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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이야기꾼, 지식의 정원에 핀 천 송이의 꽃 되기

2013-07-02  

-Playing of the Tricksteresque Storyteller-becoming a thousand blossoms in a garden of knowledge-

 

글/ 사이드 자밀 아메드(Syed Jamil Ahmed, 방글라데시 다카대 연극학과 교수)

번역/ 정수혁

 

이 이론적 작업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1979)>이라는 에세이에서 출발하며, 새로운 시대적 지평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에 있어 아시아 최고의 잠재 역량(potentia)은 이야기하기(storytelling)라는 수행적(performative) 행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 부분에선 이야기꾼과 이야기하기에 대해 벤야민이 정식화한 부분을 인용한다. 둘째 부분에선, ‘트릭스터(trickster)’라는 개념과 ‘놀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용한 내용을 검토해볼 것이다. 여기서 ‘트릭스터’란 포괄적인 설명을 꾀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며 이항대립을 중계할 수 있는 ‘경계선의 적’(Kerényi 1972: 185)으로서의 개념이며, ‘놀이’는 ‘연약하고 덧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최고의 브리콜뢰르(bricoleur)’이자 ‘인류 문화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메타메시지’를 발산하는 삶의 행위에 대한 ‘비실제적인(not-for-real)’ 참여(Turner 1986: 31)로서의 개념이다. 셋째 부분에선 이야기의 전달 과정에서 이야기꾼과 관객-수용자들은 이미-항상 어떤 공생관계에 있다는 점을 보인다. 이 공생관계는 수분 협력(pollination partnership)이라는 이미지로 가장 잘 비유될 수 있는 관계로서, ‘어리광부리는 게으름뱅이들’의 협력이 아니라 ‘지식의 정원’ 내의 꽃과 매개자 또는 매개체의 제휴를 뜻한다.(Nietzsche 2010: ¶ 1) 그리고 다시 이 수분 협력은 이야기의 변형으로서의 전달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수용자들이 탈영토화를 통해 이야기꾼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는, ‘인류를 다시 무에서부터 [...] 새로 시작하게’ 할 ‘새롭고, 긍정적인 개념의 야만주의’(2005a: 732)를 옹호했던 벤야민의 의견과는 궤를 달리하여, <판차탄트라(Panchatantra)>, <자타카(Jātakas)>, <천일야화>, <카타사리트사가라(Kathasaritsagara)>(이야기가 흘러 들어가는 바다(Ocean of the Streams of Story)라는 뜻) 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시아의 스토리텔링 경험은 이야기의 전달 과정에서 천 송이의 꽃 ‘되기(becoming)’를 수반한다는 점을 시사하며, 또한 벤야민이 투쟁하는 대상인 지배적인 다수의 기준과 공리계를 전복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는 점을 밝힐 것이다. 단서를 달자면, 이 글은 ‘세계’가 어떠하다고 주장하려거나 어떤 ‘진리’를 설파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처음부터 밝히고 싶다. 다만 메이(May)(2003: 142)가 들뢰즈와 가타리(1994: 82)를 따라 밝힌 것처럼 ‘흥미롭고, 특별하고, 중요한 무언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점을 창조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실패한 거룩함 가운데 실패를 상대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실패한 신비론자’(Wiesestier 1969: ix) 발터 벤야민은 인지적으로 낯설게 하는 섬뜩할 정도의 능력을 통해 일상적인 것들을 해체한다. 결과적으로, 텍스트화된 벤야민의 우주는 일상생활로부터 미끄러져 버린다. 벤야민의 낯설게 하는 능력은 모든 이야기꾼이 ‘자신의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생각해내는’(98), 하지만 이야기가 멈추어버리면 죽음에 처하게 되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라는 것을 독자가 인식하도록 만든다. 바로 이 임박한 죽음의 순간에 세헤라자데의 삶이 그녀가 자기 자신을 대면해왔던 무의식적인 관점을 펼쳐 보이며, ‘이야기의 구성 재료’, 즉 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세헤라자데의 실제 삶의 경험이 그녀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들로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그녀의 이야기가 ‘전달 가능한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94) 마치 말 그대로 세헤라자데를 통해 죽음에게서 권한과 권위를 빌려오는 것처럼, 아시아의 이야기꾼들은 이 권위를 자신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게 된다. 전달된 이야기가 수용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전통의 연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의 권한과 권위가 ‘바로 이야기의 원천’(94)이기 때문에, 또한 ‘영원은 언제나 죽음에 그 가장 강력한 원천을 두고 있었기’(93) 때문에, ‘전달이란 본질적으로 죽음 이후의 삶, 사람들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Lechte 1994: 205) 즉, 영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내세에 대한 것이다.


