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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반하는 부분. 참여 그리고 / 제도로서의 참여

2011-09-25  

전체에 반하는 부분. 참여 그리고 / 제도로서의 참여

Andrew s. Weiner

1977년 첫 해프닝 이후로, 거의 20년 후, Allan Kaprow는 퍼포먼스에 기반한 미술 이벤트와 생방송 TV 쇼 사이에서 자극적인 유사점을 갖는, 관객 참여의 향후 발전의 특징에 대해 언급했다. Kaprow는, “즉흥적인 반응”을 만들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자체가 불필요해진다는 측면에서, 해프닝에서 참여 관객에게 주어지는 신호가 스튜디오에서 들어오는 박수 신호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1) 혹자는 Kaprow가 미술 제도적으로 승인된 창작의 영역 안에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는 최근 참여 미술의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궁금해 한다. Kaprow는 2006년 Munich의 Haus der Kunst와 Van Abbemuseum, 그리고 Eindhoven가 협력 기획한 순회 회고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Marina Abramovic의 2005년에 재현된 Seven Easy Piece 같은, 역사적 퍼포먼스 작업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2008년 있었던 두 개의 큰 전시, 처음으로 관계 미학의 카테고리로 작가들을 소개했던 Guggenheim의 “the any space whatever” 전시와, 별개의 방식으로서 참여 작업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자 처음 시도 했던 “The Art of participation: 1950 to now”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에서의 전시를 통해 좀 더 증폭되었다. 2)

일단 사람들은 이러한 이벤트의 부활을 환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적인 열망에도 불구하고, 참여 작업은 단 한번도 폭 넓은 관객층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참여 작업을 표방한 아카이브들은 블록버스터 모터사이클 전시나 그에 준하는 전시들의 반짝반짝하는 포퓰리즘의 대체물이 되었다. 지난 미국 선거 패턴에서 보여졌던 집단적인 협업에 대한 낙관주의가 일부 계속되고, 미술 시장의 과시적 소비가 침체될 때,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저자세의 미학도 잠깐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활발한 것이 되지도 않을 것이며,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이 관객을 활성화시키는 것에 갑작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진부한 작업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미술관의 제도적 노력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회의적이다.



Musealization(작업의 미술관 내 안착)은 참여적 작업이 갖는 정신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옹호에서 오는 이익 사이의 긴장감만 증가시켰다. 일부 별볼일 없는 미술적 상황에서, 어떤 작업들은 아트의 명찰을 다는 것을 피했다고 해도, 다시 아트의 문맥 안에 재 위치되었다; 이것은 미술관 안에서 활성화되는 미술 제도 비판적인 작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좀 더 최근의 새로운 작업 경향인 일회적 이벤트성 작업에는, 그것을 보존하는 문제도 있다: 일회적 이벤트성 작업은, Abramovic의 작업처럼 일회적인 개입을, 재현을 통해 일종의 레파토리나 캐논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결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단순히 취급할 수 없는 이러한 논쟁들은, 참여를 하나의 구분되는 미술 형태로 정의하려는 시도에 대해, 근본적인 모순을 더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카테고리에 대한 명백하고 필수적인 반론들은, 모든 미학 경험에서 참여적 성격을 가진 작업에 대한 신용을 떨어뜨렸다. 3) 이러한 관점에서, 참여적 감각을 촉발시키며, 해석을 요구하고, 거기에 대한 논쟁을 얻어내려고 하는 모노크롬 회화나 제도 비판적 작업도, 여러 모로 관객을 포함 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에 해프닝 보다 “덜 참여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두번 째 문제는, 비판적인 평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참여 작업의 효과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이알로그나 사회성에 의존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결정되고 평가될 수 있겠는가? 4) 심지어 미술 비평가들이 자신들을 민속지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비평에 접근한다고 해도, 그들이 설명할 수 있는 건, 아티스트들이 자체 선정한 관객들의 경험담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그들의 대화를 재구성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참여 작업에 대한 비평이 가지는 문제점은, 그것이 단지 비실제적이라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 작업에서 어떻게 미학과 정치학이 받아들여지고 추구되는 지에 대한 의미를 짜내기 위한 절박한 시도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단지 현재에 더 심하게 부각되는 문제들이었으면 좋겠지만, 이 문제들은 당연히 더 심각해지기 쉽고, 심지어 영구적인 것이 될 수 도 있다. 미술사적 캐논을 견고히 하는 최근의 전시들을 볼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비판적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어떤 종류의 위계 질서 및 예외가 성립 되야 되며,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SFMOMA의 조사가 신뢰할만한 것이라면, 반미학주의 (anti-aestheticism) 의 다양한 특징들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즉, non-art 와 anti-art의 특정 형태는 현재 미술 제도 안에 좀 더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미술 휴양이라는 특권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5) SFMOMA에서 이것은 참여 작업이 퍼포먼스, 후기 미니멀리즘, 미디어 아트라는 기존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으며, 실험적인 건축, 급진적인 연극, 그리고 공공연한 액티비즘을 피하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Fluxus, Dan Graham, 그리고 Janet Cardiff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Archigram, the Living Theater, 그리고 ACT UP은 해당하지 않는다. 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명백한 부재는, 미술, 사회성 그리고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을 회피한 채, 참여를 놀이와 레저 활동과 동일시하는 전시의 경향에 대해 우리가 계속 침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6) 상당히 명백히 정치적인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는 참여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Group Material이나 WochenKlausur같은 작가들의 덜 알려진 작업들이 어떻게 미학과 정치학 사이의 대립을 지연시킴으로써 그 사이의 연계점을 만드는지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한다.



