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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라는 기계

2011-11-16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MK2라는 커피집에 갔다가 페스티벌 봄에 대해 알려주는 플라이어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페스티벌 봄의 홈페이지(www.festivalbom.org)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홈페이지는 슬기와 민이 디자인했으므로 디자인적으로는 뭐라 할 구석이 없다. 하지만 어떤 홈페이지도 그렇지만, 모든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스케줄이라고 돼 있는 태그를 클릭하면 스케줄이 나오긴 하는데 24인치의 제법 큰 내 모니터에도 모든 내용이 다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 한 30인치는 되는 모니터로 봐야 봄의 모든 스케줄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듯 하다. 맨 위쪽에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등등 장소들이 주욱 써 있고 그 아래 각 장소에서 열리는 이벤트들이 있는데 아래쪽으로 스크롤해 나가면 맨 위의 장소들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이벤트 이름들만 보이므로 그게 어느 장소에서 열리는지 알기 어렵다. 4월16일 토요일에도 몇몇 중요한 공연들이 있는데, 파드미니 체투는 어디서 하는지, 바르바라 마티예비치 & 주세페 치코는 어디서 하는지 알기 어렵다. 장소를 확인하려면 위로 스크롤해서 올라가면 되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아까 봤던 이벤트들이 어느 장소에 해당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것은 디자이너의 잘못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 번에 한 페이지씩 밖에 볼 수 없다는 인터넷 홈페이지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가 종이로 된 찌라시를 집어들었을 때 거기는 홈페이지의 면적의 4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에 모든 행사와 장소와 시간이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어서 금방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뒷장으로 넘기면 각 프로그램의 내용도 어떤 클릭도 하지 않고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스크롤 따위는 안 해도 된다. 종이는 나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펼쳐 보여준다. 같은 행사의 내용을 인터넷으로 보고 종이로 보면서 과연 종이라는 기계의 기능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적어도 페스티벌 봄의 경우는 종이가 홈페이지 보다 훨씬 편하다. 물론 홈페이지는 클릭을 부지런히 하면 다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티비 리모콘도 만지기 싫어서 프로가 끝나고 나오는 보험광고도 그냥 계속 보고 만다는 귀차니즘이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고 21세기의 새로운 통치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 클릭이란 상당한 노력인 경우가 있다. 처음 마우스가 나왔을 때는 무엇을 하려면 두 번 클릭해야 했으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는 한 번 클릭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이 그런 사례이다. 인터넷 사용자에게는 한 번 더 클릭도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라 클릭에 따르는 신경쇠약 비슷한 증상이다. 실제로 짧은 시간에 어떤 정보를 찾느라 홈페이지들을 과도하게 많이 클릭하고 나면 심리가 초조해지고 몸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면서 무기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혹시 과다클릭신경증후군이라는 병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병이 나타나듯이, 클릭은 분명히 쉽게 정보를 찾으라고 만들어 놨건만 지나치게 하면 몸과 마음에 안 좋을 수 있다. 본인도 열심히 클릭해서 정보를 찾다가 몸과 마음이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컴퓨터를 끄고 강제로 잠을 청해야 했던 적이 있다. 클릭은 분명히 편하라고 있는 것이지만 무한대의 편안함이 우리의 존재를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클릭은 높은 산에 올라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발 아래 장쾌하게 펼쳐진 운해를 감상할 때의 편안함은 절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다.

클릭의 불편함은, 혹은 불안함은 모든 정보가 주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많은 정보들이 더 숨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 혹은 기대에서 온다. 지금 보고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정보가 있을 거야. 아파트 시세를 더 정확히 알려주는 사이트가 분명히 있을 거야.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미 낡은 정보인지도 몰라. 리비아의 시위대가 카다피를 내쫓기 위해 트리폴리를 공격하고 있을 때 카다피는 이미 자살했을 지도 몰라. 그래서 미친 듯이 클릭한다. 클릭은 클릭을 낳고, 한 번의 클릭은 여러 번의 클릭을 낳고, 우리는 클릭의 자손이자 인질이 된다. 그래서 클릭이 피곤한 것이다. 인터넷이란 끝이 없는 정보의 연결고리이므로, 클릭은 또 다른 클릭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거 같애서 견딜 수가 없게 만든다. 인터넷을 만든 사람이 이렇게 사용자들을 괴롭히려고 설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터넷과 클릭은 새로운 종류의 불안증을 만들어냈다.

