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UM ROUND TABLE

shere

왜 사운드 (아트) 인가

2010-08-10  

논점:
1) 사운드 아트란 무엇인가. 왜 갑자기 사운드가 유행인가.
2) 기존 예술과는 별도로 사운드 아트 기획이 필요할까.
3) 이제 이미지와 소리는 어떤 새로운 관계를 갖을 수 있을까.
4) 사운드 아티스트는 어쩔 수 없이 존케이지((John Cage))의 후예인가.
5) 동양의 사운드란 무엇일까.
6) 사운드를 교육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7)무엇이 사운드아트를 정치적으로 만드는가.
8) 사운드에서 임프로비제이션은 무엇인가.
9) 사운드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사운드 아트란 어떤것들인가.

패널:
김남윤: 사운드 엔지니어
김영은: 문자와 소리의 비지시성을 다루는 아티스트
류한길: 전자즉흥음악과 사운드 설치 중심의 사운드 아티스트
성기완: 뮤지션,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
최수환: 사운드 아티스트,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홍철기: 노이즈·즉흥 음악의 사운드 아티스트
홍성민: 예술가

장소: 문지문화원 사이
기록: 심효원


홍성민: 모여 주셔서 감사하다.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기 위해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사운드 아트(Sound Art)는 무엇인가? 왜 갑자기 유행인가? 90년대 비디오 아트의 유행이 2000년대 사운드 아트로 넘어온 것 같다. 비디오 아트가 그랬듯 선정적인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김영은: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는 3-4년 전부터 회자되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그 전에는 정지된 이미지로써 회화나 조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타임베이스인 비디오아트, 그 다음에 사운드인 것 같다. 서양에 비해서 늦은 현상이다.

홍철기: 이미 유행이 지난 것 아닌가? (웃음) 요즘은 관심이 고갈된 느낌이다.

홍성민: 고착기에 들어갔다는 말일 수 있겠다.

최수환: 사운드아트는 해외에서도 학문적으로 책이 거의 없다. 유행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데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부족해 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운드 아트'란 용어 자체가 미술 쪽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그런 흐름들을 음악 쪽에서는 '실험음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를 다시 음악 쪽에서 새로운 음악 용어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홍철기: 실험음악, 아방가르드 음악 등 두 가지 용어가 있긴 했지만 학교 밖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존 케이지 이후에 나온 사운드들을 미국 쪽에서는 실험음악이라고 하고, 유럽쪽에서는 아방가르드 음악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최수환: 그런데 실험음악의 역사도 거슬러 올라가면 존 케이지보다 미래주의가 원조이다.

홍철기: 사운드 아트는 실험음악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학교의 실험음악은 아니고, 미술에 걸쳐 있거나 아예 미술계에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언더그라운드의 실험음악과 미술계의 사운드 아트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감이 있다.

홍성민: 그렇다. 외국에도 미술대학에 사운드 수업이 있다. 왜 사운드 아트는 음악보다 미술 쪽에서 탄력을 받았을까? 또한 사운드 아트란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융합(convergence)을 외치는 시대에 그렇게 ‘소리’를 또 강조해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과거 인터랙티브아트나 넷아트 또는 비디오아트란 용어가 이젠 무용화된 것처럼 말이다.

성기완: 영화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폴리음 같은 효과음들을 기술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시기가 토킹 영화 이후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소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생긴 것 같다. 그러한 소리는 사람들이 예술이다, 아니다를 따지지 않고 많이 들어 왔었다. ‘듣는다’는 행위가 중요한 활동이 되면서부터는 들리는 것을 본다는 행위와 혼동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단절이 생겼다. 아무리 실험적인 공연이라도 듣는 행위를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것보다는 먼저 새로운 미학적 검토가 필요한 것 같다. 듣는 행위가 중층화 된다고 할까? 이는 서양에서도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일련의 문화적 활동이 계속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고 전시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개념적 엇나감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미학적 검토가 필요하고 실상 그 검토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는 행위에 포함시키지 않고 분리해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른 행위들이 이미 존재해 왔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든지 그 사실을 미술관에서 점차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든지 말이다. 그 근본은 듣는 행위가 무엇인지 검토를 요구하는 데에서 온다. 서양에서도 보는 행위에 비해 듣는 행위에 대해서는 철학적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인 사유는 발전시킬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철학은 듣는 행위와는 거의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홍성민: 뒤늦게 사운드아트를 수용했기 때문에 아직 규정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석적 연구의 전통이 있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란 점은 흥미롭다. 첫 번째는 컨버전스(convergence, 융합)가 그럴 것이고, 두 번째는 보조적이었던 청각과 중심에 있었던 시각의 전통적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 예를 들면 사운드 퍼포먼스 같은 경우에 규정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기완: 그것은 출발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든 서양이든, 사운드를 다루는 사람들이 보는 행위와 듣는 행위가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 의지를 가지고 드러내는 것. 이제는 듣는다는 행위를 부각시킨다는 것, 미학적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미술 쪽에서는 듣는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홍성민: 다시 한번 묻겠다. 사운드 아트란 무엇인가?

