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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대칭성의 정치학

2010-09-10  


글  홍철기

1. 백남준은 기술 유토피아의 예언자인가? 아니면 백남준의 예술은 기계문명의 파괴와 그에 대한 거부를 위한 공공연한, 혹은 비밀스러운 수단일까? 사실 백남준에게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이 모두 발견된다. 한편으로 그는 전자기술의 미래가 종이에 인쇄된 정보의 시대를 종결시킬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기술 발전에 대한 일견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의 예술에서의 기술의 활용은 기술과 과학의 진보의 방향을 단순히 가리키기보다는 그것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기계와 예술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행위를 실행하는가 하면 기술의 사용을 본질적으로 유목민이나 선사시대와 같은 비근대적이거나 전근대적 주체의 행위와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연속성의 핵심에는 단순히 문화―즉 서양의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에 대한 탈근대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 반성의 산물―가 아닌 기술의 사용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전통의 차이를 극복하고 그 결과 양자를 융합시키려는 변증법적 시도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렇다면 백남준의 진정한 입장은 이 두 극 사이에 존재한다고 봐야할까?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구분에 따르자면 신화적 사고를 대표하는 브리콜뢰르와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대표하는 엔지니어 사이에 존재한다고 봐야할 것이다.[1] 그와 슈아 아베의 관계는 결정적인 것이지만 백남준 자신은 결코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의 창조 행위는 언제나 기술이 부과하는 틀―하이데거가 이해하는 방식의 기술의 의미에서―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남준의 기계파괴행위는 브리콜뢰르의 그것으로만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티비와 주파수, 피드백 등은 극히 우연히 그에게 주어진 신화적 작업의 재료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브리콜뢰르에게 인쇄물의 시대의 종언과 그에 따른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 가능성의 열림은 자신의 작업과 사고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술에 대한 (비)활용과 인간의 인류학적 모체(matrix)―추상적인 의미에서의 동양, 선사시대, 혹은 유목민과 같은― 사이의 연관성, 혹은 연속성을 보다 민감하게 인지한다.

3. 여기서 우리는 백남준이 바로 그 사이에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가정과 물음은 바로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제안한 일련의 혼성적(hybrid) 개념들과 강한 친화성을 보여준다.[2] 20세기 이후의 어떤 과학기술사상가도 하이데거의 그림자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없듯이 라투르 또한 하이데거의 명제들의 영향 하에 머물면서 그것들을 비튼다. 기술은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존재는 언제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다. 라투르는 이와 같은 두 명제를 하이브리드의 개념으로 합성한다. 기술의 주체의 목적을 대상에 투영하는 투명한 중간매개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근대적 사고양식이 명령하듯이 주체와 대상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곧 하이브리드이자 하이브리드의 일부로서 기술적인 존재들 사이에 있으며 따라서 순수한 주체와 순수한 대상이라는 근대성의 양극으로 분리―라투르에 말을 빌리면 '정화(purification)'―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술과 관계하는 한 ―핵시대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존재양식은 결코 기술과 무관할 수 없는데― 우리는 주체와 대상, 문화와 과학, 신화와 합리성이라는 구분의 양극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지 않은 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이러한 중간 상황은 기술 자체의 본성 때문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모든 기술은 ―그리고 모든 인간 행위는 바로 기술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순수한 행위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매개의 과정이자 그 결과다.[3] 이는 근대적인 구분을 전제로 하는 과학과 정치, 자연과 문화의 틀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오직 대상으로서의 자연만을 알며 과학적 객관성은 사실이 순수한 대상에 근거하지 않을 때, 즉 인간 주체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을 때 상실된다. 반대로 정치와 문화는 인간 주체만을 안다. 과학적 대상과 자연은 인간의 정치와 문화의 재료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원인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주체의 주관성의 산물이다. 과학자는 자연과 기구, 장치, 실험실, 그리고 법과 정치 등을 총동원하여 사실을 구성하지만 과학적 사실의 타당성은 오직 인식론의 영역에 맡겨진다. 정치가는 마찬가지로 개인과 대중뿐만 아니라  전쟁과 소통의 기술적 도구를 동원하여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지만 정치학은 모든 대상을 도구로 다루는 주체이자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개인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 두 극의 나머지 영역, 즉 두 극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코 이 두 극에 포함될 수는 없는 기술과 하이브리드의 영역이 남는다.

