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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제외하라: 예술계를 취소하려는 예술가들을 돕기, 찰스 에셔

2010-11-23  

이 글은 찰스 에셔(Charles Esche: 반 아베 미술관 Van Abbemuseum 디렉터)의 Include Me Out: Helping Artists to Undo the Art World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원문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이어서 곳곳에 불완전한 문장들과 불명확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글이 갖는 논지의 중요성은 유효하다고 판단해 있는 그대로를 번역했다. 저자가 후에 퇴고를 위해 이탤릭체로 남겨둔 것으로 판단되는 문장들은 한글 문장에서 그대로 다룰 경우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서 본문에서는 별도의 표기를 하지 않았다. 원문에는 단락구분이 없지만 문단에 따른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임의로 단락구분을 했다.



서론

예술교육에는 다양한 역설들이 존재한다. 이는 가르칠 수 없거나 혹은 배울 수 없는 다양한 기준들에 의해 구성되는 논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미술, 즉 계몽사상으로부터 상속되어 온 우리가 살고 있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이 범주는, 그들 스스로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지는 모든 작업들에 대한 정의들을 재창조할 수 있는 제작자들을 필요로 한다. 현대미술은 자신의 생산물들을 통해 그 스스로를 취소하도록 요구되었고, 그런 다음 이전과는 다르게 통합한다—여기서 미적 순환의 논리는 여전이 그것의 끝없는 만족의 일부분이다. 비테프스크(Vitebsk)에 있는 예술그룹 유노비스(Unovis)를 위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교육용 도해를 생각해 보자 그리면 당신은 그 뜻을 파악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여기에는 언제나 학제적인 것과 그에 따른 학습을 요구해 왔던 기술과 기능공의 측면들이 존재해 왔다. 동시대 미술이 시작됐을 196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 비록 사회적 혹은 정치적 변화를 위한 요구들과 특정한 기술들 양쪽 모두로부터 크게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은 대규모의 개혁을 위해 이러한 욕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간 그것의 수사학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동시대 미술은 또한 유럽과 북미 예술가들에게만 예외적으로 경의를 표했을 법한 하나의 규범을 만들었다. 심지어 1989년 거대한 정치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변화들 이후에도, 동시대 미술은 자신의 서구적 전통에 의지하면서 지속되어 왔다. 비록 이러한 전환이 대부분의 아카데미 교육과정에서는 결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공예 제작에서의 숙련도는 이미 습득된 사회성과 사회적 행동에 대한 특정한 규범들의 이해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예술, 즉 특정 교수의 지도 아래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의 작업이 흔히 그의 작업과 유사한 결과를 보일지라도, 동시대 미술을 교육하는 것의 논리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했던 실천들과 길들여진 반응들에 의한 선입견 등을 버리도록 하면서 새로운 것과 개인적인 것을 찾아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짧게 말하면, 예술 아카데미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상반되는 목적들과 이상적인 목표들을 계속 주시한다는 가정 하에 유일하게 조정될 수 있는 역설이다.

