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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퍼포먼스 리뷰와 동영상

2012-01-16  

카니발, 카바레, 칸타빌레 –19금 퍼포먼스 릴레이

 

어떤 퍼포먼스도 19분 이상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조건인, 19금 퍼포먼스 릴레이가 다시 열렸다. 지난 겨울 이태원 공간 해밀톤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호응을 얻었던 이 기획은 장소를 홍대 앞 루프로 바꾸어 11월 11일 두 번째 릴레이를 펼쳤다. 참여 작가는 10팀, 저녁 6시에 시작해 거의 자정까지 이어지는 마라톤이었다. “동시간과 공간 그리고 음식을 공유하는 따뜻한 환대의 카니발이 되고자 한다”는 초대의 말처럼 분식트럭이 루프 입구에 주차하여 먹거리 판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래 위 층, 안과 밖을 넘나들며 퍼포먼스를 관람하거나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와 음악, 무용이 장르 구분 없이 한 곳에서 벌어지는 카바레 볼테르 같은 기획이 서울에 존재하고 또 그것이 2회를 맞으며 지속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19금이라는 불온한 제목의 힘인지, 참여하는 이들이나 관람하는 사람들이나 어깨 힘 빼고 편견 없이 부담 없이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작한 첫 번째 퍼포먼스는 구동희 작가가 사진 찍는 청년 이윤호와 함께 보여준 <제너럴 일렉트릭>이었다. 공사장에서 각을 잡을 때 사용하는 수직, 수평의 붉은 레이저 선이 그어진 벽면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은 구동희가 한쪽 구석에서 전기로 빛을 내는 사물들, 조명이 달린 액자나 인형을 하나씩 가져와 무대에 놓고 전선을 연결한다. 잠깐 빛이 나오는 순간에 이윤호가 사진을 찍고 이내 구동희는 전기를 끊어버리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순간에 던져진 빛의 흔적을 쫓아 사진을 찍는 시간이 전기를 연결하고 끊는 동작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재앙의 실체로 다가오는 사건을 목격한 2011년의 사람들에게 전기를 이야기나 작품의 소재로 다루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재난에의 연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물들의 온 앤 오프, 전력의 작동과 절단의 반복 그 사이에서 찰나의 빛을 이용해 사진을 찍으려는 시도들은 원자력 재앙의 시대의 작업의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느껴지기도 했다.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하얗고 까만 것을 위하여>는 이러한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제안하는 실행교본이다. 이 작품은 후쿠시마 원전사태에서 정부에 의한 언론 봉쇄로 시민들의 초기 피해가 늘었던 것을 상기하며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 무기력하게 노출된 위험으로부터 자가 방어력을 키우기 위한 기체조”로서 고안되었다고 한다. 여러 재난방지 기관들의 매뉴얼들을 리서치한 옥인콜렉티브는 결국 이러한 매뉴얼들이 위험상황에서는 침착하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반복할 뿐 어떤 ‘행동’으로 어떻게 ‘대처’ 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10년 경력의 숙련된 조교를 위시한 세 명의 옥인-기체조 팀은 장시간 앉아 있기만 했던 관객들을 일으켜 그들이 고안한 재난방지 기체조를 학습시켰다. 미리 녹음된 나레이션이 말랑말랑한 음색과 묘한 설득의 어조가 담긴 지시어를 던졌고, 관객들은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던 기분으로 옆 사람을 밀고 당기는, 한판 ‘참여’의 장이 벌어졌다. ‘참여’라는 말에 함유된 놀이의 기능과 정치적인 함의가 동시에 발효되는 순간이었다.

송호준은 소형 인공 위성을 띄우는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참여작 <어제 오늘 빅토리>가 띄워 올린 것은 두터운 종이로 만든 자신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머리와 어깨를 따라 잘라낸 대형 사진은 마치 로켓의 형태 같았고, 나무토막으로 지지대를 붙이고 추를 연결해 수직으로 세우는 장면은 연극에서 세트를 만드는 모습처럼 보였다. 우주 공학의 실현이 거대 국가적 차원에서만 행해져야 하는지를 질문해 온 기존의 돈키호테적인 시도가 초상 사진과 종이 로켓 그리고 승리(빅토리)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한층 더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재연되었다. 이 퍼포먼스의 마지막은 조용필의 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가 흐르는 가운데 작가가 자신의 대형 사진을 옆에 세워 두고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라는 노래는 자기지시성을 가지는 동시에 현재, 이 순간에만 오롯이 존재하는 퍼포먼스의 시간 흐름에 맞아 떨어지는 가사이다.

