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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의 권리 Rights of Passage

2011-08-31  

마크 고드프리(Mark Godfrey), T J 디모스(TJ Demos), 이얄 바이즈만(Eyal Weizman), 아예샤 하미드(Ayesha Hameed)

 

마크 고드프리(Mark Godfrey), T J 디모스(TJ Demos), 이얄 바이즈만(Eyal Weizman), 아예샤 하미드(Ayesha Hameed)는 이 좌담에서 국경과 이주의 문제를 다루는 다섯 명의 동시대 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좌담에 참여한 논자들이 언급하는 작가들의 프로젝트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이나, 전지구적 정치 경제 시스템 속의 ‘헐벗은 삶’이라는 관점에서 직간접적인 연결점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이러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작업들은 어떤 측면에서 그 윤리적 태도의 표명을 넘어 시각예술표현의 한 장르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 미술이 끊임없이 동시대적 삶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서 그 경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질문해왔다는 것이다. <통행의 권리(Rights of Passage)>는 이러한 비평적인 태도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의 시각적 재현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나 어떠한 내부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Rights of Passage”는 TATAE ETC.(Issue 19 / Summer 2010)에 처음으로 수록되었으며, 저자, Tate Modern, 번역자와 normal type의 동의 아래 한글로 번역되어 소개된다. 이 글의 원 저작권은 저자와 Tate Modern에 있으며, 한글 번역본의 저작권은 번역자와 normal type에 있다.

 

마크 고드프리(MARK GODFREY): 최근 몇몇 미술작업들은 특히 북아프리카와 유럽 지역에서 야기되는 이주와 국경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이주자들의 가시성 혹은 비가시성,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서 고민하는 작가들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다수의 작업들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TJ 디모스(TJ DEMOS): 이 주제는 지난 10년동안 예술적 연구(investigation)의 중요한 자료가 되어 왔으며, 현재까지도 이와 관련된 관심은 증폭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곧 개최될 마니페스타 [유로피언 비엔날레] 역시 유럽과 북 아프리카를 이슈화시키기 위해서 의도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과 중국의 자유화 이후 몇 년 간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의미화된 예술적 이동성(artistic mobility)의 한 형태로써, 1990년대 노마디즘(nomadism)에 대한 어떤 심취와 몰두로부터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의 점진적인 위기와 신자유의적 자본주의가 기약했던 수많은 약속의 실패 속에서 우리는 모든 곳에서 경계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전지구적 불평등에 대한 가슴 아픈 징후로 여겨져 왔습니다.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수의 작가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규정하고 분할하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경계라는 의미에 집중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헤르만 아셀베르그(Herman Asselberghs)의 영상 작업, (2006) 는 스페인 남부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부터 모로코에 위치한 스페인 자치구인 세우타(Ceuta)까지의 페리 여행을 기록한 영상입니다. 이 작업은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기 위해 시도하는 지리적으로 모호한 유럽 남부 경계선의 가장자리를 추적합니다.

 

마크 고드프리: 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매년 1천명의 이주자들이 익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 장소와 다른 장소 사이의 여정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는 그 결핍을 아셀베르그가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업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계화가 초래한 불행과 고통을 폭로하는 노골적인 매스컴의 끊임없는 유포로 인해, 당신은 [세우타로의 여행에서] 이 죽음의 지역에 관해 진정으로 기억할 만한 이미지들은 놀라운 결핍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주자들을 화면에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가능한 오프 스크린(off screen)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위협적인 존재로써 드러내기 위한 방침(policy)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보이는 것(가시성)과 보이지 않는 것(비가시성)의 역학관계에 관한 그의 탐구는 흥미롭습니다. 세우타 주변의 이미지들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대하여 그는 이후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비디오 카메라, 자기장, 진동 그리고 적외선 감지기 등의 장비와 함께 도시의 변두리를 따라 쳐진 울타리는 위성장치와 연결되어있어 멀리 떨어진 중앙 사령부에서도 따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촬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전에 언급했던 그의 견해를 다시 논의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이들을 언제나 화면에 보이도록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비가시적인 상태가 되게끔 하는 방침(policy)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Stills from Herman Asselbergh's Capsular (2006)
Courtesy Auguste Orts, Brussels ⓒ Herman Asselberghs