내가 예술 아카데미들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그들 내부에서 내가 일했던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각각은 그것만의 궤적을 가지면서, 많은 일들은 위에서 언급된 시간적인 도해를 따라 보다 초기의 단계들에서 멈추었다. 몇몇은 아직도 소묘나 모사와 같은 19세기 전형들에 고착되어 있고, 반면 다른 이들은 여전히 1960년대의 자유로운 표현의 유산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가지는 공통점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학교 바깥으로 나가 예술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많은 교수들로 인한 실망의 정도가 높다는 것이다. 사실상, 학생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마주칠 수 없는 그들, 즉 누군가 자신의 이력을 완전히 새롭게 기재하는 것 없이는 예술가로서의 경력과 선생으로서의 이력을 결합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는 종종 교육 시스템에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것에 실패한 성공적인 예술가들의 역설을 관찰할 수 있지만, 반면 그 시스템은 그들의 지속적인 입지를 위한 정당화로서 그들을 요구한다. 1989년 이래로 고등교육이 점차적으로 직업상의 그리고 결과에 강제적이 되면서 학생들은 또한 자주 혼란스러워 하거나 흥미를 잃어버린다. 물론, 몇몇의 아카데미들은 이러한 함정에 대한 최악의 확대 재생산을 피하면서 훌륭한 체험을 제공하지만, 사회과학 또는 다른 인문대학 수준의 연구 단위들과 비교해 보면, 예술에서의 학술적 교환의 실정은 낮다. 마찬가지로 1989년 이래 경제적 성장에 수반하면서 세계화된 동시대 미술의 생산은 주로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틈새시장을 이용한 마케팅과 더욱 유사하다. 중심이 되는 예술가들과 법인조직과 같은 행정부들의 국제적인 순회는 정기적으로 같이 진행된다. 만약 새로운 종류의 아카데미 구조가 가까운 미래에 출현할 예정이라면, 가르치는 과정과 그에 따른 학생들의 예술적 생산에 미치는 사후의 영향 사이에서 창조되고 교환되는 아카데미의 지식에 대한 문제는 하나의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학제로서 감춰지도록 밀어둘 것이 아니라, 예술 안에서 명백하고 거리낌 없이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이 어쩌면 비현실적일지도 모를 21세기에 적합한 아카데미 생산의 과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범위들에 대한 정식화를 시도할 수는 없지만, 어디에 아카데미의 갱신을 위한 잠재성이 있을 수 있는지 식별해 낼 수 있을 나의 개인적인 활동들로부터 몇 가지 특정한 역사적 사례들과 증거들에 대해 고찰할 수는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규모의 창안이기보다는 재교육에 대한 갱신과 관련된 어떠한 형태들이다. 우리가 운영해야 하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변화된 지형에 있어서 19세기 혹은 20세기 모델 그 어느 것으로부터의 지속되는 상태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거나 그리고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를 아카데미의 종류가 무엇이건 간에­­—적어도 우리가 반복되는 실수를 피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200년이 넘는 예술교육으로부터 가장 유용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그것은 과거 이와 동일했던 제도들에 대한 특정한 독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에 아카데미나 예술학교가 어떻게든 역설들을 조정할 새로운 방법들을 생산하고 어떻게 예술가가 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급진적인 방법론들을 창출해 냄과 더불어 새로운 모델과 기금 제공의 방법들을 개발해 낼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나의 개인적인 질문은 나에게 위임된 현재의 관점들을 원조할 수 있는 방법들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과정들을 구체화하는가이다. 요약하면, 그것들은 예술이 갖는 사회와의 관계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사유의 비판적인 방법, 교리들과 주어진 진실들을 향한 회의주의,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과 타자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개방성, 1989년 우리의 세대가 역사의 종언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강도 높은 의식, 그리고 해방과 정의는 현장에서의 사실들이 아닌 실현될 이상적 목표들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견들이지만, 만약 이러한 당면 과제가 가장 최근에 시장의 유행에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동시대 미술과의 교육적 만남의 핵심에 그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프로그램의 실제적 개발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쟁점들은 일어날 변화들과 어떻게 제도기관이 실행을 보증할 작동방식을 수립할 수 있는지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거나 관리할 수 있는 과정에 관여된 모든 참여자들—학생들, 젊은 예술가들, 스승들, 모든 영역의 아카데미 노동자들—에 대한 확장이다.

현대미술은 다소 보호된 틀 안에 남아 있다. 그것은 심지어 전지구적 협력기구와 국가적 통치가 우리에게 “달리 사고하라”고 부추기는 몇몇의 영역들 중 하나이다. 예술에 대한 생각이 관리, 감독되고, 적합하게 전달되도록 통제하고 감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간이 흔히 자유방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훈육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버려진 혁명적 희망을 위해 우리의 몇몇 공공기관들을 양도하는 사회적 상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적 과정 안에서 우리의 유쾌한 교도관들의 말을 믿으면서, 감시하거나 감금하는 제도들을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지금 이 순간에 예술을 장려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유효함의 여지가 거둘 수 있는 모든 이점을 취해야 한다.