성기완: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철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실험음악, 그러니까 학교 밖과 관련된 무엇이다. 음악이 아닌 다른 많은 작업들을 포괄하다 보니 하나의 규정된 명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가 포섭된 형태인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사운드아트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운드아티스트라고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경우에는 실험음악을 사운드아트라고 말하긴 하지만 그 뒤에는 어떤 문화적 배경이 있는 것 같고 내가 접했던 유럽의 몇몇 경우는 그것을 사운드 아트가 아니라고 했다. 외연은 어느 정도 있지만 그 내용은 학교에서 다루지 않았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학교에서 다룰 수 없었던’,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음악이라고 해도 테이프 음악으로는 포괄이 안 되는 것들이 60,70년대에 있었다. 또한 1910년 초 소음기계를 만들고 미래주의 선언문 ‘Art of Noise’도 썼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같은 경우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었다. 그는 활동했던 시점이 증폭 스피커가 개발되기 전, 즉 기술적으로 발전이 덜 된 시대여서 사라진 경우이다.

최수환: 문헌을 기준으로 삼자면 사운드아트라는 용어는 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사운드아트를 규정하는 건 아직 시기 상조인 것 같다. 그 용어는 90년대에 등장했지만,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60년대 혹은 미래주의까지 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의하기가 애매하다. 나는 그 의미를 매우 광범위하게 보고 있다. 음악, 미술, 공연,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사운드아트가 어떤 장르든지 소리를 주매체나 재료로 삼으면서 전통적 패러다임을 벗어난 예술 작업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김남윤: 나는 사운드아트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사운드 아트는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변화로 인해 발달한 것 같다. 아까 1910년대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 때 시도는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기술이 따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존 케이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기존의 잘 갖춰진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같은 방식으로 지금의 사운드아트는 기술과 접목되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무엇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성기완: 사운드디자인이란 용어가 있지 않는가, 사운드아트와는 방향이 다르지만 더 포괄적인 것 같기도 하다.

최수환: 그것은 시각미술에서의 아트와 디자인의 관계와 비슷할 것 같다. 사운드아트는 전통이 있고 순수하게 미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반면 사운드디자인은 근래에 등장한 것이다.

성기완: 그 둘을 구분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홍대 전철역의 공간적인 특성을 활용해 사운드 설치를 한다면 그것은 사운드아트일 수도 있고 공간에 대한 사운드 디자인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로 사운드 아트 분야에서 발전을 이룬 스타워즈 영화의 각종 효과음을 들 수 있겠다.

홍성민: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처럼 양자간에 접점이 있을 것 같다.

성기완: 홍철기씨가 사운드아트를 음악이 아닌 소리를 다루는 모든 활동이라고 정의했는데, 음악과 음악이 아닌 것의 구분에 의문이 든다.

홍철기: 내가 말한 소리의 의미는 학교와 전통적인 현대음악이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사실 좋은 음대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기준은 극히 일부의 기준이고 그것을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최수환: 음악에서 다루지 않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실험음악, 아방가르드 음악, 소닉 아트 등의 용어들이 많이 있다.

김영은: 사실 사운드 아트라는 용어는 음악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밖에서 규정을 해 준 것이다. 미술에서 사운드 아트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단순하게 쓰이는 경향이 있다. 처음엔 작품의 제작과 감상이 시각 위주였다가 감각의 확장이라는 이슈가 대두되고 그에 따른 일련의 예술 활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소개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용어가 필요했다. 기존의 것들과 차별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말이다.

김남윤: 그렇다면 미술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나?

김영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운드아트를 너무 일반화시켜 가장자리를 다듬어 낸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홍성민: 선정적이라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미래주의나 다다이즘 때의 시나 퍼포먼스는 청각적 요소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컨버전스의 느낌이 강했다. 존케이지 이후에는 통섭적인 부분은 빠지고 비디오아트나 넷아트 같은 용어가 그랬듯 이름됨으로서 배타적으로 확장성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운드아티스트는 사운드 아트에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성기완: 그 용어는 또한 말할 때의 정치적인 의도와 관련이 있겠다. 최수환씨는 소리 다루기가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최수환: 곤란한 질문인데, 나 자신은 스스로를 부분적으로 음악가이기도 하고 사운드아티스트 혹은 미디어아티스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홍철기: 음악과 사운드 아트에 대해 내가 마음대로 정의한 바는 다음과 같다. 음악은 소리에 있어서 시간관계를 다루고, 사운드아트는 소리와 공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물론 작업에 따라서 다를 수는 있지만 말이다.