반면, 종이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종이는 사람의 살갗과 닿는 부드럽고 바삭한 물질감을 통해 자신의 모든 현존재를 사람 앞에 드러내고 있다. 어떤 페이지에 어떤 말들이 쓰여 있으면 그게 다다. 그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더 좋은, 더 새로운 비밀의 콘텐츠를 찾아 뒷장을 뒤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종이는 항상 일목요연하게 모든 정보를 보여준다. 인터넷 홈페이지는 쫙 펼칠 수가 없지만 종이는 신문이건 찌라시건 한 번에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다. 전에 백남준은 임의접근정보(random access information)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사실 종이야말로 임의접근정보이다. 책은 집어들어 아무 페이지나 들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 프로그램이나 알고리즘이라는 난해하고 음흉한 세계를 잔뜩 감추고 있는 인터넷에 비해 종이는 물질적 현존성 뒤에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몽땅 드러내므로 매우 솔직하고 편안하다. 이 세상에 모조지를 손끝으로 살짝 집어 만질 때의 느낌 만큼 편안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킨들이나 여러 전자책들은 종이의 질감을 디지털적으로 만들어내려고 그렇게 애들을 쓰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에 있는 좋은 기능들이 종이에 없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댓글을 달 수 없다. 사실 종이에 댓글 달기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같은 확산력은 없다. 책에다 자기 의견을 적어 남에게 보여주면 그게 댓글이 아니고 뭔가. 옛날에 어느 소설가는 아는 분에게 저자서명을 해서 책을 증정했는데 나중에 우연히 헌 책방에서 그 서명이 들은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가 증정한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팔은 것이 괘씸한 그 소설가는 그 책을 사서 ‘아무개 선생께 재증정’이라는 서명을 해서 다시 드렸다고 한다. 이런 식의 댓글이 종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그 댓글의 속도와 확산력이다. 종이는 무게와 크기를 가진 물질이기 때문에 확산되는데 한계가 있다. 정보전달이건 피자배달이건 속도가 삼강오륜보다 중요한 인륜의 덕목인 오늘날 종이에 붓으로 멋들어지게 댓글을 달아서 정중히 전달했다고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이 세상 모든 것이 인터넷 중심으로 되어,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없으면 없는 것이다‘라고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닌데, 하나의 예만 들자면 함경도 사투리 어휘는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다. (샤쓰개, 채내키, 생을력, 융질거리다, 판난다) 그렇다고 함경도 사투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터넷이 닿지 않는 어디론가 잠복해버린 것이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시던 내 할머니와 이북출신 친척들은 돌아가셨고, 함경도 출신의 탈북자는 남한 사회에 정착하여 함경도 사투리를 절대로 쓰지 않으며, 함경도에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종이에는 있는데 인터넷에는 없는 것도 많을 것이다.