천일야화, 술탄에게 이야기하는 세헤라자데

 

벤야민에 따르면(1969b: 84) 이야기가 무한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도록’ 하는 이야기하기라는 수행적 행위의 열쇠는 경험이다. 이 행위에서, 훌륭한 이야기꾼은 두 가지 특권 때문에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자아낼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의 경험’까지 포함해 ‘생애 전체를 되짚을’ 수 있다는 특권이며, 둘째는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드러내는, 그럼으로써 ‘생명의 심지가 부드러운 이야기의 불꽃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는 수행적 행위를 하듯 자기와 타인의 경험을 재연할 수 있는 특권이다. (108-109) 경험이 ‘모든 이야기꾼이 이용하는 원천’(84)이라면, 이야기하기라는 행위는 ‘경험을 교환하는 능력’이다. (83)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전형적으로 벤야민스러운(Benjaminesque) 가역성(reversibility)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가역성은 경험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엮여 있는데, 경험을 원천으로 삼는 이야기하기는 관객-수용자와 경험을 교환하는 행위로서의 이야기하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이 말해준 경험이든, 경험으로부터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빌어온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자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만든다.’(87)
이러한 경험의 가역성이라는 유동적인 기반 위에서 이야기꾼은 가장 특별하고 경이로운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를 짤 수도 있으나, 벤야민이 말하듯(1969b: 89) 최대한의 정확성과 “그곳으로 떨어지는 사물은 이름을 잃어버릴”(발레리(Valéry), 벤야민 1969b: 107에서 재인용) 정도의 신비적인 심연에 대한 예술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이를 행한다. 따라서 이야기꾼은 눈을 통해 관찰하고 먼저 관찰된 것을 마음 속에 또는 영혼 안에 불러냄으로써 이야기하기라는 수행적 행위를 시작하게 된다. 재연된 이야기는 관객-수용자에게 전달되는데 단순히 ‘표현되는 것을 직업적으로 훈련된 제스처를 통해 뒷받침하는’(108) 손짓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방글라데시와 인도 등 아시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말 몸 전체로 ‘직접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떨림, 회전, 선회, 춤, 도약 등을 발명’함으로써 ‘어떤 재현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에서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움직임’(Deleuze 2005: 9)을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움직임은 텅 빈 연극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공간은 기호와 가면으로 가득 차 있으며 또 그것들에 의해 결정되며 이야기꾼은 기호와 가면을 통해 역할을 수행하며 그 역할이 또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11)

벤야민은 ‘성공적인 이야기하기는 정보나 보고서처럼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고 밝힌다.(1969b: 91) 정보나 보고서는 즉각적인 검증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설득력 있고, ‘설명으로 가득하며’,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90)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것은 정보란 어떤 정확한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에 ‘전적으로’ 투항하여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것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90) 하지만 성공적인 이야기하기는 ‘대상을 언젠가 다시 꺼내놓기 위해 이야기꾼의 삶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그럼으로써 전달된 이야기가 ‘스스로 소진되지 않도록’ 한다.(90)
‘의식의 양식으로서 기억이 가장 중요한 형태’임을 주장함으로써(Wiesestier 1969: 4), 벤야민은 ‘전통의 연쇄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억이며, 이야기를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는 것 또한 역시 기억이라고 주장한다.(1969b: 98) ‘따라서 이야기와 기억은 뉴스와 망각에 상응하는 것이다.’(Lechte 1994: 205) 가장 효과적으로 수용자-관객의 ‘기억에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벤야민의 주장(1969b: 91)에 따르면 ‘정신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 간소한 긴밀성’이다. ‘이야기를 반복하는 기술’로서의 이야기하기는 관객-수용자가 ‘이야기된 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흥미에 이끌려’(97) 그 이야기를 심층적인 동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으로 통합할 때 가장 성공적이며, 이는 또한 구연된 이야기 자체를 영원히 변형시키게 된다.