홍성민: '소리와 공간의 관계'라는 말로 조금 명쾌해지는 것 같다. 두번째 질문을 하겠다. 사운드아트 대형 기획전에 대한 것인데, 본격적으로 사운드아트를 소개한 SFX(Sound Effects Seoul)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것의 득과 실이 있을 수 있다. 공간 해밀톤의 디렉팅을 맡고 있는 내 얼굴에 침을 뱉는건진 모르겠지만, 공간 해밀톤에서 열린 금년 제3회 SFX 전시는 과거 기획에 비해 그 주제와 구현에서 실망스러웠다. 서울시의 미디어관련 페스티벌처럼, 결국 배타적인 태도가 접점을 빼버리고 근친상간이 됨으로써 열성화되어가기 때문은 아닐까?

성기완: 나 역시 그 전시가 실망스러웠다.

홍성민: 물론 홍대 앞 뮤지션등을 소개하는 마포지역 해적방송같은 작년의 시도는 흥미로웠고, 저예산으로 사운드 아트를 소개하려는 기획자들의 열정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운드 전시란 어떤 것인지 묻는것이다.

김영은: 사운드 아트로 기획된 전시는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계가 새로 나오면 매뉴얼을 제시해주듯, 감상법의 제시로써 사운드아트 기획이 나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SFX 같은 기획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류한길: 나는 초반 전시 기획 당시 내부자였다. 기획 의도가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태도가 불순한 부분이 있었다.

홍철기: 어떤 것인가?

류한길: 그 시점의 미술계와 다른 평론가와 얘기한 적 있었는데 시각미술을 다루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루고자 하는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더 강해졌다. 매체는 폭넓어졌는데 자신들이 알고 활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새로움이 있으면 그에 대한 경쟁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큐레이터는 신기한 것에 대한 강박감이 있다. 그 시점에 사운드 담론이 생산된다기보다는 물타기 기획들이 난립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쌈지에서도 기획을 할 당시 나에게 연락을 해 여러가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좀 더 핵심적인 내용을 가지고 담론화 시켜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여러 레퍼런스를 제공하고 기존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해줬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나선 우울했다. 물타기의 한 줄 코멘트 거리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말이다.

홍성민: 그렇다면 이상적인 기획은 어떤 것인가?

류한길: 글쎄, 나 또한 기획을 하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는 부분은 사운드 그 자체에 대한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는 작품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기획안으로 보았을 때 그냥 시각미술 혹은 컨셉추얼 아트인데, 단지 소리의 요소가 있다고 사운드아트로 바뀌는 기획이 거슬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운드 자체에 관한 작품을 선별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전시의 결과를 예측해보면 불친절하고 어려운 행사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예전에 제이슨 칸(Jason Kahn)의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그 쪽 관계자들은 추후 감사가 걱정된다고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관련자들이 전시를 보러 와서는 들리는 것에 대해서 인지를 하지 못해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성기완: 이 부분에서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왜 사운드인가? 근본적인 질문이 없었다. 사운드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럼 왜 갤러리인가? 이런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 없었다. 두 번째, 갤러리에서 비디오, 퍼포먼스 등 듀레이션을 다룬 지 3-40년 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운드가 수반된다. 그 사운드를 어떻게 갤러리에 배치를 시키느냐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소리가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하면 되지 않느냐, 소리의 질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김영은: 전시를 해보면서 느낀 것은 전시공간 자체가 만들어질 때부터 소리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장비도 마찬가지이다. 이쪽저쪽 소리가 섞이거나 울림이 심하거나 하는 문제점들이 많은데 작가들만 곤란해하지 진행자들은 인지 못한다.

홍성민: 갤러리 공간 자체가 사운드라는 프레임과 걸맞지 않는 부분이 있겠다. 그렇다면 기획을 한다면 어디서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기획이 사운드아트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인가?

류한길: 사운드아트가 아니라 사운드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사운드 자체에 물리적인 가능성이 많다. 음악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신기한 소리에 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색다른 소리를 집어넣기 위한 가공을 많이 한다. 그러나 사운드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사운드는 공기 중의 진동현상이므로 물리적으로 바뀔 수 있다. 내 작업을 예로 든다면, 스피커에다 저주파를 넣으면 소리는 들리지 않다. 그러나 스피커는 움직인다. 그 운동 자체가 사운드에 의한 운동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움직임에 대한 문제로 바꾸어볼 수 있다.

홍철기: 한국에서의 내 경험으로 보자면 큐레이팅을 하는 사람의 리서치가 잘 안되어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 어떤 아티스트들이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몇 번 해보지 않았지만 공연을 하러 가보면 사운드 장비들도 전혀 없다. 공간 문제는 갤러리도 괜찮고 클럽도 괜찮지만, 클럽은 DJ나 밴드에 맞 져 있어서 텅 빈 갤러리가 차라리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류한길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운드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 기본적으로 큐레이터들의 리서치 없이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전시는 인지도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사실은 사운드에서 현재 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좋은 기획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류한길: 연속적인 전시가 있어도 연관성이 서로 없다. 연속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앞과 뒤가 전혀 다르다.