길종상가의 박가공과 현시원의 <골든>은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 식의 상상과 유머를 보여준다. 7,80년대를 풍미한 가수라면 한 번 쯤은 ‘골든’ 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도 미국에서 백 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뜻하는 골든 디스크에서 따온 듯하다. 많이 팔리기도 전에 미리 ‘골든’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흥행의 기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가수 송창식의 골든 앨범 자켓 이미지를 배경막으로 걸고 나타난 길종상가의 흥행사 박가공은 황금색 물통처럼 생긴 ‘골든’이라는 물건을 소개하였다. 머리에 뒤집어쓰면 가수 송창식의 뇌와 동기화되어 춤을 추고 노래도 하게 되는 제품이다. 길종상가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사람들의 집합체이자 7과 1/2층과 같은 공간이다. 이에 헛웃음과 기괴한 행동,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일정한 표정의 가수 송창식을 뇌동기화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지난 8월 전시 <천수마트 2층>에서 작가와 기획자로 만난 박길종과 현시원이 이번에는 각각 사장님과 인턴사원으로 자리바꿈 하였고, 그동안 SNS에서 주로 활동하던 박가공이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공의 기술(혹은 상술)을 선보였다. 19분의 퍼포먼스 시간이 지난 후, 골든을 시착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른 참여자들에게 박가공이 참가비 오만원을 뒷돈으로 건네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박가공은 노인들에게 전기요나 건강식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수법을 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데, 그것이 퍼포먼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혐의를 두게 된다.

19금 릴레이의 기획자이자 작가인 홍성민은 장르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절단하여 재조립한다. 지난 페스티벌 봄에 소개되었던 <엑스트라스>에서는 주요 연극과 뮤지컬에서 엑스트라로 활동하는 대학로 배우들을 떼어 와서 한 무대 위에 펼쳐 놓고 각각의 연기와 대사를 동시에 실행하게 한 불협의 꼴라주를 선보였다. 사지를 잘라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재현 연기'의 헛헛한 실체가 강조되는 잔인한 유머였다. 이번에 선보인 <영화>에서는 남녀 연극배우가 몇몇 영화의 클립들을 어색하고 과도한 감정 표현 일색의 더빙 말투로 연기한다. 영화 이미지와 대사가 분리된 채 배경으로 작동하고 연극배우들의 희화화된 애정씬이 이에 접합된다.

이외의 참여작 중에는 특히나 음악이 연계된 퍼포먼스들이 많았다. 오프닝 밴드 <빛과 세금>을 비롯하여 전래동요를 개사하여 부른 부추라마 없은 부추라마 [ 2.0 beta 버전] 합창단, 19금 노동이 그러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송호준의 작업에 조용필이, 길종상가와 현시원의 작업에 송창식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이들 퍼포먼스에서 개사하거나 창작한 노래, 대중가요가 사용된 반면, 디륵 플라이슈만은 비엔나 행동주의자이자 자신의 대학 은사였던 헤르만 니치의 렉쳐를 소개하는 렉쳐-퍼포먼스 를 선보였다. 비엔나 행동주의 그룹에서 과격하고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던 작가 헤르만 니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쇤베르크, 바흐, 스트라우스의 음악과 가사들이었다.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킴킴 갤러리는 작가 나키온과 에스터만의 협업을 소개하였다. 에스터만은 단순 사물들을 간결하게 묘사한 다수의 흑백 드로잉들을 보내왔고, 나키온은 이 그림들을 여러 시간차의 리듬을 만들어 편집, 이에 맞춘 디제잉을 선보였다. 주어진 시간 동안 점점 고조되는 나키온의 음악과 벽면에 영사된 에스터만의 드로잉 이미지들은 접합과 결렬을 반복하며 제목 그대로 공간 안에서 분열, 분산되는 효과(distractions)를 만들어 내었다.

