 분석능력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다. 인덱스에서는 사진과 피사체가 닮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피사체가 닮아 있다고 보이게 만드는 심리적, 시지각적 끼워맞추기(articulation)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심리는 다분히 시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심리와 연동된 눈은 카메라가 하는 주밍, 피사계의 심도조절, 노출보정 등의 역할을 해낸다. 그러면서 피사체는 사진과 닮아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존 탁은 단적으로 말한다. 사진이 인덱스라는 사실 자체는 어떤 확정된 의미도 없다고 말이다. “역사편찬에 동원되는 수사(修辭)를 사실의 수준에서 봉쇄해 버리고, 사진의 의미를 지시성[18]의 수준에서 봉쇄해 버리는 것은 역사적, 사진적 담론의 장에서 있어 왔던 일이지만, 그러한 수사와 의미는 한 번도 그런 장속에 완전히 삼투해 들어간 적이 없다. 그것들의 야망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들은 국지적으로 전개되는 일일 뿐이며, 그 토대는 언제나 논란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19]

추락하기 직전 어느 민간인이 찍은 JAL123편 항공기.
이 사진의 인덱스적 진실은 사진을 스캔해서 디지털로 초리하고
해석하는 복잡한 과정 끝에 나타났다. 이 사진으로 인해 드러난 사고의 원인은
사진이 대상(항공기)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항공사고 조사의 오래된 역사,
사고조사의 기법, 경험, 담론들이 합쳐져서 드러난 것이다. 만일 닮았다고 주장하려면
사진이 입자가 거칠어서 나타나는 구불구불한 윤곽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잉747의 윤곽은 저렇게 생 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분류표지가 없다면 진리의 인덱스라고 할 수 있는 사진 기록은 ‘거의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나 분류표지의 코드는 자명하지는 않다.“[20] 사진이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냈기 때문에 인덱스라고 하는 주장은 아무런 사실도 지시하지 않는다. 지질학의 지식체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돌덩어리는 그냥 자연물 돌덩어리일 뿐이듯이, 지식과 진리의 체계로 들어가지 않은 인덱스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어떤 논의나 담론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1천5백장의 일제시대에 찍은 유리원판 사진 중 상당수는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무엇을 찍은 것인지 충분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것이 많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상당한 예산을 들여 그 사진들의 인덱스 너머의 진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성과는 제한적일 뿐이었다. 대상에 대해서 텍스트가 전해주지 못하는 비밀스런 진리를 전해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인덱스가 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사람이 담론의 지식장치를 들이대어 말을 시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진이 인덱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인덱스처럼 보이는 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장치가 필요한지 말하는 것이 훨씬 학문적인 태도인 것 같다. 존 탁이 말 하는 기술이란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수가 얼마고 이미지처리 엔진이 어떤 것이고 하는 뻑적지근한 수준이 아니고, 사진을 정리하고 체계에 넣어 기능하게 만들어주는 기본적인 처리의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기술적-역사가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인 가워, 제스트, 타플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평범함이다. 그들은 역사가에게는 아주 친숙한 “[푸코가 말하듯이] 기록, 표시, 파일작성, 도표로 사실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작은 기술들”[21]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진행상의 보조수단 밖에 되지 않는 평범한 지식의 기술이지만, 카메라의 작용이라는 차원에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권력의 양상 속에 사진기록과 조사를 위치시켜 주는 그러한 지식의 기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런 기술 없이는 어떤 사진도 의미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22]

그러므로 우리는 인덱스로서의 사진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손에 흙을 묻혀서 벽에 찍은 것이 어떤 언어도 아니고, 어떤 소통할 수 있는 의미나 지식을 띄지 못하듯이, 인덱스로서의 사진 자체는 아무런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인덱스론은 롤랑 바르트에게서는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을 통하여 카메라 앞의 대상물의 현존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을 낳는데, 존 탁은 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나는 기록 사진이 사람을 이끄는 무게는 전혀 현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바르트가 후기에 썼던 용어를 빌리자면― 항상 담론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며, 기록의 지위와, 그 증거의 권력효과는 제도적, 담론적, 정치적인 것들이 엮어져 있는 장에서만 생겨났다는 것이다.“[23] 여기서 말하는 바르트의 후기란 『카메라 루시다』를 말한다. 그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이 바르트에게 현전한 그 순간의 황홀한 체험에 대한 것이다. 그 체험으로 인하여 바르트는 사진이 자신에게 죽은 어머니를 매개해준 그 놀라운 현상에 대한 엑스타시를 서술한 것이었다.

