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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너 괴벨스 <나는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I went to the house, but did not enter>

2011-09-09  

- 심연(深淵)에서 심연(心延)으로, 심연(沈演) 끝에 심연(尋緣)으로 가는, 시공의 탐구 -

독일의 작곡가이자 퍼포먼스 연출가인 하이너 괴벨스(Heiner Goebbels)의 근작이 한국을 찾았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고음악을 주로 부르는 남성 4인조 아카펠라 그룹인 힐리어드 앙상블(The Hilliard Ensemble)가 퍼포머로 호흡을 맞춘 실험 음악극 <나는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 I went to the house, but did not enter>(2011.3.26-27, LG 아트센터)이다. 스위스 로잔의 비디극장(Theatre Vidy-Lausanne)과 영국 에딘버러페스티벌의 공동제작으로 2008년에 발표되었던 이 작품은 겹겹의 의미로 더깨를 이루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4개의 인성이 만들어 내는 침참하는 듯한 고요한 울림,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간결한 시공간을 동시에 구현함으로써 괴벨스의 작품 이력과 스타일에 또 다른 전기를 이룬 듯 보인다.

2000년대 들어서 발표했던 그의 대표작들을 살펴보자. 이를테면 <대체 도시들 : Surrogate cities>(2005)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과 강렬한 음향과 비판적인 시선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또한 속내를 훤히 드러낸 피아노, 물과 안개, 곳곳에 널부러진 타악기 등 오로지 사물들로만 이루어진 퍼포먼스였던 이전 작품 <슈티프터의 사물들 : Stifters Dinge>(2007)에서 카오스처럼 얽힌 온갖 불일치와 기계적 반복 속에 관객들이 불현듯 줍게 되는 생경한 시공과 불안한 존재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분명 이 작품은 사물들의 기계적인 아우성 속에서 강렬한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반 연극성을 구현하면서 그 안에서 텅 빈 비실재의 충격을 경험하게 하는 문제작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무대화된 음악회(staged concert)’라고 작가 자신이 작품의 형식을 명명한 <나는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는 과잉(plethora)으로 점철된 이전작과는 달리 미니멀한 구조와 방식을 채택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음악과 텍스트 안에 은밀히 몸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작품 안에 날 것으로 머물고(혹은 드러난) 있는 시공을 관객들의 상상력에게 내어준 듯 보인다. 3개의 장면으로 나뉘는 이 작품은 T.S. 엘리엇의 (1917), 모리스 블랑쇼의 <낮의 광기 : La folie du Jour> (1949), 사무엘 베케트의 <워스워드 호 :Worstward Ho>(1982)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 사이에 프란츠 카프카의 짧은 텍스트를 연결한 텍스트에 괴벨스가 곡을 붙이고 이 노래를 부르는 4명의 남성, 힐리어드 앙상블이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함께 구현한다.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산포되는 다성음악은 시종일관 텍스트에 나타난 시간의 부재, 침묵, 공허, 그리고 소외를 뱉어낸다. 비브라토 없이 공간을 영롱하게 울리는 이들의 노래는 일견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성악곡 같은 ‘종소리’ 울림, 일명 틴티나불리즘(tintinalbulism)을 연상케 하지만 그의 현대적 종교 음악에 깃든 ‘옷자락을 여미게 하는 상승’ 대신, 괴벨스는 비슷한 외연으로 무표정한 도시인의 독백(방백)으로 가득한 ‘맨몸을 드러내는 하강’ 을 표현한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맨몸, 맨살을 드러내는 퍼포머들, "힐리어드 앙상블"은 작품 내내 조용히 그리고 진중한 연기를 한다. 1부에서는 마치 이사를 가듯 방 안의 살롱 안의 탁자, 검은 사물들을 챙겨 넣고 텅 빈 방안에 다시 하얀 사물들을 배치한다(엘리엇), 2부에서는 집 안에서 창문 틈새로 가사에 열중하며(블랑쇼), 3부에서는 호텔 방에서 오래 전 휴가 장면을 틀어보며 반복적인 회상에 집착한다.(베케트)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삼면화의 알레고리 같이 형식미에 기대는 듯 하지만 (전통극에서는 소거되어야 할) 무대 전환의 시간과 과정까지 관객에게 고스란히 내비치는 탈드라마극(postdramatic theater)의 한 단면을 보여주면서(물론 레만(Hans-Thies Lehmann)의 동명의 저서에 바탕을 둔 의미이다), 극도의 미니멀한 구조성에 모든 의미를 집약시켜 닫힌 구조 안에서 한없이 열어내는 중의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Heiner Goebbels &The Hilliard Ensemble,< I went to the house, but did not enter>(2008)