 

이야기꾼의 트릭스터적인 놀이

벤야민은 역사 전체를 망라하는 두 가지 전형적인 이야기꾼의 모습을 도출해낸다. ‘내부자(insider)’와 ‘외부자(outsider)’의 이항 대립이 그것이다. 내부자는 가정에 머무는 자를 뜻하며, 흙을 갈고 살아가는 정주민 농부, 농노, 장인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외부자는 세계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자로, 상선 항해사, 떠돌이 자유 직공(journeyman) 등으로 나타난다.(84-85) 물론, 벤야민이 실존하는 이야기꾼들을 두 가지 전형 중 하나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실재하는 이야기꾼들은 이항 대립 사이의 이도 저도 아닌 중간적 공간에서 표면적으로 해소되는 두 대립쌍 사이의 긴장을 생성함으로써 활동할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꾼의 한 가지 전형은 두 전형 모두를 그려낼 수 있는 자들에게서만 완전히 실체화되기 때문’이다.(84) 따라서, 경험에 원천을 두며 경험을 교환하는 행위를 이끌어내는 이야기하기란,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인 자들의 중간 지대를 점유함으로써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해소할 수 있는 이야기꾼에 의해서 가장 능숙하게 실행될 수 있는 연행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트릭스터의 애매하고 경계영역적(liminal) 속성에 근접하고 있다. 트릭스터는 ‘경계선의 적’(Kerényi 1972: 185)이며 ‘경계 위에, 갈림길에, 다른 세계들 사이의 틈새에 편재하는 둔갑술사’(Smith 1999: 1)로서, 포괄적인 설명을 꾀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며 이항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화학에서 트릭스터란 갈가마귀,코요테,뱀 등으로 자주 등장하여 신화구조를 지역과 시간마다 다르게 변형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기에 종종 현대의 ‘예술가’로 비유되기도 한다.

 

분명 이야기꾼은 특히 빼어난 트릭스터는 아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에세이를 ‘이야기꾼이란 그 안에서 정의로운 자[원문대로]가 자기 자신을 마주치게 되는 인물형이다.’라고 맺고 있기 때문이다.(1969b: 109) 13세기의 룸 술탄국 즉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수피교 풍자가 나스레딘 호자(Nasreddīn Hodja), 16세기 무굴 제국 아크바르 황제의 궁정 광대 라자 버발(Raja Birbal), 18세기 서벵갈의 크리슈나 나가 지역의 마하라지 크리슈나 찬드라의 전설적인 궁정 광대 고팔 반드(Gopal Bhand) 등 아시아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스승과 현자의 반열에 합류’하였으며(108), 동시에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낯선 것으로 인식되는 불편한 충고를 할 때 ‘가정’이나 ‘세계’ 중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불확정한 중간지대를 점유함으로써 트릭스터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나스레딘 호자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운명에 대한 설교를 해달라는 초대를 받고, 나스레딘은 단상에 올라 그곳에 모인 신도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신도들이 그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모른다고 대답하자, 나스레딘은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자리를 뜬다. 다음 주에 신도들이 나스레딘을 다시 청하자 단상에 오른 그는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좀 더 현명해진 신도들이 안다고 대답한다. 나스레딘은 자신이 할 이야기를 신도들이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하는 것이 소용이 없다며 다시 그곳을 떠난다. 신도들은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한다. 일전의 경험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신도들의 반은 안다고, 나머지 반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스레딘은 또 다시 자리를 뜨며, 안다고 대답한 신도들 반이 나머지 반에게 이야기해주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꾼은 나스레딘 호자를 통해 자신의 트릭스터적 속성을 발휘하여 신자와 불신자라는 종교적 범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종교의 인위성 자체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야기꾼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은 모든 사회 또는 정치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고’,(Smith 1999: 14)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정체성, 공동체의 정체성의 기본 토대 그 자체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Wiget 1990: 94)