5. 근대 과학이 기술 없이, 즉 실험실과 기구와 장치들 없이 성립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정치도 이러한 기술적 '수단'들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근대 정치의 핵심조직인 근대 국가란 바로 "특정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이다(막스 베버).[4] 물리적 폭력이란 여기서 근대 국가의 고유성을 정의하는 수단이 된다. 즉 국가가 국가인 것은 바로 그것이 물리적 폭력 수단을 정당하게 독점했기 때문이다. 이 폭력 수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기와 법이 결합된 군대와 경찰이며 우리―라투르가 보기에는 '우리 근대인'―가 과학과 정치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바로 그 인간과 비-인간이 매개된 결합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정치의 세계는 개인들의 이익과 윤리적 선택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국가(리바이어던)를 수립하는 사회계약의 주체는 자연 상태의 벌거벗은 개인들이라고 주장한 홉스는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초한 정치사상가다.[5] 문제는 홉스의 자연상태라는 생각의 허구성이나 그의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이러한 사고방식의 정초를 통해 하이브리드로부터 주체를 추출하였다는 점이다―바로 근대 과학이 실험실에서 자연으로부터 대상을 추출/구성하였듯이.

6. 라투르는 이러한 근대성의 두 극(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 주체와 대상)의 수립의 성격을 비대칭적이라고 정의한다. 근대 세계 내에서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 주체와 대상을 동일한 방법론으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비대칭성은 외부로 수출되어 근대인과 비근대인 사이의 비대칭성으로 확장된다. 즉 자연과 사회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수 없듯이 근대인과 비근대인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인은 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 주체와 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만 비근대인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과학과 자연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존재양식은 엔지니어인 반면 비근대인은 브리콜뢰르의 처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7. 그러나 비근대인이야말로 라투르가 보기에는 우리와 기술이 하이브리드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대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술이 과학과 문화라는 비대칭적인 두 극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근대성의 대안을 찾기 위한 우리의 원초적 조건을 이룬다. 그러나 반대로 근대인은 하이브리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을 무제한적으로 증식시키고 동원할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이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인의 기획은 1989년의 사회주의의 붕괴―자유주의가 스스로 쟁취한 승리가 아니라 적(사회주의)의 붕괴의 결과라는 점에서 서구 자유주의 기획의 기회가 아니라 결정적인 위기인[6]―와 생태적 낙관주의의 종말이라는 이중의 결정적인 위기에 직면해있다. 이제 비대칭성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대칭성이라는 근대인과 비근대인의 공통적인 인류학적 조건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학문적인 측면을 라투르는 '대칭성의 인류학(symmetric anthropology)'이라 명명한다. 고르디오스의 매듭(하이브리드)은 또 다시 절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대인에 의해 절단된 상태에서 다시 묶어야만 하는 것이다.

8. 라투르의 대칭성의 인류학은 인간과 비-인간이 매우 복잡하게 매개되는 과정을 기술(description)하는 것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비-인간 행위자들과 결합되거나 분리되면서 번역되고 변형되고 매개되는가를 과학과 정치학에 근거하여 설명하지 않고 단지 추적하는 것이 바로 대칭성의 인류학이 이루고자 하는 바이다. 이에 반해 백남준(과 그의 동조자들)의 예술가로서의 행위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 그와 같은 과정을 창출/창조한다는 점에서 '대칭성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추적의 과정을 창조의 과정과 단순히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칭적인 예술가는 결코 순수한 근대적 주체가 아니면서도 인간과 비-인간의 매개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어떤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인류학보다는 정치학의 범주가 더 유용할지 모른다.

9. 백남준에게서 대칭성의 예술 정치의 가능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측면은 바로 그의 방법, 특히 그 중에서도 피드백(되먹임; feedback)의 방법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피드백은 현대 사회에서 통제와 창조가 중첩되고 양자에 대한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나타낸다. 한편으로 피드백은 보다 정교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내재적인 통제의 기술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이룬다. 노르베르트 위너(Norbert Wiener)는 피드백을 기계의 예측된 수행이 아니라 실제의 수행에 따라 그것을 통제하는 기술로 정의한다. 피드백을 통해서 "무질서를 향한 기계적 경향"을 통제할 수 있으며 "엔트로피의 정상적인 방향을 임시적으로, 그리고 국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7] 다시 말해서 피드백에 의한 통제는 통제 자체를 무질서에 가장 유사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혹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통제의 정밀도를 높이는 기술인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확장은 곧 통제의 확장을 뜻하게 된다. 피드백을 통해 통제는 무질서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변형됨으로써 보다 더 완전해지는 것이다.