김남윤: 그러면 외국 사운드 아티스트는 외국에서 어떤 식으로 전시를 하는가?

류한길: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최소한 기획에서 논의되는 지점들에서 많이 차이가 난다. 그들은 역사성의 인식이 있고 리서치도 강하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한다. 물론 공간적인 한계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알고 어떤 틈새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들어보면 우리와 다르다. 같은 작가가 비슷한 조건에서 전시를 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

김남윤: 소리는 전달방식이나 공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들리고 감성에도 차이가 난다. 소리는 공간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걸 감안해야만 한다.

홍성민: 물론이다. 물리적인 완성도, 그리고 개념적인 완성도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몇 개월만에 만들어지는 미술비엔날레도 마찬가지겠다.

류한길: 그러나 사운드 쪽에서 담론에 대한 갈증이 너무 심하다.

홍성민: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사운드 쪽에서 기획자가 나오거나 웹사이트를 만드는 등 자발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 아닌가.

김영은: 사운드아트 전시장에 들어왔을 때 볼 것이 없어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 여전히 있기 때문에 전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는 매체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작가가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들 위에 독특한 주제를 포함해서 내보여야 한다.

성기완: 미디어아트의 접근과는 달라야 한다. 미디어 아트처럼 정보가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가 될 경우에는, 사운드, 영상 등 데이터이기때문에 호환의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데이터들을 다루는 아티스트들 작업의 큐레이팅은 또 다를 것 같다.

최수환: 이제 미디어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디지털은 어떤 정보든지 다 포함하기 때문에 수(數)로 표현이 된다. 사운드 아트의 기획에 대해서는 앞에서 답이 다 나왔다. 소리, 문화, 역사 등에 관해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리 자체가 다양하게 많이 생기고 있다. 기존의 소리 문화에서는 기획을 잘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갤러리 쪽으로 끌어오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홍성민: 세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사운드나 청각은 왜 시각이나 미술에 비해 역사적으로 보조적이었는가? 앞으로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시각은 청각에 우선되어 왔다.

성기완: 여기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은 시각이 보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홍성민: 그런가? 오감 중에 모두를 잃고 단 하나의 감각만 남긴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김영은: 미각은 남기겠다.

홍철기: 청각. 아니 남는 게 아니라 빠지는 거라고? 그렇다면 후각.

류한길: 시각.

홍성민: 마샬 매클루언이 『쿠덴베르크의 은하계』에서 말하듯 인쇄술의 발명 이후 우리가 모든 감각을 시각으로 ‘번역’ 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왜 사운드가 보조적 상태가 되었을까.

최수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시각이 주요한 감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생존에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홍철기: 사냥 수렵시대엔 중요했다. 물론 지금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최수환: 현대 사회로 갈수록 시각이 청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보다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기완: 나는 거꾸로 본다. 그렇게 시각이 중요한 것은 낮이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밤이 중요한 동물들은 시각이 거의 필요없다. 또한 남자에 비해서 여자가 밤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여자들은 청각적으로 더 발달된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어두울 때 아이들을 끌어안을 때나 그럴 때가 있다.

홍철기: 이건 다른 문제인데, 과거로 가더라도 신성화와 연관되는 건 청각적인 부분에서였다. 천둥소리, 큰 소리 등이 신화화 되는 것 같이.

성기완: 예를 들어 맘보라는 춤의 어원은 아프리카 말인데, 신과의 대화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소리로 온다는 인식일 것이다.

홍성민: 청각은 사라져 버린다. 부재하기 때문에 비가시적인 신화적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김영은: 인간이 태어날 때 오감 중에서 청각이 제일 먼저 열리고, 죽을 때 제일 늦게 닫히는 것 역시 청각이라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류한길: 역사적으로는 기계기술과 관련이 있다. 시각에 대한 기록이 먼저 진행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야 청각의 기록이 가능해졌다. 기록 이전 시대에는 추상적이고 포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방식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록이 가능한 이후에 많이 달라졌다.

홍성민: 이미지와 사운드 관계에 관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는가? 관계를 역전하거나 해체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최수환: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생각이 변하고 있다. 존 마에다(John Maeda)는 『Design by Numbers』에서 디지털의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 수단이 ‘수(數)’라고 말했다. 그것은 디지털 방식에서 모든 감각들이 교환 혹은 교란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디지털 예술, 알고리즘 아트 등 수를 다루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은 실제가 아닌 가상이며 수적인 모방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지금은 이미지와 소리가 굉장히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홍철기: 같지는 않다. 디지털이 아니더라도…

최수환: 소리는 파동 혹은 입자고 모든 걸 파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홍철기: 아날로그에서도 소리는 전기신호로 이뤄진다. 비디오도 인풋, 아웃풋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창조행위로써의 예술 행위를 할 때에는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비디오를 넣었다 빼는 백남준처럼. 혹은 pdf, jpg를 wav로 바꾸는 것처럼. 어떻게 물질의 번역 체계를 만드느냐에 따라 창조성이 나오는 것 같다.