이야기꾼의 트릭스터적인 속성은 <카타사리트사가라(소마데바, 11세기)>에 담겨 있는 <베탈라의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Vetāla Panchavimshati)>에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어느 위선적인 고행자가 정의로운 왕 트리비크라마세나가 화장터에서 베탈라(시체에 씌는 귀신의 일종)를 잡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왕은 약속을 지키려 시도하고, 베탈라는 트릭스터로 가장하여 왕에게 각각 하나의 수수께끼로 끝나는 스물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베탈라는 왕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면서도 답하지 않으면 왕의 머리가 수백 조각으로 깨지게 된다는 조건을 건다. 그런데 베탈라가 말하지 않은 것은 왕은 베탈라를 운반하는 동안 침묵을 지켜야만 그 귀신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은 스물세 번 수수께끼의 답을 말하는데, 자신의 지혜로 답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 때마다 베탈라는 달아난다. 스물네 번째 이야기가 끝나고, 베탈라는 한 남자가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와 그 남자의 아들이 그 여자의 어머니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 수수께끼를 낸다.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었던 왕은 답을 말하지 못한다. 이 실패 때문에 왕은 이 화장터 귀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것은 베탈라였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대신, 베탈라는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를 통해 왕에게 예의 위선적인 고행자를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조언에 따라 왕은 고행자를 속여 목을 벰으로써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며 이야기꾼인 베탈라를 해방시켜준다. <베탈라의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트릭스터적 속성을 지닌 이야기꾼은 또한 ‘서사 구조에 에너지, 유머, 다가성(polyvalence)을 불어넣으며 서사 형태 그 자체 내에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서브텍스트를 생산’하는 ‘수사적 행위자’로서 기능한다.(Smith 1999: 2) <베탈라의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의 급진적 서브텍스트란, 행정관의 고결함은 그가 일상생활을 수행하며 트릭스터적인 ‘놀이’를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스스로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세헤라자데나 베탈라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트릭스터적인 이야기꾼의 작용은 두 개의 액자형 장치를 염두에 두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 둘은 첫째, 세헤라자데나 베탈라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과 둘째, 이야기하기라는 수행적 행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한 메타커뮤니케이션적 메시지 또는 메타메시지(여기서 ‘메타’란 ‘사이에 있으면서 동시에 너머에 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Turner 1986: 31))로서,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행위들은 그 행위들이 뜻하는 행위들이 보통 뜻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꾼은 ‘이것은 놀이다’라고 암묵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야기를 액자 속에 넣는다. (Bateson 2006: 317) 첫째 액자 구조는 몇몇 이야기에 특정한 것이지만,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 것이다. ‘놀이’란, 벤야민이 말한 이야기하기와 매우 유사하게도 ‘경험의 모든 면, 내면의 환경과 외부의 환경 모두에서 소재를 끌어오며’ 또 이야기하기와는 매우 다르게 ‘도구적 효용이 없으며’, ‘그림자 전사 또는 카게무샤’처럼 작용한다.(Turner 1986: 32) 터너의 논리(1986:32)를 확장하면, 이야기하기와 놀이 모두의 ‘형용모순적 스타일’은 ‘위험한 무해함’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양쪽 모두 공포를 모르기 때문이다. ‘놀이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아무데에도 없을 수 있으며, 무엇이든 흉내내면서도 그 무엇도 닮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놀이는 ‘경계영역적이거나 유사경계영역적(liminoid)인 양식이고, 본질적으로 틈입적이며, 모든 표준 분류상의 결절점들 사이의 이도 저도 아닌 장소에 위치하고, 본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꾼이 벌이는 트릭스터적인 놀이는 ‘자연의 날도래집이나 까치집과 같이, 연약하고 덧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최고의 브리콜뢰르’라고 할 수 있다.(Turner 1986:31) 벤야민의 파괴적 성격처럼, 트릭스터적인 이야기꾼은 ‘어떤 것도 영속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벽이나 산을 마주치는 곳에서, 모든 곳에서 길을 본다. [...] 모든 곳에서 길을 보기 때문에, 그는 갈림길에 서 있다.’(2005b: 542)