 

TJ 디모스: 그렇습니다. 그의 관심은 출현의 정치학(the politics of appearance)에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이주자들을 대부분 비가시적인 상태로 그려내는 지형학을 추적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이라는 장소로 들어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주자들은 시각적으로 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주자들을 보여주지 않는) 그의 영상은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비가시성의 상태를 반복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는 이러한 체계, 적어도 유럽 중심적 사고에 기인한 이 체계를 “캡슐의/캡슐에 든(capsular)” 삶, 온실처럼 밀폐되고 봉합된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비교합니다. (그의 영상작업 제목은 벨기에의 철학자 리에벤 드 쿠터(Lieven De Cauter )의 책, 에서 차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작업의 전제는 유럽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그들을 비가시화 함으로써, 우리들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는 그러한 온실을 산산조각내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마크 고드프리: 아셀베르그의 영상작업은 브뤼셀에서 끝나고, 그 도시 내 이주민들의 삶을 다루지요. 그렇지만, 나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횡단을 주목하는 수많은 다른 작가들, 그들은 브뤼셀, 베를린, 파리나 런던 등에 근거를 두지만,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 속 자신들 주변 이주자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횡단이 야기되는 그 장소들로만 자신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러한 장소에서만 이주자들의 몸부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그들은 여전히 경계를 단일의 공간 혹은 지도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선으로 다루게 됩니다.

 

아예샤 하미드(AYESHA HAMEED):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이주의 속편(afterlife)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당신의 지적은 그 여정의 일부가 어디까지 가시적인 것으로 혹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그려지는가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이주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를 때, 미술 담론은 정체성의 정치학과 문화적으로 특수한 쇼의 형태로 변화됩니다. 그럼으로써 대화는 어떤 시점에서 그들의 여정을 가시적인 상태로 만드는 이러한 위기의 가변적이거나 유동적인 지역들과 대조적으로 다문화성(multiculturality)이라는 고정된 위치에 더욱 집중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주의 속편에서 가시성의 체제로써 경계들을 이야기할 때, 이주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그 경계들은 반드시 가시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경계를 넘을 수 없는 자들에게 경계는 더욱 가시적이듯, 도시 내에서 작동되는 경계들 자체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고 있습니다. 또한 경계들은 다문화 지역이라는 이러한 클러스터 주변에서, 국민국가적 기원 혹은 인종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전시를 기획하는 조직이나 미술계 안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마크 고드프리: 이얄, 당신의 연구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경계가 갖는 공간적인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경계를 하나의 선 혹은 단일공간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현재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Stills from Florian Schneider's Ceuta (2006)
Courtesy the artist ⓒ Florian Schneider

 

