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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디자인을 보는 시각

2010-10-05  


글  조현신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

현재 디자인은 창조 산업의 주역으로서 문화의 시대를 이끄는 최전방 분야다. 하지만 이런 인기와 호황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디자인계는 중대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생태계 문제가 부각되면서 디자인이 겉모양의 변화를 통한 인위적 폐기를 조장해 지구쓰레기를 만드는 주역이라는 비난부터 시작해, 스타 디자이너들이 참여한 글로벌 브랜드들이 지구촌 오지시장까지 독식하며 상업주의의 첨병 역할을 한다는 지적, 경계를 초월한 문화 사업으로 지역 정서와 역사를 파기하면서 문화적 획일주의를 전파하는 주범이라는 등등이다. 그래서 디자인한다는 것이 무언가 폼은 나는데 단지 폼 나는 것 이외, 그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의심이 드는 기류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풀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은 저개발국의 디자인 정책을 후원하고, 생태 디자인 선언을 하고, 사회적 디자인, 착한 디자인. 지역 디자인 등의 개념을 내세우며 디자인 연구를 가중하는 등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부족한, 디자인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각 분야 간의 경계마저도 무너지는 이때, 디자인도 그 태생적 계보로부터 변신을 시도하여 새로운 영역으로 나가야 할 때가 아닐까?

 

테크네에서 프락시스로

그 태생을 생각해 보면 대량 생산과 기계문명을 기반으로 한 현대 디자인이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기능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 미학, 창의성, 상징성을 부가하면서 몸체를 부풀린 것은 당연한 역사적 행보였다. 새로운 기계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혁명적 생활양식을 꿈꾸었던 디자인 선구자들의 고심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러한 고심은 비즈니스와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조합시킨 미국의 1934년 <포춘>지의 기사를 통해 한 마디로 귀결되었다. “이제 세탁기, 용광로, 전화교환대, 기관차의 차례이다. 누가 이런 기계들을 디자인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열렬한 대답이 디자인의 속성을 규정하면서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소비시대를 맞아 이런 디자인에 대해 사회적이고 해석적인 층위의 시각이 덧붙여지면서 디자인은 기능 이외에 사회적 상징, 기호(sign)로 축약되는 과정을 거쳐, “스타일로 (당신 삶의 모든 가치를) 승부하라”는 현 지점에까지 다다랐다.

이렇게 새로운 생활 도구를 위한 과정에서 출발한 디자인은 자연히 포에시스(poesis)의 관점 즉 제작을 위한 기능적 지식과 판매를 위한 미적 쾌감의 가중, 욕망의 자극에만 집중하여 전개되었다. 포에시스는 희랍어로 기능 테크네를 기반으로 하는 ‘만든다’라고 하는 목적지향적 행위이다. 즉 기술 (테크네)을 가지고 행하는 것으로, 이는 그 행위가 완결되었을 때 더 이상 사고하지 않고 완료된다. 책상이 필요하니 형태 고안해서 만들면 끝난다. 이때 사용되는 이성은 서구 모더니즘의 유토피안 지향이 무참히 끝나고, 서구의 지성들이 스스로 개탄하고 반성했던 도구적 이성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포에시스의 영역은 앞으로 인공 지능 테크놀로지가 담당한다고 보아도 된다.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앞으로 형태는 테크놀로지의 매트릭스 선상에서 공기방울처럼 떠다니는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한 선택일 것이라고 했다. 디자인붐(designboom)에 올라오는 페이퍼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을 보라. 그것들은 물론 창조적인 미감을 지닌 디자이너 그룹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그 이후 행해지는 모든 과정은 빌렘 풀루서의 말대로, 공기방울처럼 떠다니는 숱한 형태와 기능의 가능성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행위의 하나로 귀결되어 가고 있다.

 
부엌 노동의 프라하 프리즘, 현대 여성은 자신의 몸과 이미지를 부엌에서도 과시한다. 하지만 그 과시의 뒤편에 아직도 웅크리고 마늘을 찧고 배추를 씻는 여성 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 보자. 그래서 그 노동을 좀 더 즐거운 방향으로 변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문적 시각의 디자인이다.
* 사진 출처: 디자인 비평집 『이야기와 이야기』 중, 조혜영의 한국의 부엌 디자인에서)

이 즈음에서 디자인은 더 이상 형태나 기능, 미적 쾌감 혹은 그것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상징적 역할을 논할 것이 아니라 프락시스(praxis)로 전환 되어야 한다. 프락시스는 기술인 테크네에 기반을 둔 행위가 아니라,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지혜에 기반을 둔 행위로서 좁게는 도덕, 윤리, 철학적 즉 인문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락시스는 그 행위가 파급하는 것들에 대한 사유,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것들 대한 사유’를 전제로 한다. 즉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그 목적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묻는 행위로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행위를 위한 이성을 성찰적 이성이라고 했다.