최수환: 이미지와 소리는 다른 매체이다.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 비어있는 매체이다. 이미지도 소리도 결국 내용을 담는 매체일 뿐이다. 내용에 따라서 묶을 수도 있고 분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매체보다 의미가 더 중요한 것 같다.

홍성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전에 했던 건축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컴퓨터의 등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드로잉 실력이 떨어졌다는 말도 있고. 그러나 미술에서는 사실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 소리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송호준씨가 유투브를 콜라지하는 퍼포먼스를 본적이 있는데, 담론적 차원에서 컴퓨터가 사운드에 미친 영향은 어떤것인가?

김영은: 나 같은 경우에는 컴퓨터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것이 녹음기의 발전된 형태와 편집장비 이상의 큰 의미가 없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이미지나 소리다. 둘 다 언어적인 것이다. 문자 전 음성 언어가 있었지 않은가. 기억력 한계로 인해 기억을 못믿게 되면서 기록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기록 자체에 의존하게 되면서 청각에서 차차 시각 문자로 권력이 이동되었다. 나는 소리와 이미지의 최초의 싸움에 관심이 있지 디지털적,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른다. 일단 내용적인 부분에서 출발을 해서 서사와 작업의 최종 형식 안에서 이미지와 소리가 어떻게 대등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이미지가 소리에 종속될 수 있을까에 관해서 생각한다.

김남윤: 건축은 계산적인 부분 때문에 컴퓨터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날로그 시절엔 정확성이 떨어진다. 내가 원하는 음색을 내고 싶었지만 낼 수가 없었고 기계의 색에 덧입혀지면서 내 의도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녹음한 후에 컴퓨터로 들어오면 숫자로 변화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다. 즉 사운드 아트에서도 컴퓨터가 생긴 이후로 또 다른 면에서 새로운 창조성이 나오지 않나 싶다.

홍철기: 내 생각에는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심지어 컴퓨터도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컴퓨터로는 녹음이나 재현이 힘들다고 본다. 그보다 컴퓨터가 주는 보급, 대중화가 중요하다. 내 경우에는 멀티트랙작업을 할때 테이프로 녹음을 하다가 컴퓨터로 했을 때는 안 좋은 녹음이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폭발적인 성장의 원인은 정밀한 하이테크놀로지라기보다 아무나 쓰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성기완: 뭐 둘 다 있겠다. 하나는 정보의 민주화이다. 나머지 하나는 결과의 기대치. 소리가 깎이기 때문에 덜 풍부해 질 수는 있겠지만 수치화시키니 일정해진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결과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홍철기씨 말대로 수 천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향평준화일 수 있다. 옛날엔 아날로그 기계가 몇 천 만원씩하니 연구소만 기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다. 슈톡하우젠이나 프랑스에서 구체 음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권력들, 라디오 연구소들 때문이었다.

홍철기: 여전히 디지털 시대에도 필름이 필요한 이유가 컨버팅(converting, 변환)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김남윤: 그것보다 느낌의 차이, 기호의 문제라고 본다. 디지털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기완: 김영은씨가 몰라도 되는 이유는 김남윤씨같은 사운드 엔지니어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웃음). 실제로 컴퓨터 없이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홍성민: 4번 질문이다. 사운드 아티스트들에게 존 케이지(John Cage)는 어떤 의미인가? 그러니까 사운드 아트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에 관한 의미로 이 질문을 받아 들이면 될 것 같다. 예전에 공간 해밀톤 파티에서 화이트 헤르츠(White Hertz)라는 팀이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낯선 젊은 작가들이어서 나는 공연 직전까지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그것을 보고 젊은 세대의 새로운 사운드 연구 방식과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 궁금해졌다. 존 케이지가 관객들과 라디오 스테이션을 가지고 한 것처럼, 물론 그 효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들중 한명이 라디오 스테이션으로 즉흥 비트음악을 선보였다. 그런 것들에 관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솔직히 미술에서 마르셀 뒤샹과 그 영향에 관해 물어 보는 것과 비슷한, 좀 바보 같은 질문이기는 하다.

최수환: 나는 소리를 매체로 보고 소리의 기능성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 말하자면 존 케이지의 반대쪽에 서 있는 셈이다. 소리의 기능성이란 원래 용도를 말한다. 원래 소리는 경고, 알람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시대가 흐르면서 소리가 감정을 다루는 것이 되었다.

홍성민: 그런 건 이미 편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앰뷸런스나 소녀시대의 기능처럼 말이다.

최수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대중음악은 기능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기능은 목적에 맞게 연구되고 거기에 맞게 기능하는 것인데, 대중음악은 연구된다기보다는 자본논리에 따라 소비되는 것이다.

김영은: 기능적인 음악에서 말하자면, 옛날에 에릭 사티(Erik Satie)가 퍼니쳐 뮤직(furniture music)으로 유행했을 때처럼, 그것이 실제로 기능한다는 보장은 없어도 시도는 가능하다.