제목인 신비로 가득한 문학이론가이자 침묵의 글쓰기를 시도했던 모리스 블량쇼의 <낮의 광기> 텍스트의 한 구절이며 따왔다. 블랑쇼는 공허하고 투명한 하얀 글쓰기(écriture blanc)와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전형이며, 다소 모호한 문학적 인물을 대표한다. 아카펠라 가수들이 읊조리고 축조해가는 말의 유희, 그 신비로운 소노리티(sonority, 울림)는 때론 아주 공허하게 들린다. 물론 이들은 마치 일란성 쌍생아들처럼 서로 닮아 서로를 마주본다. 가령 엘리엇의 시는 시간을 찾아 헤매는 경험의 힘을 빼앗긴 자아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블랑쇼 작품은 기괴한 스토리임에도 어떠한 구조적 틀도 주어지지 않는다. 반복적인 말의 유희로 이루어진 베케트의 시는 그의 작품 세계처럼 (최소한의)기호의 밀도로 충만하다. 독자는 따라가려 시도하지만 작품에 빨려들어 갈 수가 없다. 명료하지만, 기묘하게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 공연의 압권은 마지막 호텔방 벽에 환등기로 그림을 영사하며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음향으로 직조해가는 마지막 시퀀스. 그것은 먼 시간으로부터, 아득한 지난 시간으로 부터 건져 올린 뜻 모를 향수를 아직 가닿지 않은 시간까지 연장시켜 환각의 시공으로 유도한다.

 

균열을 찾는 엘리엇, 부재를 보는 블랑쇼 그리고 그 공허에 머문 베케트

어쩌면 일차적으로 단순한 통일성을 이루지만 파편화된 울림으로 직조되고 활공하다 산포되고 결국은 기호의 층들이 계속해서 덧씌워지는 양피지, 팔림세스트(palimpsest)같은 형상은 이 극의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된다. 즉 켜켜이 쌓이는 힐리어드 앙상블의 음악적 중언부언, 그들이 축적해가는 텍스트 반투명한 덧칠은 의미를 부유를 즐기는 ‘우유부단한’ 관객들에게 구미에 알맞다. 비논리적이고 불연속적인 시간의 멈칫거림 같은 것들.

첫 번째 살롱 장면에서 등장한 T. S. 엘리엇은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단테의『신곡』(Divine Comedy)의「지옥」(Inferno)편에 나오는 계시를 통하여 지상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후에 지상으로 다시 회귀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프루프록의 과거에 대한 고백의 순수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고백은 기억에 의존해야하므로 기억은 오히려 기억에 저항하는, 오직 인식의 오류인 사실성에 입각한 ‘반-기억’(anti-memory)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과거라는 ‘실재계’(the Real)에 대한 기억은 항상 우수리를 남기게 되므로 불완전한 고백처럼 보인다.

"자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질 때/수술대 위에 에테르에 마취된 환자처럼 우리 갑시다, 어느 반쯤 버려진 거리를 지나,/굴 껍질과 함께 톱밥 깔린 레스토랑과/일박 싸구려 여관에서의 불안한 밤의/중얼거리는 뒷골목을 지나서:/음흉한 의도의/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지는 거리는/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인도할 것입니다..오 묻지는 마세요, “이게 무엇이냐?”고./가서 방문합시다./방안에서 여인들이 오고 갑니다./미켈란젤로를 말하면서./유리창에 등을 부비는 노란 안개/유리창에 주둥이를 부비는 노란 연기/그 혀로 저녁의 구석을 핥고,/하수 웅덩이 위에 머뭇거리다가/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등에 맞고/테라스 옆을 미끄러져, 갑자기 한번 풀쩍 뛰고는,/온화한 시월 밤인 것을 알고/집 주위를 한번 돌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극 중에 인용되는 이 부분 “노란 안개”, “노란 연기”는 일종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의 펼침, 주름(pli)처럼 보인다.(아, 들뢰즈의 책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를 보시라! 기막힌 말들의 펼침과 함께 ‘주름’들의 매혹에 빠져든다.) 퍼포머들의 접고 펼치는 반복적인 동작, 상반된 색조는 그러나 여전히 같은 공간(혹은 같지만 다르다고 보는 공간)은 바로 이러한 시공의 수수께끼 속에서 엘리엇은 시간을 찾아 폐허를 헤매는 시적 화자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으리라/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며/거리를 따라 빠져나가는 노란 연기에게/시간은 있으리라, 시간은 있으리라,/당신이 만나는 얼굴들을 만날 얼굴들을 준비하기 위하여/살인하고 창조할 시간은 있으리라,/당신의 접시 위에 문제를 들었다 놓는/손의 일과와 모든 일정에게도/아직 백번쯤 주저할 시간이,/백번쯤 보고 고쳐볼 시간이,/그대와 나에게 있으리라"