10.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피드백은 백남준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의 음향/시각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창조행위의 핵심적 기술―혹은 반(反)기술―이다. "피드백은 비디오 아티스트가 선호하는 유일한 기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백남준은 말한다.[8] 왜냐하면 피드백은 영원성을 나타내는데, 다시 말해서 시차와 동시성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혹은 양자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노스텔지어는 피드백의 제곱근이다'라는 백남준의 표현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지 모르겠다. 피드백은 모든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위치와 요소들을 동시에 연결시키기 때문에 의도와 비의도, 계획과 오류, 필연과 우연의 중간상태를 가로 지르는 비정상적인 소통과 참여의 기술이라고 까지 할 수 있겠다. 즉 아마도 이러한 점에서 피드백은 전자기술과 유목민, 기술에 대한 거부와 기술의 진보, 고대인과 근대인, 서양과 동양, 예술과 기술이라는 구분을 횡단하는 대칭적 정치학의 특유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 이와 같이 피드백이 작동하는 중간지대, 혹은 즉 통제와 창조가 서로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는 중간상태란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말한 것과 같은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라고 할 수 있다.[9] 아감벤은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개념을 계승하여 이를 원래의 저자의 의도는 정반대로 정교화함으로써, (비록 아감벤이 들뢰즈와 달리 슈미트의 영향 하에서 통제대신 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통제에 저항하는 창조의 문제를 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다룰 수 있게 도와준다. 슈미트에게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10] 주권자는 지금이 예외상태(내전, 혹은 무질서)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예외상태에서 기존의 법률(피드백보다는 예측가능성에 의해 제정된)을 중단시키고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감벤은 이러한 슈미트의 정식화를 비틀어서 정치적 삶의 문제를 조명한다. 예외상태에서 중단되는 것은 법률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능력과 잠재성이다. 즉 예외상태는 객관적인 대상, 즉 법률만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주체도 중단되는 상태이며 이렇게 중단된 주체와 대상은 서로 구분하기 힘든,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구분될 수 없는 지대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중단은 바로 통제의 작동 방식이자 "장치(dispositif)"를 통한 권력의 행사방식이다.[11] 통제의 기구들은 인간을 외적으로 규제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를 중단시킴으로써 작동하며 따라서 인간 삶의 대칭적 창조성만이 이에 대한 적절한 저항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단되어 하이브리드로 뒤섞여 버린 대상과 주체를 그것의 근대적인 양극으로 복원―근대성의 불가능한 기획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유지시키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시키지 않으면서도, 즉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지 않고 다시 묶으면서도 그것이 다시 통제 장치의 수중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만드는 기술과 사물의 새롭고 자유로운 용법의 창조가 요구된다.[12]

인용

[1]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서울: 한길사, 1999).
[2]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 홍철기 옮김 (서울: 갈무리, 2009).
[3] Bruno Latour, "A Collectives of Humans and Nonhuman: Following Daedalus's Labyrinth" in Pandora's Hope: Essays on the Reality of the Science Studi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p. 174-215.
[4] Max Weber, "The Profession and Vocation of Politics," in Political Writings, eds. Peter Lassman and Ronald Spei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p. 310-311.
[5]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p. 80; Leo Strauss, The Political Philosophy of Thomas Hobbes: Its Basis and Its Genesis, trans. Elsa M. Sinclai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2).
[6]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보경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07).
[7] Norbert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Garden City: Double Day, 1967), pp. 24-25; 이러한 통제의 개념의 정치철학적인 정교화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푸코가 "훈육사회"라 불렀던, 감금의 기술을 중심으로 권력이 행사되고 사회가 조직되는 지배형태의 패러다임이 "통제사회"에 의해 대체된다고 말한다. 이때 통제란 훈육과 달리 개인의 신체에 외적으로 가해지는 제약(주형)이 아니라 주체에 내재적으로 행사되는 변조(modulation)다[Gilles Deleuze, "Postscript on the Control Society" in Negotiations,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pp. 177-182].
[8]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 in Global Groove 2004 (New York: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2004).
[9]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08); 「예외상태」, 김항 옮김 (서울: 새물결, 2009).
[10] Carl Schmitt, Political Theology: Four Chapters on the Concept of Sovereignty, trans. George Schwab (Cambridge: MIT Press, 1985).
[11] Giorgio Agamben, "What is an apparatus?" and Other Essays, trans. David Kishik and Stefan Pedatell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12] 이와 같은 사물과 기술의 새로운, 혹은 자유로운 용법의 창조에 관해서는 조르조 아감벤, 「목적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김상운, 양창렬 옮김 (서울: 난장, 2009)]과  Giorgio Agamben, Profanations, trans. Jeff Fort (New York: Zone Books, 2007)을 참조하라.

글쓴이 홍철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정희 시대의 헌법사상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홍철기는 최근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번역한 바 있다. 노이즈 음악가, 즉흥음악 연주자, 영화음악작곡가, 사운드아티스트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출처『백남준의 선물 2 - 고르디아스의 매듭 다시 묶기』(백남준아트센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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