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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와 잠수함

2010-11-02  

글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1. 수수깡으로 모형 만들기

 누가 누군가에게 '지휘부여 각성하라'라는 말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확히 그것이 궁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궁금했던 이유가 왠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던 것 같다. 움직이는 그림들로, 이미 존재하는 작가들의 미묘한 함성으로,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단서의 어딘가에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문장의 봉인된 봉투를 깜짝 놀랄 만큼 잽싸게는 아니더라도 살짝 열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문장에 대해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었더라면 나는 이 문장에 말을 걸겠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장을 들고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 문장 너무 웃기지 않아요? 누가 지휘부인지도 모르겠고 각성하라는 동사를 사용했을 때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알겠지만, 음 이 말을 누가 새겨들을까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누가 지휘부인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은 분명 이 문장을 은유 섞인 코미디로 만들어버리는 태도였다. 이 문장을 쓴 자가 얼마나 절실하게 이 문장을 뱉어냈다는 사실은 뒤로 외면한 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 우리 모두가 자기 안에 나름의 강박적인 지휘부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이 문장을 어느 한 명의 철지난 외침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삼기, 또 웃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좀 더 살아있는 문장이자 유효한 슬로건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누가 지휘부인지, 내가 나의 지휘부인지 직장 상사나 어른들이 지휘부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각성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에서 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개인'들의 존재 방식을 떠올렸다. 지휘부가 있어서 그의 직간접적인 명령을 받아야 하지만 온전히 거부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그래서 지휘부가 각성하고 자성하기를 바라는 그 안달 난 마음. 지휘부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마음이 크고 작은 힘들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작고 낮은 개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오죽하면 '지휘부여 각성하라' 라고 숱하게 문장을 올렸을까.
 전시를 시작하면서 나는 또 이렇게 적었다. 전시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2009년 겨울 한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으로 쓰였던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했다고. 굵은 타이포그래피로 나타난 ‘지휘부는 각성하라’는 한 경찰서 직원이 상부에 던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문장에는 오늘날 개인의 존재 조건에 대한 도발적인 은유와 벼랑 끝에 선 반항이 담겨있다고 작가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감흥을 더했다. 문장 자체가 전시를 끌고 온 유일무이한 힘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장에 대해 전시는 어떤 식으로든 다양한 거리에서 관계를 맺으며 반응했다는 점이다.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외침은 수없이 폭죽을 터트리는 광고 카피들에 비하면 철 지나고 녹슨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이후 이 문장을 인터넷에 올린 양 아무개 경사는 경찰직에서 파면되었다. 말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사람의 자리를 이렇게까지 쥐고 흔든다. 홈쇼핑 채널에서 내뱉는 생명보험 광고의 전화번호는 구구단처럼 강력하게 뇌에 각인되지만 누구도 어떤 개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마치 수수깡으로 수없이 많은 모형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사람에게, 누구도 쉽게 '진짜 실물도 이렇게네요!' 라고 동조의 목소리를 보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2. 지하 실험실, 관제탑

"1조부터 6조까지 5∼6명씩, 7조는 30명 정도가 꾸려져 총 60명 정도였다. 8조, 9조 등도 조직됐다고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각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않고, 별명을 썼다. 믿음 하나만으로 총을 든 군사조직이 된 것이다. 이들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계엄군 동향 파악과 정찰에서부터 긴급환자 구조까지 나섰다. 광주 시민에게 이미 계엄군은 ‘적’이었고,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도청에 있는 ‘누군가’였다. 전화가 와요. 계엄군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워서 병원에 못 가겠다고. 그러면 우리가 실으러 가서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도 했어요.(1조 운전병 ‘시계’ 양동남) 이들은 이른바 ‘각성된 잡색 부대’였다."
한겨레 21, 하어영 기자, '잊혀진 시민군, 도청 기동타격대' [2010.05.21 제811호]