 

부분적인 역사

나의 현재, 다소 순회하는 삶의 방식은 나에게 다양한 예술 아카데미들을 바라보게 하는 특권을 부여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항상 내 스스로가 예술학교의 특정한 한 측면에 매료되고 있음을 발견한다—하나의 공식적인 구조 또는 그들 스스로를 조직해 왔거나 혹은 개별적인 교사들 내지는 기회의 주변에 모여드는 학생들의 집단. 이러한 경험을 유념하자면, 거의 모든 예술적 상황은 이미 정해진 어떤 것이나 행해야 하는 무엇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 흥미롭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의 발생을 위한 잠재적인 것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장소에서 예술을 연구하는 수많은 체험학습의 단순한 합의점은 도전이라는 필요성을 단념한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재정상의 현명한 직업적 선택이라는 미술시장의 조건들 아래 남아 있는 하나의 사실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예술학교들은 지금까지 물려받은 조건들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해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예술에서 미숙한 비-순응적 개인들의 새로운 참여가 하나의 가능성을 남긴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카데미들의 개발을 위한 그들의 책임에 부담을 덜고 존재하는 구조들 안에서 작동할 수 있으며 그리고 항상 존재하는 기금에 대한 관료적 절차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가장 적은 저항의 경로들을 따를 수 있음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이는 제도를 위한 매우 매력적인 모델이 될 것이고, 최소한 어느 정도는 진실과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흔히 학생들이 학교 커리큘럼의 가장 생산적인 측면이 될 수 있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일들이 가지는 가능성들이다. 몇 가지 점들에서 그리고 몇몇의 개인들을 위해서, 언급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곧 거부는 행동에 가장 제안적이며 강력한 자극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아카데미 예술학교”의 구성에 용기를 북돋아 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어떤 생각에 있어서, 명확히 말해서, 우리는 조직의 구성체 중 대안들을 위한 저항과 그러한 탐색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것이 불완전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술 아카데미에 있어서 어떤 나태함으로 비춰질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나의 솔직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앞서 위에서 명시했던 배움의 조건들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흥미로운 상황들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것을 제대로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의식적이고 그것의 참여자들에 민감하며 그리고 자기 소멸의 미덕을 기꺼이 고려하는 아카데미는 아무리 그것들을 기술하려 할지라도, 지배적이고, 반복적이며 그것의 미래를 위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그것의 총체적인 목적들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다.



더욱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아카데미가 행하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창조성은 정말로 어떠한 맥락에서도 출현할 수 있지만, 우리는 유럽과 북미에서 우리의 예술적 유산의 갱신에 있어서 중추적인 아카데미들이 있었던 것을 보기 위해, 단지 예술학교의 역사 안에서 특정한 순간들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비트페스크에 있는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예술그룹 유노비스와 모스크바에 있는 미술문화연구소(INKhUK: the Institute of Artistic Culture), 바이마르(Weimar)의 바우하우스(Bauhaus), 할리팩스(Halifax)의 노바 스코티아 예술디자인대학(the Nova Scotia College of Art and Design), 1970년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칼아츠(CalArts), 조셉 보이스(Joseph Beuys)와 캐롤라인 티스돌(Caroline Tisdall) 외 여러 사람들의 선도 아래 만들어진 70-80년대의 자유국제대학(the Free International Universities),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런던의 골드스미스(Goldsmiths)와 바르샤바(Warsaw)의 순수예술 아카데미(the Academy of Fine Arts)에 있는 야로슬로우 코즈로브스키(Jaroslaw Kozlowski)의 수업. 이러한 장소들의 모두에서, 학생들의 에너지, 교직원들의 참여와 용기, 그리고 광대하게 모든 정당들에 도움을 주었던 예술과 그것의 교육과 함께 노동하는 새로운 방법을 정의했던 외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환경들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계획에 따른 방법 안에서 단순하게 그것들을 제도화하기 위한 유사한 구조들이 효과적으로 개발된 어떠한 표본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은 특정한 이상들을 공유했던 그리고 지적이고 정치적인 정세에 의한 영향관계 속으로 그들을 집어넣도록 허락된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서 야기됐다(또는 단순히 진척되는 것이 멈추지 않도록 하였다). 사실, 예술-학교 역사 안에서의 이러한 “훌륭한 순간”들의 많은 것들은 또한 외적인 도전들과 갱신을 필요로 했거나 혹은 내적 또는 정치적 압력들 아래에서 내파하기 전에 단지 몇 해만을 지속했을 뿐이다. 이러한 개발의 패턴은 아마도 우리가 어떠한 새로운 프로젝트들 혹은 가까운 미래에 충족시킬지 모르는 교수법적인 생각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다양한 역사적 아카데미들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러한 새로운 세기에 동시대 미술과 예술학교를 위해 중요할 수 있는 구조적이며 교수법적인 쟁점들에 대한 현재의 합의점이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찾기를 원했다. 여기 나의 글쓰기에 뒷받침되어 온 연구의 많은 부분은 내가 90년대 후반, 즉 (좀 더 이후에) 에든버러 예술대학에서 내가 프로토아카데미(protoacademy) 프로젝트의 시기에 했던 작업에 기반을 둔다. 1960년대 후반부터 대부분 예술가들에 의해 쓰인 다른 텍스트들과 함께, 내가 이미 앞서 언급했던, 그들 학교의 구조들과 철학들과는 거의 상관없이—현재의 교육적 근본들에 대한 동의의 관심도를 공유하는 다양한 진보적 예술 프로그램들의 발견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 나는 현재 이미 존재하는 가정들에 시간을 가로지르는 대부분의 합의적인 대립처럼 보이는 것을 정의하는 세 가지 항목들 아래에서 이러한 것들을 모으려 시도해 왔다: 반-전문화, 반-고립/반-자율성, 그리고 반-위계.