종이책의 가치를 숭상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종이의 장점을 말한다. 종이는 정보를 얻기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펼치면 되기 때문이다. 배터리를 넣을 필요도, 전원을 연결할 필요도 없다. 종이로 된 책은 컴퓨터와 달리 고장 나지 않고 AS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이책은 집어던져도 부서지지 않고, 아무 때나 꺼내서 펼쳐 읽을 수 있으므로 정보에 대한 접근이 부팅하고 한참 기다려야 하는 컴퓨터 보다 빠르고, 모니터와 달리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물론, 정보는 종이로 봐야 참맛이라는 극히 주관적이고 보수적인 입장도 있을 수 있겠다. 필자가 보기에 종이가 인터넷에 비해 절대적으로 좋은 점은, 어떤 프로그램도 배우지 않아도 종이에 쓴 정보는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책을 펼칠 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종이는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종이라는 기계는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 단순한 기계를 당할 기계는 없다.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종이와 디지털의 가장 큰 차이는 둘 다 그 배후에 막강한 기계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나 종이는 겉으로는 그런 점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장의 종이가 나오기까지 나무에서 껍질을 벗기는 것에서 시작하여 펄프를 만들고 얇게 펴서 말린 다음 표백을 하고 자르는 복잡한 절차가 들어간다. 게다가 그 종이가 묶여서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더 복잡하다. 컨텐츠를 짜기 위해 책의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위인전 등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훌륭한 선생님들한테 배우고 석사, 박사까지 일개미처럼 공부해야 하며, 출판사는 어떤 책을 내야 돈도 벌고 이미지도 좋아질 수 있을까에 대해 경영전략회의를 수도 없이 하며, 마침내 책이 만들어지려면 편집, 인쇄, 제본, 배부, 홍보 등 거쳐야 할 단계들이 참 많다. 종이공장과 인쇄소의 육중한 중장비들을 보면 가벼운 종이를 만들어내는 기계와 그 절차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의 맨 끝에서 우리 손에 달랑 들어오는 한 권의 종이묶음이 그 모든 절차들의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은 종이라고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디지털 기계는 생각하는 모습을 다 보여주고, 때로는 버벅거리며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그러다 생각이 딸리면 다운돼서 멈춰버리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자신이 작동하는 기계임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스마트폰에는 컴퓨터 같이 하드 드라이브도 없고 냉각팬도 없기 때문에 작동음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자가 작동이라는 기계의 고향을 설사 잊어먹을까 두려워 작동을 멈춰버리거나 오작동한다. 물론 스마트폰이 더욱 좋아져서 정말로 스마트해져서 오작동이나 다운되는 일이 점차 사라지겠지만, 자신이 기계인 한은 계속해서 티를 낼 것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아무 소리도 안 내고 아무 고장도 안 나는 자동차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계인 한 작동을 하게 돼 있고, 작동을 하다 보면 탈을 내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종이라는 기계의 작동음이 없고 고장도 없다. 기껏 작동음이라고 해봐야 책을 넘길 때 사락사락 하는 소리 정도지만 그것은 기계의 소리라기 보다는 종이라는, 마치 우리 존재의 원형 같은 나무가 변형돼서 만들어진, 자연에 가까운 물질의 소리인 것이다.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가 돌아가는 소리나 스마트폰이 내는 발신음에 비하면 책의 종이장 넘기는 소리는 자연이 내는 바람소리나 물소리에 가깝다. 종이가 고장 난다고 해봐야 책의 제본이 헐어서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는 정도라 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고장 나면 데이터가 날아가듯이 종이 위의 내용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책이 디지털 컴퓨터와 다른 결정적인 지점은 그것이 주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사실 종이는 책의 본질이 아니다. 주름이 본질이다. 종이는 접어도 망가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며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료일 뿐이다. 유리나 석판은 접으면 파괴되지만 종이는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정보전달의 매체로 남은 것이다. 그것이 종이가 됐든 양피지가 됐던 일단 접어야 책이 된다. 종이를 반으로 가르는 금이야말로 낱장의 종이와 한 권의 책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사실 멀쩡한 종이를 접으면 일단 파괴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서류는 접히거나 구겨지지 않게 폴더에 넣어 보관하고 전달한다. 하지만 주름이란 종이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질서화이다. 그것은 종이가 책으로 만들어지는 첫 단계이다. 주름을 따라 많은 것들이 구획되고 질서화된다. 질 들르즈가 주름에 대해 쓴 책의 첫 페이지에서 쓴 말은 책의 기능과 의미의 시발점으로서의 주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바로크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 혹은 어떤 성향을 가리킨다. 바로크는 끊임없는 주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사물을 고안해내지 않는다. 동쪽에서, 그리스에서, 로마에서,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에서, 고전에서 오는 온갖 종류의 주름들이 있다. ... 바로크의 성향은 주름을 비틀고 뒤집어서 무한으로 밀어넣고, 주름 위에 또 주름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바로크의 주름은 무한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펼쳐져 나간다. 무한이라는 것이 두 단계 혹은 층으로 돼있는 듯이, 바로크는 두 가지의 무한을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그 주름을 분화해나간다. 그 두 가지란 사물의 주름(pleat)과 영혼의 주름(fold)이다. 아래에서, 질료는 첫 번째 유형의 주름에 따라 축적되며, 부분들이 ‘다르게 주름지고는 발전해 나가는’ 기관들을 구성하는 한에 있어 두 번째 유형에 따라 조직된다. 위에는, 자신의 주름을 따라가지만 ‘이런 소통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완전히 발전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신의 영광의 유일한 기호가 있다. 어원상으로 보면, 미로는 많은 주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수적이라고 한다. 다수적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들을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접혀 있는 것이다.“ (Gilles Deleuze,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p.3)

들르즈의 텍스트의 난해함과 번역의 어려움 때문에 이 인용문은 들르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 단, 한 철학자가 주름이라는 현상을 얼마나 풍부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가 보려는 것이다. 주름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로 퍼져 나간다. 주름은 주름을 낫고, 물질과 영혼을 매개하며 펼쳐져 나아간다.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이 한 장의 주름만으로는 책이 되지 않는다. 첫 장과 마지막장의 주름들이 마치 전염병이 퍼지듯이 서로 잇닿아서 퍼져 나가야 책이 된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주름을 경계로, 혹은 매개로 하여 전개된다. 주름은 논두렁과 비슷한데, 이는 논과 논을 가르지만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논두렁에는 벼를 심을 수 없지만 논두렁이 있어야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 책의 주름에는 아무 것도 써있지 않지만 책의 내용을 구분하고 그것이 전개될 수 있도록 질서를 잡아준다. 그것은 경계이면서 뼈대인 것이다.