에릭 사티, 퍼니쳐 뮤직

홍성민: 퍼니쳐 뮤직이 무엇인가?

최수환: 그 이전에 음악은 작곡가와 제작자의 일방적으로 정보 전달로 상위 레벨에 있었는데 에릭 사티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음악을 전경에서 배경으로 낮추었다. 그런 것이 퍼니쳐 음악이다. 또한 미국 레이블 '뮤작(Muzak)'이 논란이 있긴 하지만 기능성 음악을 많이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위한 음악, 공장의 생산성 높이기 위한 음악, 상점의 매출을 높이기 위한 음악 같은 것들이 있다. 뮤작은 어떤 소리, 어떤 주파수, 어떤 리듬이 목적에 맞는지에 따라 음악을 만든다.

김남윤: 브라이안 이노(Brian Eno)는?

최수환: 그는 리서치를 바탕으로 하지는 않았다.

김남윤: 그래도 이노의 앨범 「Music for Airport」같은 경우에 비행기 공포가 있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라고 만들었지 않았는가?

최수환: 그것은 개념적인 접근이었던 것 같다

김영은: 이노는 시카고 공항의 13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에릭 사티는 또 다르다.

최수환: 내가 요즘 관심을 가지는 영국 뮤지션 코넬리우스 카듀(Conelius Cardew)는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이나 존 케이지를 소리의 표현 방식에서 비판하였다. 카듀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음악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철기: 카듀의 비판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스톡하우젠이 그렇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존케이지는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케이지는 소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가 잘 인용하는 말이 있는데 "음악당 옆 트럭 소리와 공장 옆을 지나가는 트럭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음악적인가?"라는 것이다. 일종의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케이지가 어떤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의 근본에 대한 문제를 던졌기 때문에 중요하다.

홍성민: 자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동양의 소리란 무엇인가? 동양의 그것은 서양에 비해 넌리니어(non-linear)한가?

성기완: 그것은 존 케이지와 관련지을 수 있는 질문인 것 같다. 리얼타임(real-time)의 개념이 있지 않는가. 소리는 편집이 가능하더라도 그 순간의 리얼타임으로 겪을 수 밖에 없다. 영상은 굉장한 편집이가능하고 영화도 그렇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3초 만에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리는 그런 식의 커팅들이 리얼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 같다.

홍성민: 아무래도 일회성이지 않은가, 공기의 파동이 있는.

성기완: 그것이 단절이 되면 소리는 끝나는 것이다. 존케이지가 보여준 것은 리얼타임으로써의 소리였다. ‘지금 왜 소리냐?’는 주제와 관련을 시켜보면 사람들에게 그런 리얼타임의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소리가 아닐까. 리얼타임이란 실제로 겪는 시간, 즉 동시성을 의미한다. 비가역성일 수도 있고 끊을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니까 끊기면 끝난다는 것. 그런데 4분 33초 동안 끊기지 않았다는 것. 그 끊기지 않는 시간 동안 들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 다 음악이었다는 것. 그러나 지금의 시간은 어느 정도 리얼타임이 배제된 시간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러 곳을 동시에 트위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과거, 현재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정한 시간을 리얼하게 겪는다는 것, 삶이 시간을 베이스로 삼고 있다는 것. 그것을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소리가 아닐까. 미술 공간이나 다른 여러 공간에서 소리를 다루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런 부분이고, 그런 면에서 존 케이지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리얼타임을 체험하게 해주는 지속적인 소리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동양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네 인생이 지금 끝나도 너는 옛날부터 있었고 어떻게든 지속될 것이다라는… 이렇게 말하면 약간 미친 놈처럼 들리긴 하겠다.

홍성민: 소리에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것인가?

성기완: 관념적일 수도 있고. 현대 물리학과 연결이 되면 입자나 파동에 의한 존재랄까, 나를 넘어서 느끼게 해주는 것. 그리고 다른 요소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런 면을 소리가 더 많이 담보해준다. 말하자면 3분짜리 음악을 들으려면 3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활에 그런 부분이 빠져 있으니까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홍철기: 동양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모르겠는데, 소리가 넘쳐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뿌연 안개 같은 상황에서 구체적인 감각으로 전달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존 케이지가 썼던 방법들이 의미, 무의미의 문제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소리나 연주 방법들을 다 무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두를 뺐을 때 결과적으로 특정한 소리가 구체적으로 느껴지고 들려지는 상황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런 부분에서 존 케이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 측면이 있다.

김영은: 같은 맥락에서 나는 기형도의 「소리의 뼈」라는 시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 시의 내용은 한 교수가 있는데 한 학기 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나중에 학생들에게 소리의 뼈가 무엇인지 묻는다. 학생들에게 소리의 뼈를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소리의 뼈가 무엇이냐고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시간에 물어 본 적이 있다. 어떤 학생은 타이포그라피에 관심이 있는데 문자들 사이의 공백인 것 같다고 했고, 한 학생은 스피치의 욕망, 즉 말하고 싶은 욕망과 사운드 사이의 싸움이라고 했었다.