이 중 첫 번째는 예술가들이 전문가들로 비쳐지거나 전문성의 특정한 영역들에 의해 정의되는 행위들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과학적인 모델들이든 평가의 경제적인 규범이든 둘 중 어느 것에 의해 예술교육에 슬쩍 끼워 넣어진 전문화의 철학에 저항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1919년에 바우하우스를 위한 그의 전망을 표명하는 독자적인 소책자/선언문을 썼을 때, 그는 상이한 예술의 학제들, 수공예들, 그리고 수동식 기술들을 통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로서 “완전한 건물”을 보았다. 반면 보이스는 1982년 그의 자유국제대학을 위한 창립 성명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문가들의 고립된 관점은 예술들과 다른 종류의 작업들을 첨예한 대립에 위치시키지만, 다양한 작업 과정들의 구조적, 형식적, 그리고 주제적인 문제들이 다른 것과 지속적으로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더 나아가, 그는 “실질적인 상대적 방법론 없이, 전문가들의 훈련을 위한 학제들의 분할은 단지 전문가들만이 정치, 경제, 법 구성 등과 같은 이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들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증대시킨다.”라고 논쟁했다. 최근 칼아츠의 학교 안내서는 전형적으로 보다 실용적이며 공리적인 방식 안에서 이러한 확신에 주의를 기울인다: “전 교수진은 예술 생산의 전통적인 범주들에 오랫동안 질문을 해왔고, 다양한 학제들을 서로 교차시키는 접근을 장려한다. 이는 화가들이 사진가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거나 비디오 작가가 디자이너와 함께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칼아츠 전체에 걸쳐 있는 유효한 자원들을 이용하면서, 조각가가 음악가들과, 퍼포먼스 예술가가 영화 작가와, 혹은 사진가가 글을 쓰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작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교 자원들의 모든 것은 모든 학생들에 개방되어 있고 사용이 가능하며 또한 역설적으로, 경계들, 가정들, 그리고 목적들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야기하는 제도화된 마찰과 같은 것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생각들은 예술교육이 전체 인간에 향해 있어야 하며, 아카데미, 대학 혹은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예술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이 전문화의 무지한 영역을 상호 간에 결합시키는 것과 교차시키는 것을 통합하는 행위 주체에 있음을 연계하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합의의 두 번째 지점은 “커뮤니티”(모호한 단어) 또는 현재의 산업적 혹은 지적 환경들 어느 것이든, 특정한 비-예술의 지지자들과 내가 “반-고립” 또는 아마도 좀 더 신랄하게는 “반-자율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개방된 대화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테프스크에서, 예술그룹 유노비스(UNOVIS)는 10월 혁명의 3주년 기념식을 위해 말레비치에 의한 절대주의 디자인(Suprematist designs),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초기 구성주의(proto-Constructivist) 현수막들과 옥외 광고들,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샤갈주의자들(Chagallian)의 이미지들을 포함하는 도시 장식들을 기획했다. 이러한 장식들은 단독적인 저자의 목소리 없이 항상 집단적으로 생산되었고 그들이 혁명적 의식을 증대시켰는지 혹은 그들이 비-재현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거부했었는지 간에, 예술가들은 어떻게 비테프스크의 노동 계급이 그들의 작업들을 이해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이후의 새로운 발단들은 다른 아카데미의 학제들, 사회적 교류, 그리고 직접적인 커뮤니티와의 접촉을 위한 필요성을 더욱 더 강조했다. 예를 들어, 카스퍼 쾨니히(Kasper Konig)는 1970년대에 노바 스코티아 예술디자인대학에서 발행된 출판물들의 이례적으로 풍부한 시리즈를 맡았었다—당대 최고의 작가들을 캐나다의 비교적 고립된 한 장소로 유인했던 프로그램. 1975년에는 (기금 부족을 극복한 적이 없는) 더블린(Dublin)의 자유국제대학(FIU) 설립 제안을 위해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의 전신을 응용하면서, 캐롤라인 티스돌에 의해 쓰인 자유국제대학을 위한 놀라운 관료적 기록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현재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목적에 대한 가장 명확한 보고서이다. 그녀는 프로젝트에 대한 포부와 전통적인 대학들과의 변별점을 기술했다. 이는 “문화적이며 지식적 삶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기여”; 교육의 정부 관료주의로부터 그것의 완전한 독립; 대중을 향한 투명성; 연령 제한으로부터의 자유; “(표준화된 견해에 대한 강요 없는) 대화를 위한 토대로서”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의견 교환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배움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간주하는 그것의 의도”를 탐구하는 목표를 향한 학제들 간의 상호 발전을 포함한다.

