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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 백남준 광시곡, 파격으로부터 파격하는 파격

2010-02-17  

2009년 11월 28일, 안은미가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백남준아트센터. 신랑은 백남준.
백남준 예술상 수상자로 결정된 안은미가 '백남준'이라는 이름의 상을 받는 김에 아예 백남준까지 챙겨 간 것이다. 두 사람의 '영적인 결합'을 이루는 판에 빠트릴 수 없는 식순이 있다면? 누군가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 백남준이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공연 중 느닷없이 객석에 앉아 있던 자신의 '영적' 지주 존 케이지(John Cage)의 남근을, 아니 넥타이를 자른 악명 높은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다. 신랑의 50년 전 행위를 행함으로써 새색시는 신랑의 혼을 부르는 영매의 역할까지 맡는 셈이다. 그런데 넥타이는 타인의 목에 걸려 있지 않고, 신부의 드레스에 달려 있다. 주체들의 현란한 자리 이동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징들이 충돌하는 무녀의 아랫도리에서 귀결된 것이다. 게다가 넥타이는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다.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 치맛자락에 주렁주렁 달렸다. 마치 자신이 먹어치운 징표로 사오정이 몸에 매달고 있는 무수한 인간 희생자의 해골들처럼, 상징성을 거세당한 넥타이들이 개체성을 잃고 장식적 패턴의 일부로 전락하여 전람됐다. 주위에 몰려든 동네 아이들에게 엿 조각을 뿌리는 엿장수라도 되는 듯, 불손하고도 관대한 신부는 가위로 자신이 지닌 남성적 상징을 아낌없이 절단하여 관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 결혼식은 적어도 더 이상 가부장제도의 명맥을 연장하는 제의는 아닌 것이다.

결국 백남준의 사디즘적 행위는 행위자의 신체로 귀환, 자기애적이고도 마조히즘적인 단상으로 전환된다. (마조히즘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된 공격성이 내면으로 내사되는 현상이 곧 마조히즘이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뿐 만 아니라, 타성과 권위를 훼손하는 백남준식의 공격적 전복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후한 '베풀기'의 제스처로 승화된다. 유아적 박해가 유희적인 박애로 대체된다. 축하객의 역할을 맡았던 관람객은 존 케이지와 백남준과 안은미의 아우라를 하나로 압축한 넥타이 조각을 기념품으로 챙긴다. 잘린 넥타이 조각은 관객의 품에서 하나의 질문이 되어 꿈틀댄다. 백남준의 행위는 그의 '모국'인 한국에서 오늘날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백남준은, 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는, 무엇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잘린 넥타이 조각들이 축적시키는 가장 큰 의미의 파격이 있다면, 육중한 역사적, 미학적 상징성의 총체적인 와해일 것이다. 결국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료 급식 같은 헤픈 '베풀기'를 계속함으로써 안은미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즉흥적인 놀이로 풀어 헤친다. 불온함의 진중한 무게를 사소한 가벼움으로 변환한다. 과거 속의 묵직한 상징성은 '지금' 속의 즉각적인 공허함이 되어 허공으로 승천한다.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행위(action)'는 '몸짓(gesture)'이 되어 날개짓 한다. 인류애와 구원의 메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은미의 간단한 도치는 분명 타자의 정치학에 귀속된 모더니즘의 고질적인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유연한 초월성을 머금는다. 만약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의 기반에 깔린 문화적 타자로서의 동양 사상에 대한 낭만적 침잠에 동조한 백남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냉소적 성찰과 모성적 포용을 함께 보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몸짓이 되지 않을까. '신딸'의 퍼포먼스가 (작두처럼) 예리하면서도 (방울춤처럼) 경쾌한 이유는 이와 같은 양면적 기능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안은미의 몸짓은 백남준의 풀리지 않은 한을 시원히 날려주는 살풀이춤이기도 하다. 백남준을 얽매던 남성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자가 있다면, 가부장적 모더니즘의 역사적 콤플렉스를 해소시켜주는 역할이 가능하다면, 그에 어울리는 호칭이야말로 '영적 아내'가 아니겠는가. 안은미의 '결혼 놀이'는 여성적, 이국적 타자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모더니즘의 장애적 위상에 대한 조롱이자 치유이며, 너그러운 동참이기도 한 셈이다.