추가적인 문제는 참여 모드가 매우 많은 다양한 문맥 - 그 경제성, 가소성, 그리고 인용과 번역에 대한 개방성, 안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특성에 있다. 이 공통된 특징은 참여 미술의 역사를, 특정 매체 같은 것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큐레이터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는 반면, 그러한 추상적 전환은, 작업이 판독성과 정확성을 전달했던 처음의 내포된 로컬 문맥과 동떨어져 읽혀지게 만든다. 때때로 이것은 작업 자체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좀 더 쉽게 장르를 넘나드는 인터네셔널 작가들에 대한 오해를 더 증가시킬 뿐이다. Joseph Beuys에 대한 수용도 이러한 문제를 드러냈는데, SFMOMA에서 전시된 작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효과적인 문맥화가 결여된 채, LA RIVOLUSIONE SIAMO NOI(1972)같은 도상적인 이미지는 너무 서슴 없이 Beuys가 희망 없는 이상주의자 혹은 시니컬한 사기꾼이라는 의견으로 몰고 갔다. 그가 이상주의자거나 사기꾼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정치적인 기획과 직접적인 행동이 따르는 실험적 시도들은, 그의 개인 숭배적 측면 때문에 평가 저하되어서는 안 되는 복합적 산물이다. 최근의 브라질 작가들의 작업들의 부활은 비슷한 방식으로 읽혀져 왔다. Lygia Clark과 Helik Oiticica의 유희적이고 감각적인 작업들이 유럽과 북미 쪽에서 자주 보여지면서, 작업에 근본적으로 드리워진 정치적 억압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채, tropicalism의 시작으로 쉽게 왜곡 되었다. 1964년 이후 공공 공간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던 군사 정권하에서, 관객의 참여는 불법적으로 간주됐던 집단적 행동을 미약하게나마 시각적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는 전복적인 의미를 내포하였다. 이것을 참여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볼 때, SFMOMA같은 전시에서 제시되는 과하게 읽혀지는 서사들 – 미술의 자율성이 부인될 여지가 없었던 상황에서, 실패한 포지션닝이 분명했던, 미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려 시도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정신의 점진적 성취 - 또한 문제가 된다. 7)

Lygia Clark. scaras sensoriais, sensorial 1967

같은 천으로 된 마스크이지만, 각각을 특징짓는 감각적 자극이나 색채는 다양하다. 그린, 핑크, 블루, 자주, 체리, 그리고 화이트와 블랙. 잠수안경은 다른 시각적 원근(perspective)을 가지고 있다.
눈 부분의 두 구멍에는 시각적 자극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재료들이 꿰매어져 있다. 코 부분에는 주머니 형태로 헝겊이 꿰매어져 있으며, 씨와 허브 잎들이 후각을 자극한다. 마스크의 귀 부분은 각종 재료들이 다른 감각에 통합되도록 하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마스크를 낀 상태의 참여자들은 주변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고립의내부화로 향해 가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한다.

 