이얄 바이즈만(EYAL WEIZMAN): 분리(separation)의 논리는 탈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경계들은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인 상상력에 의한 선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라기 보다는, 도시들 내부에서, 주변지역들 사이에서 “깊은 공간(deep space)” 으로부터 쪼개지고 부서져 나온 파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계와 차별(segregation) 장치로 나눠진 공간은 극심히 통제되고 강도 높게 필터링되는 이동 및 통신 수단의 네트워크와 더불어 짜여지게 됩니다. 검문소와 경계들은 국가, 기관, 기업의 자주권이 그 경계들을 넘나드는 움직임들을 봉쇄하고, 걸러내고, 규제하는 자신의 능력 안에서 행사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업이나 신원 승인이 보장된 “인터내셔널들”은 대부분 국경을 빠르게 넘나들 수 있지만, 적절한 서류를 갖고 있지 않는 반갑지 않은 “외국인들”은 제지되고, 지체되고, 종종 대부분의 문턱에서 물리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구금된다는 점에서 분리의 국제 정치학(global politics)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건축은 안보라는 불안한 전지구적 체제 아래 이주민들의 흐름을 규제하는 밸브로서 작동하게 되죠. 게다가 정부의 위치도 접속점들(transport nodes)과 네트워크에 따라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대체로 정부의 역할은 그러한 “이동성의 체제(mobility regime)”를 조절하는 밸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경계선과 매우 유사하게, (공항에서) 국가의 경계들은 이동을 규제하는 필터로써, 그리고 그 경계들을 넘는 모든 사람과 대상에 대한 정보를 기재하고 저장하는 센서와 아카이브의 결합체인, 미디어 환경(media spheres)으로써 그 기능을 수행하는 문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횡단의 모든 행위 역시, 항상 등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또한 등록의 모든 행위는 아카이빙의 행위이지요. 아랍 에미레이트 경찰에 의해서 발표되었던, 두바이에서 촬영된 이스라엘 암살단의 CCTV 장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관문을 넘는다는 것에 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국경과 경계선을 넘는 모든 움직임들은 기록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공간들은 더 이상 고정되어 있지 않는 듯 합니다; 오히려 그 공간들은 거의 액체처럼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죠. 국민 국가의 군사 정치적 공간성으로부터 상속된 지도상의 가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형적 경계는 임시적이고, 수송 배치 가능하고, 제거가 용이한 경계와 동일한 것으로 분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울타리, 장벽, 봉쇄망, 폐쇄지역, 바리케이트, 검문소, 소독지역, 특별보안영역, 제한군사구역, 살상지대 등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러한 경계들은 역동적이며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주변건물들과 사회공공 기반시설들, 마을과 길가를 따라 서서히 확장되어 갑니다. 그 경계들이 벽을 통해 우리의 거실 안으로 불쑥 들어올 수 있죠. 동시대 공간의 무정부주의적 지형도는 모든 정치적 개발 혹은 결정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고 재배치되는 변화라는 점진적 발전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안보 구조물들은 철수되고 철거될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구조물들이 세워지고 확장되지요. 안보장치의 위치는 매번 다른 방식들로 그 운행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차단하고 조절합니다. 이동통제감시소는 매번 변화하는 작전들에 대한 실행계획을 유지하는 교두보를 만들어 냅니다. 군대는 마을들과 난민 수용소를 급습하고, 점령하고 나서 철수합니다. 분리의 장벽들은 새로운 길로 변경되고, 그 장벽들의 경로는 그것에 따라 발생하는 정치적이고 합법적인 전투를 지진계처럼 기록합니다. 또한 밀폐되어 보이는 듯한 지역들 아래로 터널이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러한 유동적인 영토들이 유익한 환경으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유동적인 공간은 종종 고정되고 견고한 그 어떤 공간 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의 역동적인 형태학은 공중감시 체제 아래에서 외부적으로는 고립되고 내부적으로는 동질적인 인종국가적 거주지라는 증식하는 군도들로 뒤덮인 끝없는 바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영토의 생태계 속에서 다양한 다른 지역들, 정치적 해적 행위, “인도주의” 위기, 야만적 폭력, 완전한 시민권, “불완전한” 시민권, 혹은 전혀 시민권이 없는 상태로 작동되는 그러한 지역들은 서로 인접하거나, 서로의 내부에, 혹은 서로의 위에서 겹치며 존재합니다. 예술이란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 “분리의 고안(design of separation)”이란 것은 또한 시각장 안에서의 개입처럼 여겨지며, 이러한 것은 예술적 다큐멘터리 기술들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플로리안 슈나이더(Florian Schneider)는 이와 관련된 주제의 영화를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는 세우타 국경의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이주자들의 모습이 담긴 5초간의 CCTV 비디오 장면을 선택하고, 이것이 어떻게 주류 대중매체 속에서 작동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가 어떤 편집과정들을 거치고, 재구성되고, 그 과정을 반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죠. CCTV 카메라는 텔레비전에 비해 초당 훨씬 더 느린 속도의 프레임들을 가지기 때문에, 이 영상이 텔레비전 시청용으로 변화되면, 그 영상들은 속도가 빨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영상 속 이주자들은 침입하기 위해 기를 쓰는 개미떼들처럼 보입니다. 미디어 생태학으로써 경계에 관한 슈나이더의 이해는 그가 이미지의 “소스 코드(source code)”를 가지고 작업하길 원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Stills from Ursula Biemann's Sahara Chronicle (2006-2007), multi-screen installation
Courtesy the artist ⓒ Ursula Beimann

 