이 지성은 편하고, 예쁘고, 좋고, 색다르니까 만들어서 무작정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게...그런데..” 하고 다시 묻게 하는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락시스에 바탕을 둔 디자인은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두어 그 환경이 어떤 기능과 미학과 상징적 역할을 하는지 만을 보지 않는다. 프락시스적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가,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궁극적으로 불러오는가’ 에 초점을 두어 행위를 한다. 이렇게 디자인을 환경과 인간의 관계로만 보지 않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보았다면 도시개발 한다고 강제철거 하는 용산 참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무늬, 문사철

이런 개념이 서구적 개념이라면 우리에게는 문사철(文史哲)이 있다. 하늘의 이야기는 천문이다. 선현들은 이 천문의 대표주자로 도(道)를 이야기했다. 땅의 이야기는 지문이다. 이는 하늘과 조우하여 사시사철 변하는 것들로 도의 형상화, 물질화라고 할 수 있다. 색이 있고, 모양이 있고, 변화가 있고, 그 속에서 조화와 파괴로서 살리고 죽이는 온갖 드라마가 펼쳐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세계가 지문이다. 그리고 이 장대한 드라마에서 아주 일부분인 인간이 만드는 이야기가 인문이다. 그리고 인문의 꽃이 단연 문사철(文史哲)이다. 문은 인간의 만든 이야기, 사는 기억이며, 철은 세계관이다.

문사철은 말 그대로 인간들의 이야기(그것이 만들어 낸 이야기든, 삶의 진실한 이야기든)와 기억과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문사철로서의 디자인은 개별 삶의 주체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살아온 기억의 물적 증거를 존중하며, 그 기반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쌓으려고 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해석과 방향을 제시하는 디자인이다.


서울의 달동네, 삼선동의 정대진 할아버지는 레인지를 주워다가 초록으로 칠해놓고 사신다. 이처럼 삶에의 의지를 물질화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망막적 시각에서라면 어찌 이 짙고 탁한 초록이 아름답겠느냐마는, 그 태초의 디자인 행위에 대한 경이감과 존중이야말로 인문적 사고를 만들어가는 단초가 된다.
* 사진 출처: 디자인 비평집 『이야기와 이야기』중, 김혜림의 「태초의 디자인 」에서

화려하고 멋진 디자인을 바라보고, 소비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을 무작정 포장하게 만드는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을 소비하는 주체에 대해 연구하고, 그들이 환경을 꾸미는 주체가 되게 하고 자신의 일상의 창조자가 되게끔 삶과 동행하는 것이, 문사철로서의 디자인이다. 이는 디자인과 삶의 상관성에 대한 생각부터가 바뀌어야 하고, 일상에 대한 천착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이는 포에시스에 의존한 기예적 환경을 제시하는 디자인과는 비교가 안 되고, 하늘의 무늬, 땅의 무늬까지 살핀다는 조심스러운 디자인관, 천지인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다. 이는 개별적 삶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창조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이야기가 주체적으로 환경을 이루는 역할을 하도록, 그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성이 발휘되는 디자인이다.

너무 도덕적이고 계몽적으로 들리는가? 아니다. 근간 자주 듣는 상생(相生)이라는 단어를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본다면, 모든 존재가 소통과 그 소통이 주는 생명성을 지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삶의 소통을 위해 자신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디자인 개념으로 쉽게 다가올 수 있다.

 

천 개의 다양함을 지닌 기준

한국에서는 현재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가 주체가 되어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하는 디자인 정치가 한창이다. 돌이켜 보면, 겨우 한 세기 전만 해도 정치가는 스스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집을 지은 문사철의 대가들만이 모인 집단이었고 그 문사철의 세계관으로 직접 인공물을 축조했다. 정약용은 다산 초당을 이황은 도산서당을 설계했으며 양산보는 소쇄원을 지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공통의 세계, 즉 도라고 하는 것이 있었기에 그것을 해석하여 삶의 양식을 만들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진 현대에서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디자인 정책가들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정책이 진정성을 갖고 디자인으로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한마디로 ‘구체적 일상의 이야기’에 천착해야 한다. 새로운 테크닉으로 스펙터클한 것들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떠들썩하고 환상적인 소식을 전하는 것은 정부의 디자인 정책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런 디자인은 기업체들이 사활을 걸고 진행 중인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빅 이벤트를 만들어 시선을 끌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인데 그들보다 그것을 잘할 집단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정부까지 시민의 세금으로 그런 디자인에 정책의 모든 것을 거니, 광화문 광장이건 디자인 올림픽이건 시민들에게 순수한 호응을 못 받는 어정쩡한 것이 되어 버리고, 론리 플래닛이 서울을 영혼 없는 도시로 폄하하며 세계에서 가장 방문하기 싫은 도시 중 3번째로 꼽는 답답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문적 디자인은 천 개의 기억과 이야기가 있는 곳에 들어가 그것을 밀어내고 내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피어난 디자인의 모습을 존중하고, 그것들이 더욱 싱싱하게 피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디자인을 지향하여,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 사진 출처 : 디자인 비평집 『이야기와 이야기』 중, 조혜영의 한국의 그린 디자인 텃밭에서

이제는 지나온 기억과 낡은 것들이 성운처럼 포개져 있는, 개인들에게는 너무 소중한 천 개의 이야기들에 대한 섬세한 듣기와 보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살피고, 가꾸고, 보존하면서 희망의 미래로 가겠다는 모성적 세계관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천 개의 다양함으로 피어나지만 천문과 지문이 그렇듯 생명과 소통이라는 기본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장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고 했다. 생선살 하나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 잘 굽는 자세, 그것이 모성적 세계관이고 문사철로서의 디자인이다. 성급하고 바쁘게, 남이 하는 대로, 가시적이고, 화려하게가 아닌 성찰적 시선으로 일상문화를 보고 삶의 결에 대해 존중을 지닌 디자인 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펼 수 있게 디자인분야의 인식이 바뀌어야만 경제소득 세계 13위의 국민이 원하는 디자인이 펼쳐질 것이다.

출처 designflux.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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