파격을 흉내 내는 파격에 ‘마무리’가 있을 수 있다면, 희생 제의가 될 것이다. 희생될 제물은 물론 백남준의 경력에서 찾을 만하다. 피아노다. 1958년 백남준이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연주하던 중 피아노선을 끊고 뒤로 넘어트린 것처럼,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오프닝에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입구에 놓여 있던 피아노를 망치와 도끼로 부숴버린 것처럼, (백남준 자신의 표현대로) "극도의 전자적인 충격"을 연출하는 것이다. 안은미는 피아노에 대한 백남준/보이스의 배타적 폭력성을 한 차원 높인다. 무려 20여 미터나 높인다. 나머지는 중력에 맡긴다. 기중기에 매달아 놓고 끈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타성을 타격하고 예술을 개혁하기 위해 “눈먼 악기를 무대 위에서 깨트려 버리라”고 했던 트리스탄 자라(Tristan Tzara)의 외침은 다시 한 번 허공에 공명한다. 기중기에 매달려 있던 피아노는 역시 기중기에 매달려 공중에서 도끼와 가위를 휘두르는 안은미에 의해 보도블록 위로 곤두박질 쳐진다. 수백 명 관객들의 귀와 눈은, 하나의 둔탁하기 이를 데 없는 굉음, 그것의 발원지인 한 평 남짓한 낙하지점으로 집약된다. 땅과 충돌하는 피아노의 괴력은 파장을 일으키며 대기로 확산함과 동시에, 산재되었던 마당의 에너지를 하나의 시공간적 일체감으로 응집시킨다.

감각에 대한 공격은 상징적이면서도 즉물적이다. 즉물적이기에 그 상징성은 더욱 크게 공명한다. 타성에 대한 보이스의 도끼질이 기표에 대한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전'이었다면, 안은미의 가위질은 기표의 탯줄을 끊는 모성적 확장에 가깝다고나 할까. 더 이상 모더니즘의 충격을 가꿀 수 없는 오늘날의 제도화된 미술에서 그나마 성립될 수 있는 파격이 있다면, 역사에 대한, 역사에 의한, 역사의, 둔탁한 마주침이 아닐까. 백남준아트센터의 김남수 학예실장이 지적하듯, 백남준아트센터 건물의 겉모습은 피아노를 닮았다. 어쩌면 피아노의 희생은 백남준을 해방시키는 제의였을 지도 모른다. 박제된 아방가르드의 모순적인 제도적 위상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역시 모순적인 자기 냉소가 아니겠는가. 박물관화된 '신화'가 추락한 피아노처럼 산산조각난다면 백남준의 해맑은 웃음은 비로소 창창하게 온 세상에 퍼질 게 아닌가.


서현석은 현재 영상과 관련된 연구와 퍼포먼스 창작을 하고 있으며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비디오아트 전공으로 M.F.A.,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하며「지루함의 충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방송 영화 전공 교수이다. 2006년도에는 광주 비엔날레 열린비엔날레 참여 프로젝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페스티벌봄 등 여러 공연연출에도 참여하였다. 책으로는「미국 신보수주의와 대중문화 읽기: 람보에서 마이클 조든까지」 (2007, 공저) 등이 있으며, "초기 비디오 아트에 나카나는 지루함과 마저히즘에 관해"를 비롯하여 영화와 전신분석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창작 활등으로는 영상 설치 개인전 「실종」(2004), 연극「FAT SHOW: 영혼의 삼겹살」(2008) 등이 있다. 최근에는 「괴물 아버지 프로이트: 황금박쥐/요괴인간」을 창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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