류한길: 나는 개인적으로 동양적인 사운드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소리를 사운드아트를 하는 사람들이 생산하는 특정 소리에 국한을 시킬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매체를 사용하지 않는가.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일본의 한 작가는 매체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매체가 구성되는 알고리즘 자체는 이미 서구에서 작성되었고 그래서 서구적 인식들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악기, 컴퓨터까지 다 말이다. 자본이 얽히면서 우리가 매체를 사용한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사실은 사용을 허가받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홍성민: 동양의 사운드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운드의 인식이라든지, 음악적인 코딩 이전의 사운드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류한길: 그 일본 작가가 한국 작가들에게 이러한 환경 하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어떠한 접근을 하는지에 대해 물었었다. 전시 등으로 드러나는 결과, 형식이나 방식들 그 자체에서 중요하고 미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기능하는 것은 미시적으로 드러난 효과에 멈춰있는 단계이고, 실제 작동하는 기제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홍철기: 동양의 사운드는 우리들에게도 단절된 과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연결 지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문화적, 역사적, 인류학적으로 보더라도 동양의 사운드가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 작가 중에 전통적인 밥 짓는 기구로 물을 끓여 발생시킨 증기를 오실레이터처럼 이용하는 작업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 자체가 동양적이 되는가.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류한길: 거기에 많은 오해와 착각이 있다. 동양적인 무엇이라고 하면 일단 시각적으로 연상이 되지 않는가.

최수환: 사실 동양적인 사운드는 스케일이라든지 어느 정도 정해진 부분이 있다. 얼핏 들어도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음악이 있지 않은가. 실제로 인도나 한국은 음계가 정해져 있기도 하고.

홍철기: 그렇다고 간단히 동양적인 것이 성립이 되는 건 아니다.

류한길: 정확치는 않지만 특정 소리들이 배치되는 형식에서 동양적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 리듬 짜는 형식에 있어서 말이다.

성기완: 대중음악에서 굉장히 특이한 조건이 있는데 전세계 사람들이 듣는 음악에서 90%가 서양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소녀시대도 그렇다. 한류라고 소개되는 것들 80%는 그렇다고 본다. 그걸 구분을 하자면 어떤 BPM이 있고 다른 것들이 그것을 따라가는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홍성민: 현대의 동양적 사운드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 있겠다.

성기완: 그렇다. 그보다는 사운드와 로컬리티(locality, 지역성)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낫다.

홍성민: 한국의 로컬 사운드야말로 노이즈 아닌가? 엄청난 하이브리드 노이즈.

성기완: 엄청난 사운드아트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다. 하여간 로컬리티를 생각했을 때 정체성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홍성민: 한국인들에게 뭔가 다른 로컬리티가 있는가?

홍철기: 외국에 나갔을 때 혹은 외국인이 왔을 때, 나는 우리나라에 노이즈 음악이 거의 없는 이유가 서울이 진짜 시끄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고 신기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친구가 노이즈 음악을 틀었더니 친구의 친구가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와서 공장소리 좀 끌 수 없겠냐고 하는 그런 식이다.

성기완: 로컬리티와 관련된 소리를 생각하다보면 일상의 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지하철같이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소리를 한국의 사운드아티스트들이 어떻게 고려하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하다. 생각보다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서양의 역사에 포함이 되는 소리를 구태여 더 생산하려는 적극성 때문인지…

최수환: 일상의 소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일상 공간에서 발생하는 소리들은 일종의 기능적 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어떻게 잘 만들고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성기완: 내가 서울문화재단에 신청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종의 애뉴얼 리포트처럼 일상의 서울의 사운드를 아카이브화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갤러리나 콘서트홀의 작업만큼이나 중요하다.

홍철기: 그런 소리에 대해 나는 이중적인 입장이다.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노이즈 음악을 하는 이유가 되는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자면 서울의 옷가게들은 각각 가요를 틀어 놓는다. 그렇게 음악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 너무 많은 소리들이 층을 이루어 오히려 단조로워지는 경우도 있다. 양극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소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것이 어떻게 사운드아트에 속할까 묻고 싶다.

성기완: 서울의 사운드는 너무나 복잡한 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홍철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끄러운데 복잡하지는 않다. 너무 복잡해서 균질화된 것이다. 그 중에서 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한데 기본적으로 그 이전에 덩어리화된 소리가…

성기완: 그것은 그 일상적 소리에의 반작용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이미 고려가 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자끄 타티의 영화 「플레이타임」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

김영은: 자끄 타티의 영화 「플레이타임」에 보면 이런 일상적 도시의 소리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정말 예민하게 다루어진다. 큰 빌딩 안에서 복도의 팬 돌아가는 소리, 사무실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전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성기완: 자크 타티는 사운드 아티스트로써 굉장히 중요하다.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에도 배경 음악이 전혀 나오지 않으면서 공장지대의 소리를 캐치해 내고 있다.