전반적으로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의 퍼포먼스들은 완결에의 강요가 없고, 의도된 허술함이 허용되고 있었다. 드나듦이 자유로운 공간이자 냉정한 비평적 잣대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로서 하나의 작업이어도 좋고, 어떤 작업의 과정이어도 좋고, 그저 어떤 시도여도 좋다는 허용이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맥락 이탈의 즐거움과 신선함 너머, 제시된 시간 내에 관객의 머릿속까지 휘감는 사건들은 기대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19분은 짧지만 또 충분한 시간이다. 그 형식에 있어 1915년 마리네티가 발표했고 추구했던 ‘미래주의 총체(synthetic) 연극’과 유사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총체연극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 중 하나도 우선 짧다는 것이었다. 몇 분의 시간, 몇 가지 단어와 행동만으로 셀 수 없는 상황, 감정, 아이디어, 사건, 상징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이 선언의 요체였다. 그러나 이번 릴레이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개별 작품은 19분 프레임 안에 하나의 완결태를 갖춘 공연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19분이라는 그릇이 형식의 완성을 유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19분 퍼포먼스 후 약 10여분의 여백이 동일하게 반복 되자 다소 지루한 리듬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지난해 프로젝트를 통해 19금이라는 시간 프레임이 어느덧 조건으로서 자리를 잡았다면 두 번째 해를 맞은 이번에는 그 위에 겹쳐져 개입할 또 다른 게임의 조건이 던져졌다면 어땠을까. 한편 극장이 아니라 전시장 공간이었음에도 조명과 명확한 시간 분배를 통해 객석과 무대가 분리된 느낌을 준 것도 다소 아쉬웠다. 운영에 있어서 지난해 보다 정돈되고 체계적이라는 중평이 있지만 이처럼 유사 극장과 같은 배치보다는 전시공간의 가변성을 더욱 활용하여 사람들의 모이고 흩어지는 자연스런 형태와 동선을 이용했더라면 보는 사람들을 수동의 역할에서 벗어난 공동제작자로 끌어들이고 예술가와 공감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유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번 더 미래주의 총체 연극 선언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서는 감정의 고조, 미리 준비한 효과, 지연된 클라이막스와 같이 의무적인 연극 장치들에 봉사하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고, 누구라도 인내를 가지고 공부하고 연습하면 획득할 수 있는 테크닉에 목을 매느라 한 사람의 재능을 소모시키는 것 역시 바보 같다고 말한다. 무대 위, 객석, 오케스트라 등 어디에서도 전개될 수 있으며, 정해진 줄거리 없이, 던져진 사건과 장치에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반응함으로써 서로의 구분을 없앤다. 이 같은 총체 연극의 목적은? ‘가장 난해한 문제와 복잡한 정치적 사건’을 누구에게나 재빠르고 신속하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처럼 공동의 시간, 공동의 장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공유와 공감의 장을 연다는 것이 퍼포먼스가 가진 일회성의 정치적 힘이자 강력한 조건이다. 그 형식이 음악이든 무용이든 그 통로가 놀라움, 혐오감, 유머이든 이 시간은 감각을 나눠 갖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안을 발견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19분 퍼포먼스가 가져올 수 있는 선언과 공감의 힘이 매해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해주 (국립극단 연구원) / 2011 <아트인컬쳐> 12월호

 

 

 구동희+이윤호

 

 