 

 

 

천 송이의 꽃 되기

죽음으로부터 권한과 권위를 부여 받아 자신의 전 생애를 상연하는 수행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놀이하는 트릭스터적 이야기꾼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마치 벤야민이 말하듯(1969b: 102) ‘아래로는 지구의 내부로까지 뻗어 있으며, 모든 개별적 경험의 가장 심오한 충격인 죽음마저도 장애나 장벽이 되지 않는 집단적 경험의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의 가로대 오르내리기’ 하듯 움직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즉 ‘실재’의 잘못된 인식으로서가 아니라 릴라(lila) 혹은 장난스러운 재구축과 ‘유쾌한 오독’으로서 구축된, 그 내부에서 의미가 끝없이 유예되는 마야(maya) 혹은 ‘환영(illusion)’ 속에서,(Leicht 1983, 59) 이야기는 ‘불확정(즉 ‘이루어질 수 있거나 이루어져야 하는’ 소망, 가능성)’의 브리콜라주(bricolage) 혹은 터부, 경계영역적인 것, 위험한 것을 잠깐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반사적 도구로서 부상하게 된다.
이야기의 전달이 ‘근본적으로 죽음 이후의 삶, 사람들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야기꾼이 수용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은 새, 박쥐, 벌, 나비, 딱정벌레, 소형 포유류 등의 매개자 또는 매개체들이 꽃가루를 한 꽃의 수술에서 다른 꽃의 암술로 옮겨서 수분을 이루도록 하는 수분 과정에 가장 적절하게 비유될 수 있다. 수분 과정은 ‘비행 궤도의 조작’을 통해 ‘[매개자가] 영토를 떠나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Deleuze and Guattari 1987: 508) 트릭스터적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가지고 놀이하는 행위를 통해 수분 매개자처럼 자기 자신을 탈영토화하며, 그럼으로써 인간 인식을 정연하고 단일한 의미로 범주화하려고 시도하는 ‘의미 및 주체화의 중심, 조직화된 기억 등의 중심적 자동 기계’(Deleuze and Guattari 1987: 16)를 갖춘 수목 체계의 경직성과 위계질서를 벗어나게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 이야기하기란 ‘경험을 교환할 수 있는 능력’(Benjamin 1969b: 83)이기 때문에, 수분 매개자로서의 이야기꾼은 자기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의 경험’을 포함하여 ‘온 생애를 되짚어보며’ 경험이라는 꽃가루를 교환한다. 수분 매개자와 꽃의 만남이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을 때는,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수분에 의해 열매가 열리듯 기억을 생성하게 될 때는, 바로 이 만남이 ‘정서적 색조의 영역, 즉 경이, 사랑, 미움, 고통 등으로 파악될 때’, 이 만남이 ‘인식과는 반대로’ ‘오직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영혼을 움직일 때’이다.(Deleuze 2005: 176)

만약 수용자에게 수분이 이루어졌다면, 즉 들은 이야기를 간직하는 데에 흥미를 갖고(97) 이를 이완 상태에서 자신의 기억에 담아두게 된다면,(Benjamin 1969b: 91) 그리고 ‘정신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 간소한 긴밀성’을 갖춘 이 이야기가 수용자의 경험의 일부로 통합된다면,(91) 수용자 또한 지구의 내부와도 같은 자기 정신의 거울 속에서 유희하며 무한한 상상력의 하늘을 구름처럼 오갈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게 된다. 벤야민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역사> 3권 14장에서 ‘그리스인의 최초의 이야기꾼’인 헤로도토스가 들려주는 이집트 왕 삼메티쿠스(Psammenitus)의 이야기(89)가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경이와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90) 마치 ‘여러 세기 동안 보관된 곡물의 낱알이 [...]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으면서도’ 수 세기가 지나도 ‘발아하는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는 ‘그 힘을 보존하고 집중하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 힘을 발산할 수 있다.’(90)