이러한 생산과 수용의 회로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관계 미학처럼 전형적 글로벌 브랜드로 의심되는, 참여에 대해 포괄적인 시각으로 그 주제를 대강 얼버무리는 역사적 인용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내부적으로 차별화된 계보의 필요성은 지난 십여 년간 참여 미술의 수사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변화해 왔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Kaprow와 같은 Neo-avant-gardist들은 모던 스펙타클의 후반부에, “경험”에 산재하는 마케팅을 분석하길 원하는 문화 비평가들은 비지니스 매니지먼트의 가이드를 읽어야 될 정도로 미술과 삶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8) 심지어 Guy Debord의 스펙타클에 대한 비평은, 수동적인 스펙타클한 사회성의 공식으로는, 참여와 소비가 결합되는 팬 픽셕이나 온라인 게임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품화의 확산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재 그 견인력을 상실하였다. 인터렉티브에 대해 현재 널리 사용되는 용어로는, 광고와 마케팅 에이전시가,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신상품에 대한 beta-test에 참여하며, “바이러스같이 전염적인” 홍보를 창출해 내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효과적으로 그들의 노동을 위탁하는 방식 같은 참여적 소비가, 어떻게 생산을 재구성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9) 브랜드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스폰서들과 협력 관계에 있는 미술관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원래는 “MyMuseum”이라는 타이틀로 기획됐던 San Francisco의 전시가 사회적 네트워킹, 오픈-소스 협업, 그리고 사용자 중심의 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인터넷 경향에 대한 뉴미디어 신조용어인 Web 2.0과 관련한 참여의 역사를 노골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사실은 증명된다. 10) 참여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이와 유사한 이념적 효과는 선거 정치에서도 목격된다; 민주주의의 카테고리 (후보자/선거권자)를 엔터테인 카테고리와 (연예인/팬)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참여의 개념을 선거 자금을 모으고, 기부를 하는 실제적 돈을 만들어내는 개념과 종종 동일하게 간주되었던 사실은, 풀 뿌리적 참여를 적극 지지했던 Obama의 역사적 선거 캠페인에서 충분하게 논의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러한 참여와 소비의 결합은, 참여 작업이 참여 그 자체를 특징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끝임 없이 변화하는 토대를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까지, 참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가진 차별적 원동력을 잃고, 단지 다른 미술 매체들 사이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에 대한 것으로 생각됐었다. 11)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진보주의가, 참여의 도구화에 대해 증가하는 우려의 감정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더 향상된 감시의 요구가 시급하다. 그러한 노력은 최근 비평가들이 강조해 왔던, 문제가 되는 부분을 재 평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미학과 정치의 스펙타클 안에서 결합을 간과한 채, 그들을 잘못 동급화시키거나 분리시키는 경향12); 재현이 주로 행동의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행동과 재현을 양분화 시키는 것 13); 그리고 그러한 경향의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한, 표면적으로는 해방적인 제스처들에 대한 수용하는 것. 14) 이러한 감시의 시선은 또한, 새로운 사회적 미디어에 너무 근접해 서, 과거의 참여 작업을 위치시켰던 시도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될 것이다. 과거 참여 작업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과거의 복고스러운 공학을 현재의 기술자본주의 시대성의 선구자로 둔갑시키는 현재주의를 내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구조적인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을 간과한다.

이러한 참여 미술에 대한 고민은, 참여 미술의 개념이 문제는 있지만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라는 것을 전제하다. 이 전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비평가들과 관계자들은 참여를 더 이상, 어떤 매체나 수단, 혹은 그 자체를 목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참여의 개념이, 그것에 자주 따라 붙는, 헐거운 일반화로 읽혀져서는 안된다. - 왜 참여, 개입, 집단적 행동, 혹은 공동 노동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되는가? 비평가들과 미술 관계자들은 참여가 논쟁과 요구, 그리고 의견의 불일치 등을 선택하는 만큼, 그것이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것이라는 상대적으로 약한 주장 보다는, 좀 더 발전된 크리틱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동시에, 이러한 노력은, 구분없이 포괄적인 관객의 포지션과,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작업의 노동을 대체하는 싸구려 포퓰리즘에 의한 정치학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를 경계할 수 있다. 어떤 참여의 형식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의 제약과 잠재성이 분별 있는 형식으로 대표되는 영역 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접근은 어떤 면에서 참여 그 자체를 좀 더 많은 질문에 오픈 시킴으로써, 재 위치시킬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참여의 초대가 호의적 설득력을 작동시킬 것인가? 어떤 참여 형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혹은 작업이 스스로의 문맥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작업이 미학이나 정치적 참여에의 권리를 선택적으로 부정하는 방패물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작업의 한 예는 Emily Jacir의 WHERE WE COME FROM(2001-03) 이다. 여기서 Jacir는 West Bank와 Gaza 지구로 들어가기 위해 그녀의 미국 여권을 사용하며, 거기서 여행이 금지된 추방된 팔레스타인들의 일종의 대리자로서, 간단한 행동들을 수행한다. 어쩔 수 없이 절충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계획으로서 이 이벤트는, 구원적 태도를 지니거나 혹은 공격적인 문화적 정치에 대한 비판 없는 시도를 피하면서, 참여의 불가능성을 가능성에 대한 물질적 조건으로 만든다. 또 다른 예는 Ayreen Anasta와 Rene Gabri의 CAMP CAMPAIGN (2005-07) 작업이다. 이 작업은 작가가 미국을 여행하는 불안정한 하이브리드 프로젝트이다. 이 작업은, 풀 뿌리 정치적 기획에 대한 즉흥적인 비판적 퍼포먼스에서 심지어, 일종의 내재된 담론의 분석에 이르는 범위를 아우르면서 Guantanamo Bay에 있는 구금 캠프와 관련된 활동들을 전개시킨 작업이다. 이 두 작업이 활성화된 원리는, 미래의 비평과 생산을 더 이상 간과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미학과 정치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은, 전문가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동의 논제로 오픈 되어야 한다. 16) 그러한 과점에서, 참여의 재구성에 있어서 우리도 어떤 부분에 대한 역할을, 심지어 그 부분이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mily Jacir WHERE WE COME FROM(2001-03)