체험을 사랑하는 체험으로 순간의 공동체를, <19금 퍼포먼스 플레이>


예술이 징후 자체는 아니지만 징후가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이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지만 감정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의 변주처럼 들릴 텐데, 결국 징후는 아직은 판단불가능한 지대에서 새로운 감응을 위한 계기 같은 것이다. 이질적인 퍼포먼스들의 집합으로 세워지는 네트워크, 이것이 <19금 퍼포먼스 릴레이>(11월 11일 대안공간 루프)의 정체라고 할 때에는 유보적인 시각 혹은 신중한 시각으로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원적으로 개방된 퍼포먼스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틈을 통해 그 전략적 기능을 파악하기는 아직 힘들기 때문이다.물론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의 기획 의도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될 수는 있다.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라는 ‘예외상태’로부터의 탈주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미시 공동체’ 혹은 ‘순간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2010년 첫 번째 행사에서 표명되었던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란 모토는 당시 인구 센서스의 참여독려용 문장이었지만, 이는 교묘히 변용되어 ‘벌거벗은 인간’의 상태에 처하지 않을 만큼 예술가의 자기 실천의 수행문으로 작용했다. 확실히 이 변용적 작업은 이태원이라는 해방구의 공기와 화학적으로 맞물려서 기대 이상의 가능 세계로 열려졌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행사에서 기획자 홍성민씨는 여전히 우발적이고 지각적이며 참여적인 토대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미술/퍼포먼스/공연예술의 분할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으로부터 이탈하는 잠재성을 탐문한다는 식의 취지를 밝혔다. 이는 그의 랑시에르 독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느끼는 감각의 문제”라는 층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즉 그는 “감각적 세계 안에 몸이 기입되는 방식”이라는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몸이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란 토대 위에서 기존의 장르적 분할 체제를 재분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과연 이 제안은 충분히 실현되었을까. 탈전문화된, 항상 이미 해방된 예술가=관객이라는 전제는 사실 현실화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관객이 그 신체적 존립 자체를 주장하는 것으로써 사회적 틈을 벌리고, 아니 사회적 틈이 된다는 복선이 깔려 있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미 플럭서스 등에서 선취된 이러한 미덕은 항상 이미 “이론으로서는 낡았으나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신선하다”(가라타니 고진)라는 선상에서 새로운 실상으로 실현되곤 한다. 또한 다른 복선을 깔고 있는데, ‘의외로 신선한’ 퍼포먼스가 “사회적 친교”라는 관계 미학적 시공간으로 체험되고 ‘미시 공동체’ 혹은 ‘순간의 공동체’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클라스트르)라는 정치인류학적 표현은 예술 실천을 통해 우리 시대의 공동적인 것이 구축하는 길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몸이 느끼는 감각의 문제”라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이 급진성의 분할로 작용하게 된다.대충 이러한 시나리오인데, 첫머리에 말한 것처럼 과연 징후 이상의 감응적 상황을 연출한 것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그 이유는 <19금>에 개입한 정치미학과 관계미학의 연합, 기존 영역의 분할 체제와 그 체제에 대한 재분할 사이의 차이, 무엇보다 퍼포먼스의 강도와 ‘불화’가 어떤 감응 세계를 낳았는지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기대어 일련의 징후들을 적극 옹호하고 싶다: “영혼의 신비한 새인 ‘소문’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최초의 ‘라디오’다.”(백남준)


첫 번째 행사의 나비효과는 두 번째 행사의 흥행성공으로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적 친교를 맺기에는 공연간의 배치가 너무 촘촘했고 관객들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가능한 만남들을 고안해낼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부족했고, 주어진 공연들을 지켜보기에 다소 바빴다. 어쩌면 이러한 불평은 공연 큐레이팅의 문제나 공연 자체의 문제보다 오히려 전체의 통찰로서 장소성의 문제로 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대안공간 루프가 풍기는 공간적 권능과 분위기는 홍대 문화의 쇠락이나 제도 공간의 비평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반면, 공간 해밀톤이 연접해 있는 이태원 공간의 채널이 그리워질 만큼 보다 넓은 사회적 틈으로 회고되었다. 이것이 <19금>의 가장 활발한 기호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흥미로운 점이 없지 않았는데, 데뷔와 함께 88만원 세대의 감각을 노래한 그룹 ‘빚과 세금’의 오프닝도 그랬다. 그들의 노래는 합의할 수 없는 현실의 촉지로 이어졌다. 이런 부분은 LIG 아트홀이나 국립극단에서 자신들의 노래를 전개한 어어부밴드 프로젝트의 공연과 비견할 만하다. 촉지적 감응보다 더 센 것이 있을까. 직접적이며 위협적이거나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건간에 ‘감정이 있는 사랑’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정금형 작가의 <금형 신제품 시연회>는 ‘러닝머신과의 신체적 교류’라는 매우 잘 계산된, 자연화된 타입이라 제한적이었지만, 이는 본래 공연을 앞두고 벌인 시연회의 성격이 빚은 결과이기도 했(다고 한)다. 정금형 작가가 천착하는 '금형'이란 개념은 기계의 욕정이 사이버네틱한 감응으로 일어나는 구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의 '금형' 페티시즘은 절정의 순간 "와락" 껴안으면서 완성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데, 거의 정사(情死) 수준임을 재확인했다.