기억이 그것을 간직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수용자 안에서 살아있을 때, 다시 기억으로 인해 수용자 혹은 꽃이 탈영토화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꾼 혹은 수분 매개자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과거를 떠나 현재로 탈영토화하고,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어 ‘전통의 연쇄’ 속에서 천 송이의 꽃이 필 수 있게 된다. 전달은 ‘사람들의 ‘내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의 변형과 재생이 아니라면 내세라 부를 수 없었을 내세’이기 때문에, 가설상의 ‘원본’은 필연적으로 ‘변형을 거치게’ 된다.(Benjamin 1969c: 73). ‘되기’가 ‘선이 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움직임’(Deleuze and Guattari 1987: 294)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시간 속에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의 차이의 펼쳐짐’(May 2003: 147)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야기가 이야기될 때마다 이야기의 변형 혹은 이야기의 ‘생성(becoming)’은 필연적이다. 이야기하기가 경험에 그 원천을 두며 경험을 교환하는 행위로서의 이야기하기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 경험이 이야기하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듀이를 따르자면 경험이야말로 ‘생명체와 그 주변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복잡한 일련의 대화(transactions)’(Kennedy 1959: 802)이기 때문에, 존재 경험의 필사본으로서의 이야기는 절대 고정된 형태로 봉인될 수 없다. 그것은 ‘‘되기’를 넘어선 곳에 존재는 없으며, 다양체(multiplicity) 너머에도 아무것도 없고, 되기도 다양체도 외양이나 환영이 아니‘며, ’되기는 존재의 긍정‘이기 때문이다.(Deleuze 1983: 23-24)

수용자가 탈영토화하여 이야기꾼이 되는 ‘전통의 연쇄’에 의한 이야기의 변형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는 <천일야화>이다. 노리스(Norris, 1983), 보스워스(Bosworth, 1983), 리트만(Littmann, 1960)과 애버트(Abbott, 1949)가 보여준 바대로, <천일야화>에 엮여 있는 이야기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라비아 지역에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구전 서사 전통과 이슬람 이전 시대의 페르시아에서 구전을 통해 내려온 일체의 산문 오락 문학으로부터 전달된 것들이다. 정복을 통해 이슬람 세계의 경계가 확장되고 다민족 사회를 흡수함에 따라, 아프리카 및 아시아 민담의 흡수, 변형, 재전달 과정이 시작되어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16세기 초에는 기존의 이야기들이 반 십자군 전쟁의 영웅적 이야기, 페르시아 및 이라크 지역의 다른 이야기, 몽골인들에 의해 극동에서 유래한 이야기들과 동화되었다. 이 전통은 그 후 유럽으로 옮겨가 앙투앙 갈랑(Antoine Galland, 1704-1717)에 의해 변형되며 또한 전달되었고, 이후 다시 에두아르 고티에(Edouard Gauttier, 1822-1825), J. C. 마드러스(J.-C. Mardrus, 1899-1904),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Edward William Lane, 1838-1840), 존 페인(John Payne, 1882-1884),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Richard Francis Burton, 1885-1888)을 비롯한 수많은 다른 이야기꾼들에 의해 변형되었다. 그 이후로 <천일야화>는 연극, 오페라, 영화(실사 및 애니메이션 모두), 음악,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컴퓨터 게임으로 수없이 전달되고 변형되어 왔다.