아주 안 좋은 사례긴 하지만, 종이를 접어서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가 이 세상에 한 권만 있는 책의 경우다. 대학교수직에 지원하는 사람은 성과물을 내야 하는데, 전에 써 놓은 글들을 모아서 보내주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주는 (복사집 수준의) 출판사가 있다. 제대로 된 책을 낼 시간은 없고, 대학에 급히 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편법을 쓰는 것이다. 그 지원자가 자신이 쓴 글들을 모아서 출력한 A4 용지의 묶음을 낸다면 대학은 그것을 성과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종이들을 접어서 묶으니 그제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성과물로 인정받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엉터리 책이 많아서 저서는 아예 성과물로 받지 않는 대학들이 많다) 이 경우 의미 없는 종이뭉치를 의미 있는 성과물로 탈바꿈시켜 주는 것이 주름이다.

반면, 컴퓨터와 인터넷 어디에도 주름은 보이지 않는다. 책에서와 같이 파생하는 주름은 더더군다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C, D, E 등 여러 개의 드라이브로 인위적으로 나눌 수는 있으나 그것은 종이 위의 주름과 같이 물질과 개념을 동시에 품고 매개하는 주름은 아니다. 구획(partition)과 주름(fold)은 다른 것이다. 컴퓨터에 폴더는 있지만 그것은 그래픽 아이콘상으로만 그렇게 나타나 있지 실제 물질적인 폴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물질적인 주름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하이퍼 텍스트는 어디로든 옮겨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꾸만 컴퓨터와 종이를 비교하며 양쪽의 특징을 대조하여 강조하다 보니 이 세상을 종이 대 인터넷의 대결구도로 단순화해서 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 비해 종이를 옹호하면 뭔가 옛날 가치를 다시 끌어들이려는 수구적인 태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사실 종이가 인터넷과 어느 정도 대결구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종이로 된 책이 덜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홈페이지라는 말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종이책의 모방이다. 그 현현방식이 전자식이고 디지털식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에 이르면 인터넷은 종이와 더 이상 공통점이 없어져 버린다. 텍스트란 말도 종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이퍼에 이르면 종이는 완전히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사실 하이퍼텍스트는 더 이상 적절한 말이 아닌 것이, 글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나아가 동영상이나 음악파일도 마구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정보가 하나의 현현상태(어떤 홈페이지나 워드화면)에서 다른 현현상태로 아무런 물질적 빚도 지지 않고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은 종이에게는 영원히 이별을 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종이는 여기서 닭 쫓던 개처럼 인터넷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대결구도니 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물론 대결구도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컴퓨터의 보급과 일상의 디지털화는 전지구를 뒤덮을 만큼 막강한 현상이지만 한 편으로는 종이에 대한 향수를 살짝 감추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된 현상이지만, 국내에서 사진가들이 디지털 프린트를 많이 쓰기 시작하던 1990년대말만 하더라도 디지털 프린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이에 하는 아날로그 프린트, 즉 전통적인 인화의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진가들이 좋은 디지털 프린트를 보았을 때 감탄사가 “인화지에 한 것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사진에서 종이 프린트는 결국 아날로그 시절을 디지털 시절에 환생시키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종이가 의미의 물질적 고향이었기 때문일까? 웹페이지를 ‘스크롤’한다는 말은 원래는 종이말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동양에서 스크롤이라고 하면 족자를 말한다. 지금 와서는 스크롤이라는 말이 원래의 종이말이보다 컴퓨터 용어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는 것은 디지털이 종이를 대체해 간다는 증거이다.