시적 화자는 시간의 유동 속에서 전개되는 인간들의 각가지 행위들이 “백번 쯤”의 “각성”과 함께 “수정”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것은 삶에 관한 근원성 뿐 아니라 가벼운 “문제”를 대하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엘리엇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돌연 출몰하는 존재적 시간에서 도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 텍스트는 괴벨스의 음악과 연출 안에서 구조화된 미니멀한 경직성으로 현시된다. 삶의 지속은 결국 분절적 시간의 발견을 위해 의미있는 것일까. 아무튼 엘리엇을 부르는 네 명의 ‘그들은’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진지하게 시간의 ‘균열’을 찾아 헤매는 사자(使者)들처럼 보인다.

두 번째 장면에서 등장하는 모리스 블랑쇼의 <낮의 광기>는 도시의 한낮을 가로지르는 소음과 흡사 일상에 함몰된 도시 유령들의 방백처럼 들려온다.

"나는 그 집에 갔지만,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틈으로부터, 정원의 어두운 시초부분이 보였다. 나는 밖의 벽에 기대붙었다, 확실히 매우 추웠다. 냉기가 발부터 머리까지 나를 감싸, 나는 서서히, 어쩔 도리 모를 나의 신장이 이 거대한 냉기의 퍼짐을 둘러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신장은 그 진짜 본성의 권리 상태로 고요히 일어나져, 나는 이 행복의 환희와 완성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일순 사이 머리는 허공의 돌과 같을 정도로 높은 데에, 발은 잘게 부순-돌 포도의 위에 놓은 채."

블랑쇼에 따르면 언어의 부재는 그 낱말이 표현하는 관념이나 개념에 의해 감춰진다. 이렇게 되면 낱말들은 자기가 부정했던 사물에게도 되돌아간다. 사물이 사라진 자리는 관념이 대신하며, 관념은 원래 부정되었던 사물 만큼이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일종의 머뭇거림, 기다림 같은 틈새로 배어드는 것들이다.

나는 벽 안에 들어가잠겨, 부싯돌의 덤불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나쁜 건, 돌연의, 소름기칠, 대낮의 가혹함이었다. 나는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되지 않았다(할 수 없었다), 보는 것은 공포이고 보는 것을 그만하는 것은 이마에서 목구멍까지 나를 갈라놓았다. 거기다 내겐 하이에나의 부르짖음이 들려와, 그것이 나를 들짐승의 위협의 곁에 두었다. 열려진 창문에서 4명의 퍼포머들은 고요한 일상에 침잠하여 조용한 ‘낮의 광기’ 안에서 틈새, 기다림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노래’에서 선율은 소거되었다. 무미건조한 리듬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들의 낭창은 흡사 낡은 성당에서 울려나옴직한 늙은이들의 위령기도, 해골같이 거죽만 남은 얼굴에 마치 복화술로 주문을 읊듯이 마른 입술로 흘려내는 미래의 자신을 위한 기도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무튼 블랑쇼는 이들과 함께 ‘부재’를 찾아 헤맨다.

세 번째 장면, 호텔방에서 울려나오는 베케트의 <워스워드 호: Warstword Ho>는 연출자의 요청대로 자막이 제공되지 않았다. 그저 의미보다는 ‘울림’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마치 난독증 환자의 중얼거림 혹은 어지러운 '회문(回文)'과 같이 돌고 도는 언어유희로 가득한 이 텍스트를 번역해 낸들 관객에게 베케트는 눈과 귀를 함께 혹사시키는 '고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의미가 소리로 분산되는 과정, 환등기로 사진을 비추며 회상조로 반복하는 이들의 노래 속에서 관객은 무엇엔가 ‘취하고야.’ 만다 (이쯤에서 혹자는 그간의 지루한 시간에 반응해 깊은 잠에 취하기도 한다 ! )

"All of old. Nothing else ever.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Enough. Sudden enough. Sudden all far. No move and sudden all far. All least. Three pins. One pinhole. In dimmost dim. Vasts apart. At bounds of boundless void. Whence no farther. Best worse no farther. Nohow less. Nohow worse. Nohow naught. Nohow on. "

허무로 가득한 텍스트 안에서 환등기가 투사하는 이미지는 호텔방의 하얀 스크린 바깥, 벽으로 넘쳐흘러 벽지 무늬와 함께 중첩되어 이미지의 변형과 왜곡을 가져온다. 마침내 몇 개의 스틸컷이 지속되다 마지막 바닷가의 파도가 넘실되는 동영상이 투사될 때 그들이 전하는 베케트의 이야기는 (일단)끝난다. 그런데 과연 끝난 것일까. 암전은 되어도 그들이 내뱉은 nothing, nohow의 울림은 귀에서 계속 머뭇댄다. 베케트는 그들 안에서 ‘공허’를 반복시킨다.