마크 고드프리: 이주민들의 움직임을 탐험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는 우르술라 비이만(Ursula Biemann)의 <사하라 연대기(Sahara Chronicle)>(2006-2007)가 있습니다. 이 작업은 사하라 지역, 아프리카 인들의 유럽을 향한 이동을 기록한 멀티스크린 설치작업입니다. 아셀베르그가 이주민들이 비가시적인 상태로 남겨진 그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주민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만들어 내지 않는 반면, 비이만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 - 이주민들, 사막을 건너기 위한 길을 연계해주는 투아레그인들, 트럭운전사들 등 - 을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이주를 시도하다 실패한 사람들을 인터뷰했죠. 1970년대부터 “사회정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concerned documentary)” 활동이 갖는 문제들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비판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이만이 이러한 논쟁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는 사회 약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TJ 디모스: 저는 이러한 작업이 사회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진 다큐멘터리의 역사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이만은 이주민들을 카메라 앞에 초대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요청하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상황을 기록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복잡함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관점의 다양성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비이만의 작업은 이미지들의 내재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보다 서로 다른 컨텍스트와 사용을 통해서 그 의미를 구축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지적이고 정교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이와 관련해서, 비이만의 작업은 비디오 작업과 함께 진행되는 학제간 연구조사 활동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류 미디어에서 이주민들은 비가시화된다’는 주장에 맞서 저항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기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기사들은 전형적으로 이주민들의 생활 여건과 그들의 여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묘사합니다. 단순한 인류학적 작용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주의 정치 사회 경제적 원인들을 조사한다는 점에서 비이만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국제 통화 기금과 세계은행과 같은 금융 메커니즘들을 조사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금융 기구가 아프리카 국가들을 파산시키고, 채무국이 되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는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 장악된 천연자원이 매장된 소수 민족 거주지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 그녀는 투아레그(Tuareg)족이 전통적으로 살고 있던 지역에 있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우라늄 광산과 관련하여 니제르(Niger)에서 야기된 투아레그족에 대한 박해를 묘사하거나, 지역 산업을 황폐화시킨 모리타니(Mauritania) 해변에서의 어업면허권에 대한 유럽의 요구를 폭로하기도 합니다. <사하라 연대기(Sahara Chronicle)>에서 비이만의 목표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단절되거나 잊혀지는 대신에,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포용(political inclusivity)과 경제적 정의, 유럽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요구를 스스로 분명히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크 고드프리: 그러나 때때로 비이만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얼마간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해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경제적 평등, 승인, 혹은 정의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는 경제 기회 균등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작가가 이러한 특정 동기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TJ 디모스: 이주민들이 더 나은 생활수준을 갈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점점 더 무장화되는 EU의해서 승인된 국경 경비보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셀베르그의 영상작업에서 보여진 세우타 주변의 신기술로 세워진 울타리 혹은 비이만의 비디오에서 보여진 사하라 사막의 이주경로를 감시하는 리비아의 열 감지 카메라와 같은 것들은 이주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모한 방법을 감행하도록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안이 정답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크 고드프리: 비이만이 <사하라 연대기(Sahara Chronicle)>를 전시장에 설치하는 특별한 방식은 작업자체가 갖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얄 바이즈만: 네, 그렇습니다. 영상작업의 형식, 그것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가와 같은 모든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그 작업을 위해 설정한 영상 집단과 리서치 네트워크를 유념해 두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장면이 작가에 의해서 직접 촬영된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횡단하는 감독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부터 넘어오는 이주민들이 건너야 하는 첫 번째 “바다”인 사하라 연안지역에 서서, 다양한 집단과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이 작업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예샤 하미드: 나는 다채널 구성방식을 차용한 그녀의 작업이 다양성(Multiplicity)이라는 측면에서 집단적 작업을 보완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하라 연대기(Sahara Chronicle)>의 한 설치장면은 상공에서 그 공간을 영토적으로 그려내는 두 개의 커다란 프로젝션으로 구성되는데, 그 프로젝션된 영상은 지상에서 인터뷰하고 헤드폰과 더불어 보여주는 모니터 영상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설치 방식은 스케일과 다양한 형식을 갖는 서사성의 상호간 겹침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운동성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언급했듯이 이러한 운동성은 사막을 횡단하며 각자의 궤도를 따라갔던 다양한 제작진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러한 다양한 절점들이 동시에 보여지게 됩지요. 심지어 작업은 일관성 있거나 어떤 중요성을 시사하는 선형적 서사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채널 영상작업은 공간과 서사구조를 그려내는 특정한 유형을 가능하게 하며, 작업의 톤 역시 변화 가능하게 합니다.