미국에서는 앨런 카프로(Allan Kaprow)가 이미 1971년 2월 아트뉴스(ARTnews)에 실린 에세이 “비-예술가의 교육, 제 1 부(The Education of the Un-artist, Part 1)”를 통해 예술과 사회의 더욱 급진적인 뒤섞음을 제안했었다. 그는 그가 언급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의 병적 상태를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질 낮은 코미디와 같이 상황을 보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조소의 대상을 향한 첫 번째의 실천적인 단계로 우리 스스로가 예술을 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미학적 역할들을 피하는 것, 어떠한 종류건 간에 예술가가 되는 것의 모든 참조점들을 포기하는 것 등을 제안하려 한다. 비-예술가는 현대화하는 과정 안에서 직업을 바꾸는 것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술들이 관례적으로 모이는 곳으로부터 교묘히 떨어져 있는 비-예술가의 작동 전체를 전환하는 것은 매우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광고 기획자, 생태학자, 오토바이 곡예사, 정치가, 해변의 룸펜 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역량들 안에서, 논의된 예술의 다양한 종류는 행위의 특정한 경로를 프로그래밍하는 것 대신에, 예술을 넘어서는 모든 전문화하는 활동들을 향한 의도적인 놀이의 태도를 유용하게 할 축적된 신호로서 간접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카프로는 예술을 취소하려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일생에 걸친 그의 교육에 대한 참여는 취소하기라는 관념이 어떤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의 재구성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예술이 생생하고 의의가 있도록 지속하는 방법으로써 그것을 세상으로부터 끌어내고 되돌리는 파괴적인 존재인 만큼 통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 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아카데미 모델들을 위한 합의의 세 번째 지점은 예술가-교사와 예술가-학생 사이의 위계들을 수평화하거나 근절시키려는 욕망이다. 자유국제대학은 “대학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한 모델로서 기능해야 하는 이상, 지도자 없이 모든 주요한 정책이 학생-교직원의 토론을 통해 결정되는 곳에서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위해 어느 정도는 그것에 대한 요청과 함께 이러한 모델에 착수했다. 바르샤바의 순수예술 아카데미 역시 직접적인 교육적 환경 안에서 수행하고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학생들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따랐다. 이러한 토대로부터, 아르투로 쯔미제브스키(Artur Żmijewski) 그리고 파벨 알타메르(Pavel Althamer)와 같은 예술가들은 사회 자체를 하나의 재료로 유용하게 하면서, 사회적 스튜디오와 유사한 급진적으로 새로운 참여적 실전들을 발전시켜 올 수 있었다.