되풀이의 변주들 그리고 '타블로 비방' 같은 그들의 쓸쓸한 뒷모습

시간은 어디로 달아난 것일까. (게다가 바라본 공간에서는 무엇이 일어난 것일까). 이 작품은 성긴 틈으로 가득한 체 처럼 아무것도 걸러내지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 이상한 되풀이들로 관객은 혼란스럽다. 들뢰즈(G. 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점진적으로 한 사태에서 다른 사태에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두 사태간의 본성상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반복은 마치 하나의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하나의 특권적 순간에서 다른 특권적 순간으로 이행하듯 자리를 옮겨가면서, 변이형들과 더불어 그리고 변이형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변이형들은 스스로 반복하는 것의 본질과 생성에 속하는 어떤 미분적 구조를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한 반복의 표현은 현존하는 실제를 모방하는 행위의 층에 있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 교환 불가능성, 잠재성, 특이성, 무한성, 순환성, 영원성 같은 것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포 : dissemination』에 등장하는 데리다(J.Derrida) 간극(écart) 그리고 그것의 역행인 흔적(trace)의 뉘앙스도 슬쩍 지나간다. 결국 그것도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의미들의 주저함이 아닐까.

무대 세트를 보면서 마치 활인화(tableau vivant)를 보는 것 같다고 느낀 것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들의 외연을 그대로 가져와서 였을까. 회청빛으로 가득한 살롱에서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하메르스회(Vilhelm Hammershøi :1864-1916)의 정적인 실내가 떠올랐다. (2년 전 도쿄에서 봤던 전시, 이 잊혀진 화가의 우아한 그림들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서늘한 침묵이란!) 그리고 호텔방에 어른거리는 창문의 그림자, 그 이름 모를 스산한 정조에서 오가던 4명의 남자들에게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1967)의 고독한 공간이 중첩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결국 이들이 추구하던 것도 공간에서 돌출된 시간들, 모허한 공허가 아니었던가.

빌헤름 하메르스회(Vilhelm Hammershøi :1864-1916) "Interior, strandgade 30"(1901) 등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 의 그림들

<나는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는 ‘집’으로 표현된 어디에도 없는 시공을 배회하는 마음의 방랑기로 보인다. 들어가지 않았다고? 지극히 표면적인 이 극의 외연 너머에 있는, 움푹 들어간 심연(클리셰 같은 단어라 내내 주저하면서 결국은 꺼낸다)에 발이 빠진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기묘한 환각의 깊은 못, 심연(深淵)은 어쩌면 심연(心延)으로 마음을 늘이며 심연(沈演)으로 끝없이 가라앉아 멀리 흐르다가 결국 심연(尋緣)으로 궁극적인 시공의 실마리를 캐묻는 탐구로 변주하는 것은 아닐까.

*덧붙임 : 중간에 언급한 데리다의 'écart' 는 한마디로 규정하긴 어렵다 간극, 공백, 틈새, 균열, 공간 그리고 결과적으로 3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것 모두를 뜻하면서, 결국 사라져 버린다. 왜 불어에는 틈을 의미하는 단어가 이다지도 많은 것일까. écart'의 숨은 뜻은 lacune,déficit,vide,intervalle,décalage,trou,interstice,brèche,ouverture,insuffisance,interruption, trouée,béance,trou béant,regard ébahi.... 이중 몇개는 영어의 ‘gap’ 으로 뭉뚱그려진다......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언어의 ‘gap’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글 최효민

Choi Hyo-min arsnova9@hanmail.net 영상 작가. 복합장르 퍼포먼스를 창작하며 예술칼럼을 써왔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철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방송영상을 전공으로 ‘디지털 매개 공연예술에서의 몸의 감성적 소비코드’를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과정(영상예술학 전공) 중이다. 최근 작업으로 강수진 발레 공연 “The Ballet”(2010. 4. 예술의 전당)와 창작 발레 “심청”(2010. 5 예술의 전당, 유니버설발레단) 영상/비주얼 디렉팅을 했으며, 개인 작업으로 복합장르 퍼포먼스 “물거울”(2010. 8 예술의 전당, 서울국제발레페스티벌)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의 시공간과 영화 미학’이 있다. 실험 영화 “물의 위로”(2010)가 2010 오프앤프리국제영화제 폐막작, 제37회 시애틀국제영화제, 2011 Fluxus(Brazil) 등에 초청되었으며, 2011년 9-10월 아트센터 나비 초청으로 W호텔-워커힐에서 미디어아트 형태로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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