그와 유사한 변형으로서의 전달 과정을 통하는 동안, <판차탄트라(비슈누 샤르마(Vishnu Sharma), 기원전 3세기)>와 <자타카(석가모니, 기원전 4세기)>, <카타사리트사가라>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 모음들은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비롯하고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사본이었던 적이 없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야기꾼이 된 수용자들이 스스로의 흔적과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의 흔적을 간직한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게 됨에 따라, 이야기꾼의 흔적은 ‘도공의 지문이 점토 그릇에 남는 것처럼 이야기에’ 남게 되었다.(Benjamin 1969b: 91-92) 그러므로 이야기의 각각의 판본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언제나 복잡한 재사본(palimpsest)일 수밖에 없으며, 이야기되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필연적으로 ‘자기 스스로와 다른 것의 반복’(Roff 2005)일 수밖에 없다. 이 반복은 앙리 베르그송이 말하는 비공간적인 혼종적 흐름으로서의 ‘시간’ 혹은 ‘지속’ 개념(12)을 뒤따른 것으로, 되기로서의 반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잘못 인용된 마오쩌둥의 ‘천 송이 꽃’과 이름 없는 아랍 무역상들의 ‘천 일의 밤’에서, ‘천’이란 숫자는 같은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마다 차이 스스로와 달라지는 차이’, 정체성을 넘어선 무수한 차이로서 반복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생성될(become) 뿐이며 절대 존재하지(be) 않기’ 때문이다.(Roff 2005) 모든 이야기꾼은 각각 서로 다르고, 이야기의 수용자도 각각 서로 다르다. 이야기가 화분 매개자와 꽃들의 놀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짐에 따라, 이야기는 이야기꾼으로 변모하는 수용자들에 의해 되풀이되며 이 각각의 반복은 자기 스스로와 다른 것의 반복이다. 차이는 반복에 내재하기 때문이다.(Deleuze 2005: 97)

 

지식의 정원 내의 이야기꾼

<경험과 빈곤>에서 벤야민은(2005a: 732) ‘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빈곤이 인류에게 닥쳐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의 빈곤이 아닌 일반적 인간 경험의 빈곤으로서의 경험의 빈곤’으로, ‘기술은 인류 문화를 경험으로부터 유리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인류가 ‘다시 무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도록’ 강제할 ‘새롭고 긍정적인 개념의 야만주의’를 도입한다.(732) 근대성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력 넘치는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 비평은 유럽중심주의의 상당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며, 아시아의 경험은 명확히 그의 강력한 논의에 배치되는 것을 주장한다. <판차탄트라>, <자타카>, <천일야화>, <카타사리트사가라>를 비롯해 수많은 ‘전통의 연쇄’가 여전히 살아 숨쉬며, 입에서 입으로 매번 다시 전달될 때마다 변형되며 이야기꾼에서 청중에게, 세대에서 세대로 끝없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촉진하는 시뮬라크르와 하이퍼리얼리티로 범람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아시아의 잠재 역량(즉 실현할 수 있지만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잠재된 것)을 모색하는 데 있어 벤야민의 이야기하기 개념이 하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고찰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하기라는 행위는 그저 좌우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을 살피며 ‘미약한 자가 먼 길을 가도록, 미약하게 시작하여 계속해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Benjamin 2005a: 732)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야기꾼의 이야기하기 행위는 신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이슬람주의, 힌두민족주의(Hindutva)를 비롯해 여러 지배 다수의 규범에서 비롯한 질량 구조에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지식의 정원’에서의 이야기하기가 선함, 신, 절대적인 것 등의 안정적 단일성을 추구하는 지배 다수의 규범과 나무 형태의 체계에 기초를 두게 된다면, 화분 매개자들은 인간 지각을 정연하고 단일한 의미와 지배 다수의 공리계로 범주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삶을 재영토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야기꾼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새 지배 다수의 수사에 의해 제기된 불변의 원칙이나 추상적인 기준 또는 범주적 체계를 옹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한 원칙이나 체계는 오직 ‘지식의 정원’을 ‘지배적 정치권력의 이해와 상통하며 또한 그 이해에 맞게 수정될 수 있는 분절적이고 위계적이고 서술적인 의미와 의도 및 욕망’에 부합하도록 관리하기 위해 기능할 것이다.(Finn 1992: 113)