Stills from Omer Fast's Nostalgia (2009), video installation in three parts / Courtesy the artist, gb agency, Paris, Arratia, Beer, Berlin, Postmasters, New York ⓒ Omer Fast

 

TJ 디모스: 비이만은 작업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적인 것 같습니다. 설치의 복잡성은 작가가 조사해오고 있는 예외 없이 지리학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그 장소가 갖는 다양성(multiplicity)에 대한 비유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머 패스트(Omer Fast)의 작업, <노스탤지어(Nostalgia)>(2009)의 프레젠테이션 방식은 비이만의 작업과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작업을 연이어 보게 되는데, 이러한 설치는 작업이 내포하는 허구적 내러티브의 전개를 반영하며, 갤러리라는 공간 속에서 어떤 공간적 궤도를 드러냅니다.

 

마크 고드프리: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세 개의 분리된 공간들이 시퀀스적으로 설치된 작업이지요. 첫 번째 비디오 작업에서는 영국인 공원관리인이 들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만드는 장면이 보여집니다. 다음 두 개의 스크린이 설치된 어두운 방에 들어서면, 배우들을 통해 재현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작가와 그 자신이 런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영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태생의 이민자 사이의 인터뷰를 보여줍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이민자 남자는 우리가 첫 번째 비디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덫을 만드는 법을 배웠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들의 대화를 5분정도 다 듣고 난 후, 우리는 허구적 영화가 하나의 커다란 사이즈로 프로젝션되는 세 번째 공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세 번째 영상은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터널이 있고, 백인 유럽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부유한 아프리카로 불법 이주를 감행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Francis Alys, Don't cross the bridge before you get to the river (2009)
Courtesy David Zwirner Gallery, New York ⓒ Francis Alys
Photograph of an action

 

이얄 바이즈만: 나는 이 작업을 이주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 보다 서사 구조라는 관점에서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내게는 이 작업은 명백한 정치적 우화로 비춰지지는 않습니다. 언어적 발화행위를 통해서 묘사되고 시간을 가로질러 복제된다는 점에서, 여기에는 지식의 전이(knowledge transference)를 통해서 보여지는 덫의 실체성이 있습니다. 그 실체성은 대화와 또 다른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지요. 어떤 의미에서 덫을 만든다는 행위는 다른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위치 지워질 수 있고, 이 덫은 끊임없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경첩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이동은 단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장치 주변에서 생겨나는 반전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그 이동은 ‘다른 장소에서 이주민이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간단한 방식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 있습니다.

 