 

프로토아카데미

언제나 자기-역사화 안에는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나는 얼마간 프로토아카데미의 실험에 대한 글쓰기를 다른 이들에게 남겨두는 편이 더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저했었다. 그러나 4년의 프로젝트였던 것이 이제는 6년의 세월이 흘렀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나는 그것의 몇몇 제안들과 진술들을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토아카데미는 1998년 아주 단순한 메타포와 함께 에든버러에서 시작됐다: 텅 빈 테이블 혹은 백지 상태의 생각. 교사이건 혹은 학생이건, 밖에서 온 그 누구이건 간에 그 테이블에 왔던 사람들은 프로토아카데미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테이블에 가져온 정보, 지식, 생각들, 질문들, 혹은 조우하는 것에 의해 그룹의 부분이 될 수 있는 그들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2002년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우리는 해를 거듭하면서 출현했던 과정과 역설들을 요약하는 수많은 방법들 안에서 짧은 집단적 텍스트를 생산했다. 그것은 각각의 글의 형식이 스스로의 지속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복수적인 텍스트로 읽혀져야 한다.

 

프로토아카데미, 프로토타입, 프로토텍스트

프로토아카데미는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각한다. 깃발이 드높게 드리워진 에든버러의 로열 마일(Royal Mile: 에든버러에 있는 옛 시가지의 거리. 예전에는 일반인이 밟지 못하던 왕가의 전용도로)에서는 벗어났지만, 소녀들은 성명서들을 쓰지 않는다—러시아의 미래파 발렌티나(Valentina)를 제외하고—그녀의 이름은 무엇인가…솔즈베리 언덕길의 그림자와 스코틀랜드의 의회, 이는 이전의 사회보장에 속한다.

우리는 단지 기록해야 하고 텍스트를 통해서 그것을 운영해야 한다—사실 우리는 미니디스크를 가져야 하고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위어스랜드(Weirsland: 에든버러에 있었던 임시적인 갤러리 공간의 이름)라고 불리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동식 공간.

프로토아카데미는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의 부분이 아니다. 이러한 격리된 실업수당 사무실, 진정?…예, 우리는 그러한 계보를 좋아한다—그리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이 목가적인 것의 참조점이었는가? 글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프로토아카데미의 이러한 신화적인 이해와 관계된 것이다…어떤 지점, 점잖은 목자들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선물들이나 고양된 사유를 교환하기 위해 모여든다.…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노동과 사유를 교환하는 우리들 자신이다—그리고 말모(Malmo),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서울(Seoul), 트론헤임(Trondheim), 베를린(Berlin), 런던(London)의 사람들. 그리고 그것은 작동한다—마치 오월에 말모 쇼를 말하듯이…그러나 커뮤니티는 비용 부담을 증가시킨다.

프로토아카데미는 그것의 역사가 아니다. 위어스랜드의 시설들은 24시간 다양한 이용을 포함시킨다. 역사적인 분수대와 함께 잘 조경된 정원, 그리고 바가 있는 옥상의 테라스.

프로토아카데미는 관료주의를 소비하고 커뮤니티를 생산한다. 주차는 무료이다.

프로토아카데미는 하나의 연구가 아니다.…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대학이 이끌어 낼 수 있는 평가의 실천으로부터 누군가가 행하는 페미니스트 이론 안에서 하나의 강좌를 다룰 수도 있다. (이러한 초대된 공간에의 기여). 그것은 그리셀다 폴락(Griselda Pollack: 영국의 미술사가)과 같은 누군가가, 혹은 관리나 지도에 따라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다루려 하는 것이, 성공 혹은 실패의 어떤 관례적인 기준들처럼 들린다. 건물 내부는 짐 람비(Jim Lambie)의 마루를 포함한다, 채광창.

로열 마일에서 벗어나 올드 맨 바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에 약간의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파일 시스템과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의 구내식당.

프로토아카데미, 예, 우리가 쇠약해져 가는 예술대학들에게 프로토아카데미의 서비스를 빌려주기 위해 이 공간을 이용하면 어떨는지? 무수히 많은 연구의 지점들을 발생시켜라. 이것들은 현재 제도를 위해서 유효하다. 이 ‘백지 상태’의 것은 어떠한가? 이 일을 정리해 버리자. 이는 무슨 의미인가? 빈 서판. 텅 빈 페이지. 밀회.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와 필 니블록(Phil Niblock)에 의한 폐기물 처리와 보안 시스템. 왜 이는 마치 ‘테이블’처럼 들리는가? 아니다, 이는 그것을 입증하기를 원하는 어떠한 것이나 어떠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프로토아카데미와 관련된 것이다.