길종상가의 박길종 작가와 현시원씨가 진행한 <송창식 골든 제3집>은 송창식의 뇌와 실시간 연결된다는, 일종의 ‘존 말코비치 되기’ 식의 송창식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특이한 기계의 발표회였다. 그러니 여기서 "골든"은 실제로 "골이 들어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척 보기에는 코팅한 양은 찜통처럼 보이는 단순한 외관의 기계가 송창식과 심오하게 연결시켜준다니... 과연 풍자적 상상과학의 끝은 어디까지인가.홍성민 작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극장전>에 나오는 한 장면의 대화를 전혀 다른 맥락의 영화들에 더빙하는 작업을 진행하는데, 실시간 연극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코드의 재맥락화는 홍성민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카오스의 경련을 기존 필름에 입혀갈 때 발생하는 그 간극이 비논리적인 경험으로 인도했다. 좌우간 웃음은 순간의 공동체를 이루는 아교였다.


디르크 플라이슈만의 <예술아카데미에 대한 퍼포먼스>는 비엔나 액셔니즘의 작가 헤르만 니치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렉처 퍼포먼스였지만, 액션 없이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 킴킴갤러리의 는 반복되는 드로잉 이미지들과 음악 사이의 선율적 풍경에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의 효과를 추가했지만, 그 예측불허는 다소 예측가능했다. 그러나 <19금>은 개별 작품들의 호오나 평가로 볼 수 없는 기획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참여하는 관계적 구조 내에서 사회적 틈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틈이란 협력적인 체계로서 예술 실천이 출현하는 장이며, 그 실천들의 관계망 자체이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실시간 일파만파로 전파되는 사회,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의 공모가 가속화되는 통제 사회에서 지금 여기, 오늘의 현장에서, 함께 예술의 공동적인 것의 체험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 내의 감성 체제에 요동을 가하는 일이다.

 

글 김남수(무용평론가) / 2011 <아티클>

 

 

 정금형 금형신제품 시연회

 

 

‘나는 퍼포먼스 다’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에 대한 몇가지 변명

 

화이트 큐브의 블랙박스 ‘되기’

2011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펼쳐진 2회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이하 19금)는 지난 1회(공간해밀톤)의 컨셉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그 기본적인 태도를 공유하고자 했다.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은 2010년 전 국민 인구조사를 위한 슬로건으로서 우연히 현관 메일함에서 발견된 정부 공문에서 발견되어 채택되었다. 누차 밝혔듯 그 문장은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의 핵심적 주장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말한다. 구두수선쟁이가, 도예가가, 조각가가 자신에게 ‘분할된’ 직업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공통의 영역(정치에 관한)’에 관심 갖을 수 없게 된다고. 정치의 미학이 아니라 미학의 정치인 이유는 정치가 ‘보고’‘듣고’ ‘말하는’ 방식을 분할하는 본질 때문이라고. 그래서 권력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전 국민의 인구와 성분을 분석하고 유형화하여 빈틈없는 통제 속에 놓이게 해야 함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예술계는 일치감치 권력으로 부터의 ‘분할’을 충실히 받아들였고 그것은 단지 미술/연극/무용/공예/도예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이다. (이젠 ‘다원예술’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장르가 그 목록에 추가되었다) 다시 회화는 동양화,서양화,판화로 분할되고 무용은 고전무용, 현대무용, 발레등으로 재분할 되는 동시에 인사동/대학로 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분할된다. 인사동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회칠한 채 행위 하는 것은 ‘예술’이지만 종로2가로 진출하면 단속 처리되는 이유가 바로 이 ‘분할’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는 ‘예술가는 예술가 스러워야’ 한다고 이 분할을 돕는다. 대중매체가 전형화 한 알콜중독, 줄담배와 난삽한 섹스를 즐기는 예술가는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삶에 자양분이 되는 ‘특별한’ 집단이기에 어느 정도 우리가 수용해줄 필요가 있다는 식인데 그 ‘어느 정도’ 라는 것이 인사동골목과 대학로 지하 소극장등인 셈이다. 그 밖으로 이탈해서 일반인들의 삶에 침투 되어서는 곤란하다. 왕따로 남아있어야 하며 별도의 관리대상 이다.