T J 디모스: 그러나 그 영화는 우리 자신이 망명신청자의 입장이 되어보기를 상상하도록 유도하면서 관람객을 위한 덫을 놓은 것은 아닐까요?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수전 손탁(Susan Sontag)은 희생자를 위한 연민을 조장하는 다큐멘터리적 태도는 고통 받고 있는 자들에 대한 상상적 접근을 만들어 내고, 이는 관찰자로 하여금 폭력적 상황을 영구히 하는 더 큰 상황에 관해서 (대의 정치를 통해) 참여의 책임을 망각 하는 것을 용납하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패스트의 영상작업에서 보이는 아프리카 보안 요원들이 터널 안에서 영국인 무단침입자들을 추적하는 액션 시퀀스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인들이 체포되었을 때, 군인 한 명이 젊은 여성에게 가솔린을 들이붓고 불을 붙이려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 붙기 바로 직전에 영화는 흑인여성 심문자가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작 장면으로 되돌아 갑니다. [역주: 시나리오에 따르면, 가난한 백인 수위는 부유한 아프리카 흑인 학교의 수위로 일을 한다. 나중에 그 백인은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 정부 관리에 의해서 심문을 받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 테크닉을 차용한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우리를 이민자로서 상상하게끔 만들긴 하지만, 배제라는 시스템 안에서 우리 자신의 참여를 간과하게 하는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마크 고드프리: 나는 이 작업이 다양한 층위로 덫이라는 개념을 잘 드러낸 것 같습니다. 패스트와 아프리카 태생의 이주민이 나눴던 대화의 작은 파편은 작가에게 전체 작업을 위한 구성적 장치로 유용하게 쓰여졌다고 생각합니다. 덫에 관한 그 남자의 묘사는 순차적으로 작가와 관람객이 이러한 주제에 관한 작업을 만드는 것의 덫(함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아마도 주된 함정 중에 하나는 예술작품이 가능한 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주라는 문제에 관해 질문들을 던진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에 대해서 더욱 타당성 있는 반응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스탤지어(Nostalgia)>에서 작가가 불러드린 판타지는 분명하게도 이러한 덫(함정)과 협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패스트의 작업을 지브롤터에서 진행된 프란시스 알뤼스(Francis Alÿs)의 프로젝트와 연결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알뤼스의 프로젝트에서 그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하여 시적인 것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알뤼스는 2008년 8월 모로코와 스페인의 해안가에서 동시에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프란시스는 싸구려 샌달 혹은 모로코 슬리퍼인 바부슈(Babouches)를 가지고 만든 작은 배들을 여러 명의 어린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파도 속에서 일렬로 줄지어 그 신들을 들고 가는 임무가 주어졌지요. 물론 그들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 때문에 서로 다른 해안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그 기저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경계선의 유형들을 무시하거나 넘어 서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열망에 관한 작가가 보여준 환상적인 제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 J 디모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현실에서는 매우 생경하지만, 쌍방향 연결이란 발상을 통해서 다리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환상적인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작가들은 심화되는 보수적 정치형태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다른 미래를 시각화하는 방식들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그 배들이 문제에 관한 실용적인 해결방안이 아니라는 점을 시인하는 것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알뤼스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차용합니다. - 현실 도피주의적,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도 아닌, 참을 수 없는 현존의 현실에 맞서는 비판적인 힘과, 유토피아라는 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고,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관한 영향력을 표현하는 상상의 대안을 위한 창조적 제안으로써 이해될 수 있습니다.

 

Yto Barrada,Advertisement lightbox, Ferry port transit area, Tangier, C-type print 70 x 60 cm, 2003, Courtesy Galerie Polaris, Paris ⓒ All Yto Barrada

 

Yto Barrada, Prawn processing plant in the Free Trade Zone, Tangier, C-type print, 100 x 100 cm 1998, Courtesy Galerie Polaris, Paris ⓒ All Yto Barrada

 

Yto Barrada, First class lounge, ferry from Tangiers to Algeciras, C-type print, 70 x 60 cm, 2002, Courtesy Galerie Polaris, Paris ⓒ All Yto Barrada

 

Yto Barrada, The Strait of Gibraltar, reproduction of an aerial photograph, Tangier, C-type print, 70 x 60 cm, 2003, Courtesy Galerie Polaris, Paris ⓒ All Yto Barrada

 

아예샤 하미드: 어린 시절이라는 주제와 작가가 사용한 일시적인 재료들과 관련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면, 나는 이러한 실패한 제스처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횡단하지 못한 이 배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횡단(crossing) 혹은 실패로 끝난 이주의 담론을 굴절시킨다는 점과 관련하여 그 작업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더욱 “진지한” 작업이 특정 종류의 담론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을 연약한 오브제들과 발터 벤야민이 어린이들의 의식(意識)안에서 위치 지은 유토피아적 충동들로 전치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겨날 까요? 이것은 패스트의 작업에서 보여진 도치(inversion)와 치환(displacement)의 개념에 관한 바로 이전의 논의들로 우리들을 되돌아가게 합니다. 또 다른 가혹한 현실이 이러한 유희성의 배경 속에서 끊임없이 출몰합니다. 예를 들어 “정글” [역주: la jungle: 프랑스 칼레의 정글 이주민 캠프] 속 많은 수의 난민들은 어린이들입니다. 그들은 홀로 여행하며 특정 법적 문제와 구금의 행태에 직면하지요. 이 경우, 유토피아적인 것은 하나의 구체성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러한 여정이 매우 유토피아적이 않다는 그 구체성입니다.