프로토아카데미는 안마시술소 또는 대학 졸업 후의 양육시설과 같은 컬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5개의 빈 페이지가 삽입된 메트로놈(Metronome: 클레멘타인 델리스Clementine Deliss에 의해 만들어진 협업 형태의 독립 출판물의 이름)의 출판물과 같은 것에 당신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 뭐 그런 것…확언적인 진술들 또는 부인들에 의해 한계지어진.

프로토아카데미의 구조. 여기서 우리는 ‘사용가치’를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확실히 두 개의 개념들 사이에 사용가치가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 구성원들의 활동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환영하고 격려한다…확언과 부인. 그 내부에는 많은 자가당착이 존재한다. 더욱 더 많은 모순들이 있어야 한다. 예술적인 실천과 연구의 간헐적인 행위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 경합하는 몇 가지, 다른 구성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게 될 수 있다. 프로토아카데미의 힘은 번창하는 존재의 투쟁적인 종류를 허용하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균형 상태를 생산했지만, 원래 참여자들의 대다수가 옮겨갔던, 2002년 대학에 의한 기금 조성이 끊어질 때까지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어떠한 점에서, 프로토아카데미는 몇몇의 사람들을 생산에 기초한 시스템의 우선권들에 대한 각성으로 이끌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아마도 개인적인 예술 실천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강한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는 집단적인 행동들과 공동체적인 이해에 있어서 공동으로 책임을 졌던 것이 있었으나, 그러한 결과는 예상된 것이며 오히려 높이 평가된다. 마치 모든 사건들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프로토아카데미와 같은 프로젝트는 짧은 수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참여자들이 이미 존재하는 예술계에서 주요한 경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논의를 발생시키고 형식적인 관리 없이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의 구성원들로부터의 막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그러한 원조와 필연적인 관료제도는 장기적으로 보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 걸친 비엔날레와 아카데미들에 기여해 오고, 에든버러 대학에 의미 있는 영역으로서 비평적 이론을 수립했던 리딩 그룹을 조직해 오면서, 그것은 어떠한 시간도 들이지 않고 아무런 지불도 없이 관리자 스스로를 상당히 아주 잘 관리했다. 그것의 보다 장기적인 효과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대학에서 그것의 지성적 공간에 한 부분을 차지했던 클레멘타인 델리스(Clementine Deliss)의 이후 미래 아카데미 프로젝트와 같은 독립적인 주도권에 참여했고 아마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를 개인들에게서 보일 것이다.

 

다음 실험을 위한 청사진들

프로토아카데미는 그것의 시간과 장소였다. 그것은 당시 에든버러의 특정한 현실들에 반응했다—국제적 관계의 결핍, 이론의 부재, 그리고 예술의 보다 넓은 정의의 필요성과 이와 관련된 학생들의 활동들. 이러한 쟁점들이 에든버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형식들로 표현되었다. 두 번째 프로토아카데미의 개시는 그것이 갖는 환경을 위해 다르게 구성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전문화, 반-자율성, 그리고 반-위계의 부정적인 정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지나갔던 것들에 대한 거부와 이미 주어진 순간에 예술을 위치시키는 조정들을 취소하려는 욕망이 지금의 예술학교를 위한 어떠한 제안적인 계획에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집단적인 대리인을 통해서, 어떻게 협력하지 않는가에 대한 배움은 예술계의 우선적인 것들의 재구조화를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예를 들면, 미술시장에 대한 명시적인 거부와 대상의 생산 없이 사유를 생산하는 시도는 동시대의 현상 유지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한 움직임은 또한 지식 생산 주변의 지난 10년에 걸쳐 행해졌던 연구를 소환할 것이고 예술적 작업들과 대학들에서의 실험적인 결과들의 취득 혹은 증여 사이의 관계를 재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한 결과물을 전달하는 아카데미의 시장에 대한 도전이 관찰하기에는 매혹적일지라도, 이러한 구성은 아마도 보조금이 지급된 유럽인들 시스템의 양상에서만 예상될 수 있다. 최소한, 그것은 갤러리 소유주들에게 다시 한 번 창조적이게 되고 어떻게 그러한 작업들을 상품화하는지를 생각해 내면서 그들의 콜렉터와의 계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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