 전시의 제목을 '지휘부여 각성하라'로 끌고 오면서 나는 전시가 상명하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해 하나의 공통된 바리케이드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장면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현실 속의 우연들처럼, 전시라는 시공간도 준비 과정의 현실에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반응할 것이라고 또 돌출된 우연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대에 가까웠다. 방치라기보다 자발적으로 열어놓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기대랄까. 전시로 몸의 형태를 바꾼 '지휘부여 각성하라'가 어떤 단일한 주제나 작업의 공통요소로 운동하지 않기를 바랐고 어떤 재미난 운동회의 출발점이 되어준다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대신 전시가 지금 이 현실의 코미디와 슬로건 사이의 아이러니에 주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머리말을 적었다. 그리고 이 전시가 누가 누군가의 온전한 지휘부가 될 수 없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고 하나씩 결을 만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위에 인용된 기사처럼 새로운 글들도 읽었다. 실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별명만으로 서로를 부르던 기동타격대, 지휘부도 없고 공식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누군가'들을 떠올리던 중 네덜란드에서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디자이너 김영나의 '광주 5.18 민주화항쟁'에 대한 작업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또 동시에 전시의 과정을 가벼운 세미나처럼 보여줄 수 있는 매체를 생각하다가 2006년부터 만들고 있는 잡지 워킹매거진(www.walking-magazine.com)의 에디터들과 전시에 대한 단행본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지휘부여 각성하라'의 전시 모양은 점점 포도송이처럼 커졌고 하나로 잡히지 않는 반가운 이상함도 생겨났다.
 가장 먼저 '지휘부여 각성하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남화연 작가였지만 가장 먼저 전시를 위한 새 작업을 만들어준 것은 주재환 작가였다. 이 구체적이고 신랄한 문장에 대한 이야기와 전시 이야기를 꺼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주재환 작가는 알맹이를 쏙 빼어먹고 온전히 살아있는 지휘부에 대한 작업을 보여주었다.「이 알맹이도 그자들이 빼먹었을까」 "남북한의 지휘부는 온전하잖아. 지휘부들은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온갖 방패를 다 갖고 있잖아. 지휘부들이 알맹이를 빼먹고 나서 남은 건 이 노랗고 빨간 고름이야." 엉망진창, 오락가락한 현실에서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외침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남아있는 뼈대(캔버스 틀)를 보며 떠올렸고 전시장 밖 유리창에서도 보이는 곳에 이 작품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 또는 기획자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책에서 일종의 지휘부 역할을 하는 서문을 떠올리며 전시에서 서문 역할을 하는 뭘까 묻고 싶었다. 서문이 존재하지만 세상의 무수히 많은 책들이 서문에서 보여준 호언장담에 비해서 결국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 간다는 사실에 매력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시를 통해서 나는 작업의 주인인 작가조차 마치 책과 서문의 미묘한 관계처럼, 작업의 흔들림 없는 지휘부일 수만은 없는 불확정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양 아무개 경사가 현실의 경찰 지휘부에 대해 질문했다면, 그 질문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며 작업 안의 지휘자는 누구인가를 실험했던 작업들을 전시장에 초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전시장 1층에는 홍성민의 공연 실황 「줄리엣 Juliettttt」을, 1층과 2층을 잇는 작은 방에는 Sasa[44]의 「쑈쑈쑈; 쑈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를 전시했다. 전시장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작업들이지만 각각 작업 안의 새로운 지휘부와 창작 주체에 대한 질문들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전시장 1층에 있던 「줄리엣」에는 다섯 명의 줄리엣이 등장한다. 홍성민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신의 임시적인 지휘부로 삼았지만 원전의 악보를 뒤집고 그 안에서 오직 줄리엣의 제스처와 사연만을 선택해 무대에 올렸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원고는 절반의 지휘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섯 명의 연출가에게 각각 한 명씩의 배우가 줄리엣을 연기하도록 하고, 이들은 그냥 줄리엣이 아닌 다중적인 'Julittttt'이 된다. 각자의 템포에 맞게 줄리엣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여러 개의 진실, 여러 개의 지휘, 여러 개의 각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1층과 2층을 잇는 작은 방에 작은 옛날 티브이로 Sasa[44]의 「쑈쑈쑈; 쑈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를 틀었다. 원작 제롬 벨의 「쑈는 계속되어야 한다」의 아이디어를 작업의 추동력으로 삼은 공연 실황이다. Sasa[44]의 공연은 놀랄 만큼 유머러스하고 희비극이 공존하는 인간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 대중가요의 가사를 퍼포머들의 지휘부로 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전시 내내 '손에 손잡고', '사계', '애국가' 등의 함께 들을 수 없는 대중가요들의 아름다운 선율을 참 많이 들었다. 관객들 또한 오랫동안 이 좁고 더운 방에서 소리와 춤을 감상했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취합되지 않는 집단(출연자들 중에는 미술가도 있고 음악가도 있고 무용가도 있다)이 유행가를 오마주하는 특별한 실험은 전시를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안 볼 듯 가차 없이 무대를 떠나기도 하는 이번 전시의 모습과도 어딘가 닮아있었다.