 

마크 고드프리: 우리는 대부분 그 지역과 떨어진 곳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예술가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거주하며 작업을 하는 이토 바라다(Yto Barrada)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대화를 마치는 것이 중요할 듯 합니다. 그녀의 사진집이자 연작인, <해협 프로젝트: 구멍들로 가득한 삶(The Strait Project: A Life Full of Holes) (1998–2004)>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진집에서 몇 몇 사진들은 병치되는데, 그것은 작가가 촬영한 이미지들, 작가가 발견한 지브롤터 해협의 항공 사진들, 매우 추상적인 풍경사진 등이 그것입니다. 책에서 작가는 지브롤터 해협의 “환유적인 특성”, “냉혹한” 장소로써 그 공간이 갖는 실재 정체성과 불가피하게 거대한 무엇으로써 의미화될 수 밖에 없는 대륙과 문화의 교차점이라는 “알레고리컬”한 정체성 사이의 긴장에 대해 매우 훌륭히 적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긴장을 탐험하기 위한 그녀의 야망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T J 디모스: 작가가 작업노트에서 강조하듯이, 모로코 출신 예술가로서 그녀는 1990년대 초반 EU의 솅겐존(Schengen zone) [역주: EU 각국이 공동의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여 EU 국가간의 통행에 제한 없게 하는 솅겐 조약이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을 말한다.] 구성과 더불어 아프리카 인들의 유럽으로의 접근을 통제하고 실질적으로 일방통행로가 되어버린 지브롤터 해협에서의 국경 경계 강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들 사이의 경계를 오고 갔습니다. 어떤 다른 곳을 향해 품었던 모로코 인들의 좌절된 욕망이 보여주는 모순되고 역설적인 현실이 그녀의 사진들 속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듯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종종 시각적 장애물처럼 보이는 벽에 초점을 맞추죠. 사진에는 경계를 향한 공격성이 표현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발길질한 축구공 자국이 보입니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의 측면을 촬영한 사진은 자신들만의 상상의 지도 제작술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시각장은 봉쇄된다는 것(enclosure)에 대한 좌절감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갈망마저도 투영된 표면이 되고 있습니다.

 

마크 고드프리: 알뤼스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어떤 유희와 희망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그녀의 작업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납니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글에서 작가는 유럽을 향해 떠나고자 하는 모로코 인들의 욕망을 “치명적 충동(fatal drive)”이라고 서술합니다.

 

T J 디모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실천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탕헤르(Tangier)에 거주하면서 북아프리카 내에서 독립영화상영과 유통을 위한 장소로써 시네마테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지역 (문화) 생산에 전념하고 있으며, 그 지역에 문화적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머문다는 헌신 자체가 일종의 희망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필자 소개:

마크 고드프리(Mark Godfrey)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현대미술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테이트 모던의 'Francis Alÿs' (2010년 6월 15일 - 9월 5일)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T J 디모스(TJ Demos)는 평론가이자 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미술사학을 가르치며 세계 경제위기에서 동시대의 미술과 이주문제에 관련된 책을 집필 중에 있다. 그는 또한 Alex Farquharson와 노팅험 컨템포러리(Nottingham Contemporary)에서 전시 'Uneven Geographies: Art and Globalisation'(2010. 5. 9 – 7. 5)를 공동 큐레이팅했다. 이얄 바이즈만(Eyal Weizman)은 건축가이자 Goldsmiths College, Centre for Research Architecture의 디렉터이다. 아예사 하미드(Ayesha Hameed)는 Goldsmiths College, Centre for Research Architecture의 선임연구원이다. 마니페스타 8 (Manifesta 8: The European Biennale of Contemporary Art)은 2010년 10월 2일부터 2011년 1월 9일까지 스페인의 Murcia 에서 열렸다.

 

역자 소개:

현아(Hyun A)는 런던에서 사진과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현재 서울에서 작업과 번역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http://www.tate.org.uk/tateetc/issue19/rightsofpassag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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