 

1)Allan Kaprow, “Participation Performance” in Essays on the Blurring of art and Life, ed. Jeff Kell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 181-85

2) 이 발전과 유사한, 주목할 만한 시도는, 참여 미술의 토픽에 대한 소스 텍스트와 글 모음집에 대한 Clare Bishop의 출판이다. Participation; Documents of Contemporary Art, ed. Claire Bishop (London and Cambridge: White Art Gallery and MIT Press, 2006) 참고

3) Simon Pleasance와 Fronza Woods가 번역한 Relational Aesthetics (프랑스, Les presses du reel, 2002), pp. 15 16에서, 저자 Nicolas Bourriaud가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 예를 참고.

4)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은 Clare Bishop의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no. 110 (Fall 2004), pp. 51-79 참고.

5) 이 편견은, 전시된 많은 작업들에 나타나는 anti-art의 경향에 대해 문제적 pres-ence를 설명하는, 전시의 큐레이터인 Rudolf Frieling의 주장에서 명백하다: “어떤 일이 생기던 간에, 그것은 예술적 경험으로 자리할 것이다.” Frieling, “Toward Participation in Art” in The Art of Participation: 1950 to Now (San Francisco, New York, London: SFMOMA with Thames & Hudson, 2008), p. 34.

6) 이러한 관점에서, The Art of Participation은 관계 미학을 1968년에 대한 반목을 초월하는 후기 공격주의의 문화적 정치학의 일종으로 보는 Nicolas Bourriaud의 초기 아젠다를 상기시킨다. Relational Aesthetics, pp. 84-85에서, Nicolas의 Debord와 구축된 상황에 대한 논점을 참고.

7) 그러한 내러티브에 대한 거부는 최근의 중요한 전시 El Museo Del Barrio 전시 “Arte ≠ Vida.”의 기획 의도이다. Deborah Cullen은 그녀의 전시 카탈로그, Arte ≠ Vida: Actions by Artists of the Americas, 1960 -2000, ed. Cullen (New York: El Museo del Barrio, 2008), pp. 12-15. 의 서문에서, 논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8) 한 예는 자주 인용되는 책, B. Joseph Pine II and James H. Gilmore, The Experience Economy: Work is Theatre & Every Business a Stage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1999)이 될 것이다.

9) 그러한 작업에 대한 대표적인 토론에 대해서는, Jack Hitt, Benjamin Palmer, Lars Batholm, Robert Rasmussen, “Multi screen Mad Men,” The New York Times Magazine, 23 November 2008, pp. 64-49를 참고.

10) Frieling의 서문에서 (see note 4), p. 12

11) Claire Bishop (note 2 참고), pp. 11-12.

12) 미학과 정치학의 허구적 동등화에 대한 논쟁은, Bishop의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pp. 78-79 를 참고; 그들의 가정된 분리에 대한 반론은, Sven Lütticken의 “Progressive Striptease: Performance Ideology Past and Present” in Secret Publicity: Essays on Contemporary Art (Rotterdam: NAi, 2006), pp. 165-80을 참고

13) Sven Lütticken의 “Black Block, White Penguin: Reconsidering Representation Critique,” Artforum XLV, no. 7 (March 2007), pp. 298-303참고

14) Jacques Rancière는 이 문제를 다음의 글에서 설명한다, “The Emancipated Spectator,” Continuous Project #8, ed. Bettina A.W. Funcke (Chatou, France: Cneai, 2006), pp. 17-27.

15)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정보는 다음의 웹사이트에 아카이브되어 있다. www.campcampaign.info. 또한, T.J. Demos의 “Means Without End: Ayreen Anastas’ and Rene Gabri’s Camp Campaign,” October, no. 126 (Fall 2008), pp. 69-90 참고.

16) 그러한 시각은 Group Material이 그들의 영향력 있는 1988년 프로젝트 “민주주의”: “ ‘정치학’은 전문적 정치인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한정된 놀이판에만 국한될 수 없다.”에서 취한 태도를 발전시킨다. Group Material, “On Democracy” in Participation (see note 2), p. 135

ANDREW S. WEINER는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수사학 박사 과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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