 

3. 최소한 리듬은 엉키지 말아요

 전시를 설치하면서 작품들의 기운이 한데 모여 너무 과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기우'였다. 며칠 동안 전시장 1, 2층을 뛰어다니면서 공간이 몽글몽글 움직이는 기분이 순간 들 때까지 '공간이 너무 텅 빈 것 아닐까' '좀 더 에너지가 넘쳐야 하는 건 아닐까' 등등 주로 고민이 많았다. 1층에 잭슨 홍 작가의 작업을 걸고, 이호인 작가의 「강가」와 「세때」와 주재환 작가와 홍성민 작가의 작업까지 모였지만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보고 싶었던 재밌는 공간일까~ 작품들이 좋은데 참 설치가 최소한 리듬이 엉키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들로 며칠을 보내다가 다시 해밀톤 공간과 작품들이 서로 만나 살아있는 듯 한 움직임을 느끼곤 했다. 전시장 초입에서 잭슨홍의 작품이 박정희 정권 시절의 슬로건을 빨갛게 재생시킨다면, 이호인은 2010년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새가 날아가는 풍경을 포착하고, 남화연이 울리게 한 '펑키 음악' 뒤로 홍성민의 줄리엣이 연기를 한다. 1층의 아기자기한 느낌이 소형 비행기를 위한 활주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서 2층은 1층보다 위에 있지만 오히려 무게감 있는 잠수함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해밀톤 공간 특유의 부스러진 계단, 콘트리트 벽 등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이 한 몫 했다. 최민화 작가의 「하얀 유원지」가 2층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면 좋겠다고,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막연하게 작정하고 있었다. 작품을 멀리서 보니 더 좋았다. 분홍색의 걸개그림 「김귀정 열사」는 91년 거리에 있었지만 2010년 여름 「지휘부여 각성하라」 전시에서 그의 1995년 작 「하얀 유원지」를 다시 본다. 최루탄이 있던 거리가 하얗게 보였다고 기억하는 작가는 "지난 시절 생각했던 것들이 오늘날 유효한가" "1982년도에 그리려고 했던 그림을 잊어버리지 않고 언제 완성할 수 있을까" 라고 지난 6월 봉천동 작업실에서 내게 말했다.
 2층 가운데에는 전시과정을 입체적으로 담은 워킹매거진의 단행본을 벽보처럼 붙여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리딩 룸'처럼 설치했고 고경태 기자의 「한겨레 21」 표지 아카이브를 벽에 몇 문장들을 뽑아내는 작품으로 마무리했다. 그 뒤로는 윤성호 영화감독의 영화 세 편 「신자유청년」, 「졸업영화」, 「두근두근 시국선언」이 상영됐다. 그리고 디자이너 김영나가 스위스에서 진행한 워크숍의 결과물인 「imaginary communication」(2009)이 공간 군데군데 배치됐다. 전시에 모인 포스터들은 학교 지휘자를 향한 '한국어'로 된 엉뚱한 비판을 광주 시민들에게 엽서로 보내기도 하고, 스위스 동요를 광주 시민들을 위해 워드 프로세스로 작업하고, 광주 지도를 주황색 포스터 안에 담기도 했다.
모든 작가와 필자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또는 그 자리를 넘어서서 멋진 작업들을 보여줬지만 남화연 작가의 「play that funky music 그 펑키 음악을 울려줘」가 전시와 공간을 흥미진진하게, 또 서로의 모서리가 순간 만날 수 있도록 '빛나는 마찰'의 지점을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화연 작가는 이번 「지휘부여 각성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지적이고도 심각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작업을 했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와 기획자에게 전시 설치에 관한 질문지를 보내 '자신의 작업의 위치를 정해 달라'는 부탁을 청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노란색 종이와 산요 스테레오레코드, 그리고 와일드 체리의 'play that funky music' 노래가 연주된다는 것만을 정하고 자신의 작업 위치를 정해달라고 다른 작가와 기획자에게 작품의 지휘권 일부를 맡겼다. 작가는 "펑키 뮤직을 연주하는 사람이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 전시의 지휘부는 누구일까. 전시의 머리는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진 것은 아닐까. 이상한 별모양의 전시를 예측했던 나는 관제탑에 올라가서 그것의 치수와 방향을 측정하기보다 지금은 전시장의 1층과 2층 복도에 걸린 주재환 작가의 작품 「자화상」에 붙어있는 시 '하여가'와 네모난 거울을 보는 편이 훨씬 즐겁다.

 

* 각 챕터의 제목은 현시원 큐레이터가 전시 준비 기간 동안 연습장 겸 '전시 노트'에 적었던 메모에서 발췌했다.

* 전시 관련 정보: 지휘부여 각성하라 @공간해밀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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