‘지식의 정원’ 내의 이야기꾼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존재’란 언제나 ‘그 뒤에 어떤 다른 현실도 없는 현실’ 속에 놓여 있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라도 우연적이고 변화하는 구체적인 세계는 항상 그리고 이미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May 2003: 143) ‘현실’은 언제나, 우리가 그 안에서 현실을 표현하고 그 안에 가둬두려고 하는 이념적인 생각의 범주를 초월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우리를 이름 짓고 구분하는 범주들보다 크며 동시에 그보다 작기’ 때문이다.(Finn 1992: 113) 우리는 언제나 여자, 남자, 이슬람교도, 힌두교, 방글라데시인, 한국인, 탈레반, 미국인, 독일인, 프롤레타리아, 자본가... 그 이상이며 또 그 이하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이며 동시에 그 이하이다.(Finn 1992: 113-114) 우리는 언제나 생성의 과정 속에 잠겨있으며, 언제나 변화의 노정 위에 있고, 언제나 공동체의 범주를 이루는 이런 저런 공리들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잔여물을 남기며 (삶은 의미 이상의 말을 내놓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범주들도 잔여물을 남긴다. (범주는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Finn 1992: 114) 따라서, 우리는 안정적 단일성에 도달하기에는 영원히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를 것이며, 항상 그것을 추구하지만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이나 원칙 또는 체계는 지배 다수의 공리계와 수사가 끊임없이 우리를 관리하고 가두려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현재화되지 않으며, 또한 지배 다수의 규범을 현재화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조직화하며 숨기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조직화하기’(Finn 1992: 115) 때문이다.

‘지식의 정원’이 천 송이의 꽃이 피는 정원이 ‘되기’ 위해서는, 정원 자체가 유목민적인 ‘기관 없는 신체’(1987: 150, 380)에 관한 ‘상반된 꿈’(Deleuze and Guattari 1986: 27)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기관 없는 신체’가 경계와 금기의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운동성의 ‘매끄러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479) 그때야 비로소 트릭스터적 이야기꾼들이 관객들에게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과학의 일이다) 그것을 통해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점을 창조하기 위해’ 놀이로서의 이야기하기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관객을 ‘흥미롭고, 특별하고, 중요한’ 무언가에 참여시킴으로써(May 2003: 142), 그리고 ‘사물과 존재에서 사건을 끌어내고, 항상 그것들에 새로운 공간, 시간, 물질, 사고, 가능성을 사건으로서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Deleuze and Guattari: 1994: 33)

트릭스터적 이야기꾼들은 ‘차이 그 자체’와 ‘반복 그 자체’가 비가시화되고 일반성, 안정적 단일체, 동일성의 순혈적 단일 품종 재배에 포섭되는 위험한 영토를 끊임없이 가로질러야 한다. 그들 이야기꾼들은 이 차이와 반복이 ‘‘뿌리’가 아니라 ‘경로’와 관련되는’(McCrone 1998:34), ‘존재가 아니라 생성의 과정’(Hall 1996: 4)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방법들과 수단들을 고안해야 한다. 그리고 ‘차이 그 자체와 반복 그 자체’를 탈영토화를 이끌어내는 무한한 비행의 궤적으로써 설명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시행착오를 거쳐 노력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야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가 ‘머무르며, 죽은 자를 깨우고, 진보라는 이름의 폭풍에 파괴당한 것을 온전하게 만드는’ 지루한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Benjamin 1969a: 257-258

 


 

자밀 아메드 (Syed Jamil Ahmed )

다카대 연극학과의 설립자이자 교수인 자밀 아메드는 영국 워빅대에서 연극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다카대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네팔과 독일 등지에서 연극에 관한 다수의 워크숍을 개최하였다. 그의 주요 연구 관심분야는 남아시아의 토착 연극(Indigenous Theatre)과 응용 연극(Applied Theater)이다. Selim al-Deen의 The Wheel 을 비롯하여 20개 이상의 연극을 감독하였다.
 
 
 
*이글은 2013 아시아문화전당 국제 콘퍼런스 <지식의 야생정원 -새로운 사회를 위한 아시아 문화의 가능성>에서 발표된 원문을 그대로 옮겼으며, 삽입된 그림들은 PODO 의 편집부에서 임의로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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