이러한 분할에 <19금>은 물론 시어터퍼포먼스(블랙박스) 와 미술(화이트큐브)을 횡단하고자   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술과 연극 양쪽으로 부터의 탈주’라고 한 김해주의 리뷰(아트인컬쳐)가 맞다. 다만 2회 <19금>에 대한 ‘포디움 설치로 인한 객석과 무대구분’ 지적은 흥미롭다. 반 이분법 전통의 공연예술계측에선 그것을 부정적으로 본 반면, 미술계측 특히 참여 작가들은 포디움과 간단한 조명세팅이 유발하는 약간의 긴장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화이트큐브에서 무대와 객석을 설치하는 유사극장의 형태는 ‘블랙박스 되기’ 로서 탈주를 가능케 한다. 오히려 그것이 없다면 화이트큐브의 컨벤셔널한 퍼포먼스 파티가 되지 않았을까.  블랙박스 ‘되기’는 들뢰즈가 설명하는바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대상을 전제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화이트큐브 자체의 콘텍스트로 인해, 아르코대극장의 조명,객석등 모든 실내장치들을 떼어내어 옮겨 놓는다고 해도 갤러리는 결코 블랙박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세속화된 탈속

<19금>은 2011년 공간해밀톤(이태원)에서의 1회 행사와 마찬가지로 꽤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놀라와 하는 점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아트 피플 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19금은 거의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많은 관객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그 이유는 참여한 10개 팀의 라인업이 탁월했기 때문도, 기획측(podopodo.net)이 남다른 홍보 채널을 가진 때문도 아니었다. 별다른 홍보 없이 관객을 모은 이유는 차라리 TV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또는 ‘슈스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요인과 유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쥬 아감벤은 저서 <세속화 예찬>을 통해 ‘고대사회에서 세속화는 성스럽거나 종교적인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되돌리는 것‘ 이며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구조, 즉 장치-소비-사적소유로 이뤄진 분리 일체를 전복하는 전략으로 보았는데 세속화 과정의 대표적인 장치로서 놀이를 예로 든다.  <19금>은 아감벤이 예를든 축구가 그렇듯 룰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19분간의 퍼포먼스와 짧은 세팅이라는 시간제한 이다. 19분 룰은 손쉽게 블랙박스와 화이트 큐브로부터 ’목적에 대한 관계로부터 해방된 실천(아감벤)‘을 가능케 하여 이도저도 아니면서 공유가 가능해진 만만한 퍼포먼스가 된다. 아감벤은 말한다. ’새로운 사용의 창조는 오래된 사용을 무위로 만들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퍼포먼스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접촉’으로서 세속화 되지 못하고 있었을까. 2000년대 시각예술계에서 퍼포먼스씬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난세기부터 명맥을 이어오는 몇 개의 행사가 있었으나 동시대성과의 접점으로부터 거리가 있었고, 시어터 퍼포먼스는 탈 블랙박스가 여전히 요원했으며 ‘관계적 미학’을 충실히 구현한 몇몇 전시회 오프닝 행사의 퍼포먼스들은 작가작품의 연장으로서 단발적 해프닝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퍼포먼스 씬이 고사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플럭서스와 개념미술을 거치면서 기존예술의 가치에 대한 전복의 실천으로서 효과적이었던 퍼포먼스가 그 성공으로 인해 성스러운 권좌에 오름으로서 탈속화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19금>은 ‘나가수’나 ‘슈스케’처럼 경쟁을 통한 리얼리티쇼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주어진 19분이란 룰은 묘하게 그것들과 유사한 효과를 발휘한다. 10개 팀의 작가들을 독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경쟁하면서 탈속화된 퍼포먼스를 세속화 한다. 특별한 홍보 없이 관객들이 찾아오고 또한 적극적으로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역시 19금의 세속화 때문으로 본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서의 <19금>

“.....그러나 <19금>은 개별 작품의 호오나 평가로 볼수 없는 기획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참여하는 관계적 구조 내에서 사회적 틈을 생산하는 프로젝트 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틈이란 협력적인 체계로서 예술 실천이 출현하는 장이며, 그 실천들의 관계망 자체이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실시간 일파만파로 전파되는 사회.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의 공모가 가속화되는 통제 사회에서 지금 여기, 오늘의 현장에서, 함께 예술의 공동적인 것의 체험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 내의 감성체제에 요동을 가하는 일이다.“(김남수/아티클)