물론 사진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존재론적으로 다른 점은 사물의 현존에 강하게 힘 입어서 나타나는 이미지란 점에서 인덱스론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만은 없다. 하지만 전지구화의 네트웍화라는 현실 앞에서 사진 이미지가 무엇을 닮았다는 사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찮은 사진 한 장이 네트웍을 타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네트웍이야말로 사진의 존재론을 따지는데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오늘날의 사진가들은 점점 더 화소수가 큰 디지털백을 사용하고 있다. 가격이 화소당 만원이라고 할 정도로 아직은 고가인 디지털백은 상업사진을 하는 사진가들에게는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이런 백으로 찍은 사진은 파일 크기가 아주 크기 때문에 인터넷에 올릴 수는 없지만, 이런 사진가들이 들고 다니는 포트폴리오는 더 이상 인화지가 아니라 외장하드이다. 사진이 완전히 데이터가 되었다는 뜻은 네트웍의 효율만 높아지면 얼마든지 이동성이 급격히 높아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네트웍의 증가하는 속도가 사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4. 네트웍의 우주는 팽창하여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중고등학생들이 졸업식 때 교복을 찢어버리고 밀가루를 뿌리며 난동을 부리듯이 축하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전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트웍에 사진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에는 그런 일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네트웍을 통해 그런 사진을 보고 말세라는 등, 교육이 엉망이라는 등의 말들을 한다. 네트웍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가공할 벡터에 대해서는 의식도 못하고서 말이다. 네트웍은 단순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을 형성하고 태도를 만들어내며 문제의 영역 마저도 만들어 낸다. 벤야민은 예술이 어려운 문제를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 해결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새로운 예술은 네트웍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fine art가 아니라, 정보의 가속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파고 드는 techne로서의 예술이다.

중학생들이 졸업식 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는 사진이 네트웍에 올라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비난했다. 자기들도 중학교 때 그렇게 했으면서.

고즈넉한 예술사진가들이 아직도 사진의 퀄리티를 신주단지 처럼 모시면서 아날로그 사진의 아우라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네트웍에서는 조잡한 퀄리티의 사진들이 바이러스처럼 마구 퍼지고 있다. 그 사진들은 개인 사생활의 비밀을 폭로하기도 하고 수천억원 들여 개발한 새로운 자동차모델에 대한 기밀을 단숨에 깨버리기도 한다. 값이 싸지만 위력적인 네트웍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자들이 알카에다나 이라크의 <유일신과 성전>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테러단체들이다. 이들은 AK소총과 RPG7을 근간으로 하는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네트웍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 공포효과를 누리고 있다. 그들이 잡은 포로의 겁에 질리고 맞아서 상처 난 사진을 알지자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공표했을 때, 당사국이 아닌 나라의 사람들도 회교근본주의의 비타협성에 벌벌 떨었다. 그들은 정보과학의 폭탄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자들이다.

한국사람들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수십명을 쏴죽인 조승희라는 한국출신 학생의 모습을 본 것도 네트웍을 통해서였지 종이에 인화된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오늘날 네트웍은 갤러리이고 신문이고 인화지이며 담론의 장이고 새로운 광장이다. 그런데 그 광장은 누구도 가만히 앉아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브라운 운동을 하듯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는 가속화된 벡터의 지옥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정지된 시간으로서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간의 죽음으로서의 사진은 오늘날 시간의 극단적인 축소로 나타나면서 시간의 개념을 ‘과거시간에서 실시간(real time)으로’ 바꾸고 있는 오늘날의 미디어 상황에 어떻게 참견을 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납치된 분당샘물교회 신자들의 사진이 알 자지라방송을 통해 공개됐을 때 이 조잡한 퀄리티의 사진들이 한국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나는 별로 안 떨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미디어 융합의 문제이다. 미디어의 융합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식의 역사구분의 문제도 아니고, 예술의 양식의 문제도 아니며, 미디어 아티스트나 큐레이터가 구호처럼 내걸었다 사라지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미디어가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이며, 미디어의 생리의 문제이다. 근대의 시기에, 사진과 텔레비전, 영화와 라디오는 다 기능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구분되어 있는 매체였다. 서로 간에 연결될 수 있는 통로도 없었고, 통로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으며, 세계는 각각의 매체 속에 구획되어 존재하고 있었으니, 영화 속의 인물과 텔레비전 속의 인물은 다른 것이었고 서로 호환되지도 않았다. 오늘날 영화 속의 인물을 핸드폰으로 볼 수 있고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영화와 전화, 라디오의 밀접해진 관계를 말해준다. 결국 매체간의 구분에서 매체 간의 연결이 중요해진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우리가 쓰고 있는 매체의 상황은 매체간(intermediacity) 상황이다. 누군가 억지로 번역한다면 간매체성 혹은 상호매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은, 오늘날 매체에 대해 성찰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오늘날 모든 매체들은 다른 매체와 손을 잡고 있다. 그것은 매체의 기능에서도 그렇고 인터페이스에서도 그렇다. 이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매체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미 1960년대에 딕 히긴스는 인터미디어의 개념을 통해 오늘날 미디어의 상황에 대해 예견했으며, 다양한 미디어의 융합을 요청한 바 있다. “뒤샹의 오브제가 빛나는 반면 피카소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뒤샹 오브제는 진정으로 미디어와 미디어 사이, 조각과 다른 것 사이의 틈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피카소는 그저 그림으로 된 장식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콜라주와 사진 사이의 영역을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독일의 존 허트필드는 우리 세기의 가장 훌륭한 그래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24]

역사적으로, 그런 매체간 협업이나 융합이 나타나기 전에 매체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던 상황에서 가장 덕을 본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은 막대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망치기 싫어하는 소심함 덕분에 오로지 사진이라는 테두리 안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었다. 그런 근거 중의 하나가 사진은 생방송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전파매체와 달리, 사진은 항상 벌어진 사건과 거기서 파생한 이미지 사이의 시간차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고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사건을 뒤늦게 전달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단점인데 사진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된다. 사진은 실시간(real time)의 모든 축복과 저주로부터 면역되어 있다. 하지만 사진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매체의 폭격에서 보호되어 있을 것인가? 사진은 다른 미디어와 융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지금과 같은 고립의 양상을 지속할 것인가?