종이가 컴퓨터와 디지털로 대체돼 가면서 나타나는 강력한 현상은 종이의 죄악화이다. 한때는 종이와 컴퓨터가 동거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초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펀치 카드를 썼으며, 아직도 사람들은 종이에 출력해 봐야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왜 종이를 내몰아버리려고 하는가. 종이를 만들려면 나무를 베야 하고 그러면 환경이 파괴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윤리적인 것 말고 종이를 죄악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종이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낙인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데이터의 탈물질화라는 강력하고도 유장한 흐름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비평가는 그런 구호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 종이가 환경에 나쁘다는 담론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어야 하고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배출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면서 종이는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처럼 몰아간다. 이런 담론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종이를 대체하는 컴퓨터, 모니터, 프린터 등 주변기기, 모바일 기기들을 만드는 데는 아무런 자원도 소비되지 않고 환경도 전혀 파괴 안 되며 아무런 탄소도 배출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사두면 몇 십년이고 꽂아두고 읽을 수 있는 종이책과 달리, 업무용 컴퓨터의 평균교체주기는 4년이다. 그런 물건들 중에서 재활용되는 비율은 국내의 경우 극히 적어서, 10%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말로 컴퓨터는 자원낭비를 막아주느냐이다. 미국은 한 해에 3천만대의 컴퓨터와 1억개의 핸드폰을 버리며, 그 중 재활용되는 것은 15%뿐이며 나머지는 매립지나 가거나 소각로로 들어간다. 매립지의 중금속 중 70%는 전자제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전자산업쓰레기 중 상당량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종이를 죄악시하는 것은 그 이후 세대의 기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담론의 장난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컴퓨터라고 해서 자원의 낭비를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 세대의 기계가 물러가고 다음 세대의 기계가 나올 때는 항상 구소련에서 정권이 바뀌면 일어나곤 하던 스탈린격하와 비슷한, 전세대의 기계폄하 하기가 일어난다. 이전 세대의 기계를 격하하는 담론은 새로운 세대의 기계가 나타난 곳에서는 항상 나타난다. 드럼형 세탁기는 타워형 세탁기에 비해 전기를 절약하고 빨래가 잘 되며 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선전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타워형 세탁기의 후진성을 드러내면서 죄악시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새로 나온 기계가 그 이전 세대의 기계들을 후진적이다, 비효율적이다, 자원의 낭비가 심하다는 이유 등으로 죄악시 한다. 컴퓨터는 이전 세대의 기계인 종이를 폄하하고 그 위에 올라서려 한다. 그러면서 종이는 나쁘다는 온갖 담론들이 나타난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감각적 인상이다. 종이가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환경을 망가트린다는 인식에는 다음과 같은 도식이 숨어 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 종이를 만들려면 나무를 베야 한다 → 나무는 지구의 허파다 → 푸르름은 생명이다 → 나무를 베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 종이는 지구를 망가트린다’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나무를 벤다고 하면 떠오르는 감각적 인상은 턱수염이 난 험악한 산도적 같은 아저씨들이 무식하게 생긴 기계톱으로 푸르른 불쌍한 나무를 학살하듯이 베어내는 이미지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나무도 배추나 쌀처럼 작물로 재배되고 일정량이 수확된다는 것이다. 나무를 베어냄으로써 숲이 마구잡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면적의 나무를 베어내면 일정량의 나무가 계속 자라나는 순환의 구조로 되어 있고, 벌채산업은 그런 사이클을 적절히 조절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 오레곤주나 캐나다의 계획적인 삼림벌채 산업은 무분별하게 밀림을 없애버리는 브라질의 아마존 개발과는 양상이 다르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산업이 지구환경을 파괴하므로 어떤 것이 더 좋고 어떤 것이 더 나쁘다고 말 할 수는 없으나, 나무를 베는 산업은 석유를 캐는 산업과 비슷하거나 나은 수준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지 더 심하게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즉 특별히 종이만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환경보호라는 측면에서 컴퓨터가 종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 종이에 대한 죄악시는 컴퓨터를 보급하기 위한 담론적 받침대일 뿐이다.

물론, 종이라는 기계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종이는 죄악시 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서의 수명을 다하여 박물관이나 도서관으로 퇴장하는 식으로 사라질 것이다. 즉 종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서의 종이’가 사라질 것이다. 하프시코드라는 기계가 사라지고 피아노라는 기계로 대체됐듯이 말이다. 그때 가서 종이라는 기계에 대해 향수를 품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 이영준

기계비평가. 저서로 『사진 이상한 예술』, 『이미지비평』, 『기계비평』, 『사진이론의 상상력』, 『비평의 눈초리』 등이 있으며,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 《FAST Forward》, 《서양식 공간예절》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 계원디자인예술대학의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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