<19금>이 하룻밤동안 이나마 ‘순간의 공동체’를 촉발해내는 지점의 성공에 대해 유보적 입장으로 쓴 김남수의 지적 역시 옳다. 10개 팀과 한 개의 오프닝밴드를 선발하는 과정은 좋게 말해 기획자 개인의 ‘소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SNS로 참여여부를 의뢰, 20개 남짓의 팀중 시간이 허락되는 예술가 10개 팀이 답장을 보내와서 참여하였으므로 나쁘게 말해 ‘대충 주변에 아는 작가들’이 선택되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작가들과의 소통은 모두 SNS를 통해 이루어 졌고  행사당일 며칠 전 불과 한차례의 작가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19금>은 개별 작품의 강도나 평가 보다는 기획의 태도와 그것의 구현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닌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10개 팀 개별 작업의 완성도나 작가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기획 측에서 걱정한다고 별반 도움이 될 일도 아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19금>의 룰이 갖고 있는 틀이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유도 해낼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19금>이 ‘예술이 이 시간을 분할하고 저 공간을 채우는 방식(랑시에르)’ 으로 탈주되어 ‘순간의 공동체’로서 기능을 해냈는지 에 대한 평가는 기획주체로서 답을 할 자격도 없고, 그것을 가늠할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19금>기획의 태도로서, 531일간 대기업에 맞서 자발적인 공연과 토론으로 이어져오면서 승리한 ‘홍대 두리반’에 대해 유념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SNS' 가 아니라 진정한 장소와 몸의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서비스‘로서 , 홍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과 지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531일간의 공동체를 구성해 냈던 자생적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19금>은 특정한 타깃목표를 갖고 있었던 ’두리반 퍼포먼스‘와는 그 태생적 DNA 자체가 다르다. 두리반에 비한다면 심하게 엘리트적이며 세련된 모습의<19금>은 특정한 주제나 목적을 상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공유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무위(無爲)로서  탈주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고민한다. 예술로서, ’SNS‘ 가 아니라 진정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란 어떤 것일까.


나는 퍼포먼스다

다행히도 (다원예술이 아니라) 퍼포먼스에 그 답이 있다고 본다. ‘퍼포먼스’란 용어는 퍼포밍아트나  다원예술도 아니며 해프닝이나 행위예술등과 근친관계에 있지만 그것들의 분할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명칭이 아닐까. ‘어떤 과정의 도구’ 정도로 해석되는 어원을 갖고 있는 그 명칭은 다원예술이나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 또는 심지어는(!) 커뮤니티 아트 등으로 혐오스럽게 분할된 명칭에 비한다면 퍼포먼스라는 명칭은 왠지 추상적이며 메타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나 특정하지 않아서 좋다.  (대체 언제 예술이 다원적이지 않았고 커뮤니티 베이스드 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21세기, 퍼포먼스는 이제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여 버리는’ 자본의 탐욕으로 부터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의 마지막 보루로 평가 받는 분위기다. 물론 그것은 퍼포먼스의 태생적 비 물질성으로 인한 교환 불가능성 때문 일터이다. <19금>은 이것에 추가하여 ‘누군가(somebody) 로부터 누구나(anybody)’ 로의 이동을 꿈꾼다. (이것은 ‘어딘가’로부터 ‘어디서나’로 확장될 수도 있다.)  연출가-배우-연극애호가 로부터 ‘누구나’로 확장되어 목적에 대한 관계로부터 해방된 실천이 가능 하지 않을까. 다만 그것은 ‘나는 가수다’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해 아감벤이 지적하는 ‘환속화’<1> 또는 관객이나 커뮤니티에 앞서 감정을 디맨딩하는 하이에라키로 다시 포섭되지 않아야 함을 조건으로 해야 할 것이다.

 

 

<1>아감벤의 ‘환속화’ ; 아감벤은 모든 놀이가 세속화인 것은 아니라며 환속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시골 무도회장의 탱고 레슨이나 텔레비전의 게임쇼는 새로운 예배의식의 일부일뿐, 환속화란 자신이 다루는 힘을 그저 한곳에서 다른곳으로 옮기기만 함으로써 이 힘을 고스란히 내버려둔다‘ 고 설명한다.

글 홍성민 (작가, 계원예술대학 교수) / 2012 <판>지



길종상가의 박가공과 현시원 골든

부추라마 없는 부추라마

신윤예 홍성재 19금 노동

송호준 어제 오늘 그리고

옥인콜렉티브 작전명 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

 

옥인콜렉티브 작전명 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

디릌플라이슈만 마이프로페서헤르만니취

홍성민 영화


행사 당일 루프 전경

 

 2011년 11월11일 동영상.  오후 6:0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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