오늘날 사진이 매체로서 역할 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더 이상 인화지와 전시장이 아니라 네트웍의 모니터이다. 모니터는 터미널(끝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그 끝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터미널과 만나 새로운 분절과 접합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모니터는 들르즈가 말한 기계와 비슷하다. 그것은 항상 단절시키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 단절의 끝에는 새로운 접합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사진이 미디어 환경에서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사진은 미디어 아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20세기의 미디어가 무엇을 해 왔는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디어 아트가 아니라 ‘미디어 환경-혹은 환경 미디어의 재구성에 대한 성찰작업’이다. 그게 아트이건 아니건 말이다. 그런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미디어 아트가 어떻게 실패하는가는 2001년 「미디어 시티 서울」에서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작업에서 잘 나타난다. 제목 대로, 서울은 미디어 시티이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서울은 온갖 종류의 미디어로 포화상태에 있으며, 그것은 땅위와 땅 아래, 도시의 벽면과 공간에서 다 그렇다. 그러나 오브리스트는 한국의 미디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기획해서 광화문 네거리의 전광판에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상영된 미디어 아트는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인해 아무리 보려고 기다리고 서 있어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전광판의 주인공인 광고이미지의 기운을 도저히 당해내지 못했다. 전광판을 이용해 도시 전체를 미디어 아트 갤러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야심찬 기획은 실패하고 만다.

오늘날 미디어의 문제는 비릴리오가 우려했던, 묵시록적 파국의 상황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루지 않는 미디어 아트는 기본적인 효용가치도 없다.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이미지의 퀄리티가 아니라 그 확산의 양상과 속도다. 옛말 천기누설이란 결국 정보의 벡터의 문제가 아니던가. 지금 사진이 당면한 문제는 예술이냐 아니냐,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과학의 폭탄이 된 사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진이 정보과학의 폭탄이 된다면 누가 그 뇌관을 제거할까. 사진의 폭발물처리반(EOD: Explosive Ordnance Disposal)은 평론가인가, 작가인가, 대중인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2001년에 미디어 아트를 실현하려고 했던 그 공간에서 미디어는 모뉴먼트 조차 압도하고 있다. 


[14] 카메라와 눈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나는데, 우선 카메라는 고정할 수 있으나 눈은 고정될 수 없고, 카메라는 데이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눈은 지금 보고 있는 데이터도 심리와 지식의 개입으로 다르게 보게 된다. 카메라는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기구지만 눈은 심정이나 심리를 표현하는 능동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15] 로잘린드 크라우스,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p.121.
[16] 크라우스, p.51
[17] 크라우스, p.118
[18] Indexicality의 번역어. 찰스 퍼스는 사진이나 그림같은 기호를 대상의 시각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index라고 불렀는데, indexicality는 사진의 그런 지시적 속성을 가리킨다.
[19] 존 탁(John Tagg), 『역사의 연필』(The Pencil of History), Fugitive Images-from Photography to Video, ed. Patrice Petro,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p.289.
[20]  존 탁(John Tagg), 역사의 연필, 사진이론의 상상력 이영준 편역, p.156. 
[21] 미쉘 푸코(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 Trans. Allan Sheridan. (New York: Vintage: 1979), pp. 190-191.
[22]사진의 인덱스적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제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최근 프랑스 의회에서 사진에 대한 법안상정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사진의 인덱스적 진실은 특정한 틀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프랑스의 여당인 대중운동연합(UMP) 소속 의원 50명은 지난 15일 광고 포스터와 신문, 잡지 등에 실리는 사진을 컴퓨터로 가공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여성을 모델로 한 광고에서 원판 사진을 수정해 젊고 늘씬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은 청소년들 사이에 과도한 다이어트를 조장하는 등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사진 가공 행위 제한 대상에는 상업광고 사진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 선거 포스터, 예술사진도 포함된다. 예컨대 정치인 보도 사진에서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을 지우는 행위도 규제 대상에 들어 있다. 이 법안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수정된 사진의 경우 '가공 사진'이라는 설명을 반드시 붙여야 하며,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3만7500 유로(약 6800만원) 혹은 광고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토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9년 9월22일)
[23] 존 탁(John Tagg), p.167
[24] 딕 히긴스(Dick Higgins), Modernism since Postmodernism, Essays on Intermedia, San Diego State University Press, 1997,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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