홍성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사운드를 교육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좋은 교육이란 어떤 것일까? 아까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사운드 아트가 반아카데미적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류한길: 사운드 관련 강의를 했었는데 학교 측의 요청과 마찰이 있었다. 또한 사운드는 같이 경험해 보고 가치를 찾는 게 필요한데, 학생들이 받은 기존의 서사에 대한 교육이 청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음악사에 대해 이해하게 해 주는 것이 오히려 악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사실 나도 답은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면 청각은 지속적인 경험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한가지 현실적인 방법은,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기술을 가르쳐 주면 주파수부터 시작을 하면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고 효과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방법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고 청각의 이해도를 높이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기술을 다루는 재미에 너무 함몰되면 안 될 것이다. 그 사이 중간지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강의를 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는 약간의 회의감이 든다.

최수환: 나는 사운드 교육이 소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운드 아트가 학교로 들어왔을 때,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작곡이든 사운드 엔지니어링이든 이미 있는 것들로부터 확장시켜나가야 한다. 지금의 음악 교육은 도제 시스템이기 때문에 졸업 후에도 지도 교수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기존의 음대나 엔지니어링 스쿨이 소리에 관해 쌓아놓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를 어느 정도 포용하면서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반면 기존의 음대 교육에서 부족한 깊이 있는 이론 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홍철기: 외국에서의 성공적 사례가 그랬지만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과 연계가 잘 되어야 한다. 사운드 아트가 학교 밖에서 많이 이루어져 왔었기 때문에 그것이 학교의 과정과도 잘 이어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랩탑이나 컴퓨터로 사운드를 듣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리의 감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라디오가 낫다. 물론 아주 고가의 장비로 소리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얘기겠지만.

홍성민: 시각적 서사에 길들여진 것 때문에 몰입이 방해가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쉽게 해석하려 하고 선형성에 기대기 때문인가?

류한길: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다. 뭐가 연상되었다던가 시적으로 표현한다던가 혹은 기존 음악에 기대던가.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데 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도 무엇보다 경험의 밑바닥, 자신이 쌓아 올리는 과정이 있어야 모든 생산활동에 있어서 필요한데 그 중간 지점에 걸리는 그런 기존의 경험들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성기완: 류한길씨는 시각적인 서사에 관한 교육을 받았는데 나 같은 경우엔 그렇지 않다. 잘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덩어리로 들리는 소리의 레이어들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점으로 찍히는 소리, 선으로 이어지는 소리, 면으로 되는 소리 등 이런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시각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류한길: 활용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홍철기씨가 아파트 철거 장소를 지나가는데 철거 직전에 유리창을 밖으로 집어 던지는 소리가 아주 요란 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귀를 틀어 막고 싫어하는데 홍철기씨는 그 앞으로 가서 아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사실 경험적 차이이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차이.

홍철기: 교육의 방식이 규격화 되어 있다. 스스로 판단을 해야 생산적인 창조를 할 수 있는데 지금의 교육은 정보 전달식이다.

홍성민: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운드 교육이 창의성을 유도할 수도 있다. 시각교육이 관습화되어 있는 반면 청각은 그냥 무디어져 있을 뿐이지 교육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기완: 홍철기씨 사례와 통하는 얘긴데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주로 보이는 세계를 살았다고 생각해 왔지? 그러나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일 수도 있다’라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소리 교육이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청각적 세계를 처음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를 재구성하고 발견하는데 소리 교육이 시발점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이렇게 사운드아트 교육에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았다.

김영은: 나는 계원대에서 「소리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하고 있다. 처음 강의 제목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나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본격 이론 수업은 아니어도 구석기 시대부터 18세기 19세기 그리고 지금까지의 소리 문화들을 입문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거기서 입시 교육에서 많이 접했을 터인 르네상스,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은 많이 뺐다. 그렇게라도 얕게 음악사를 살펴 본 것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이 주 동안에는 사운드 아트, 전시 등을 소개한다. 내 강의 목적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보는 것에 비해 듣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미대 학생들에게 소리의 감수성을 키워 주기 위함이다. 방식에서 아쉬운 점은 책상에 앉아 듣는 위주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홍성민: 다음 질문, 무엇이 사운드아트를 정치적으로 만드는가? 미학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기능을 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왜 사운드아트가 필요한가?

성기완: 예술은 우발적으로 정치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수업시간에 경험한 사례가 있다. 학생 몇 명이 청계천에 가서 소리를 채집해 온 적 있다. 사진과 학생은 함께 사진도 찍었다. 거기서 청계천이 드러나더라. 사진에서는 꽃 등 아주 예쁘게 나오는데 소리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등 아주 개판이었다. 그 예쁜 장소에서 예쁜 소리는 못 찾은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소리에서 진짜 의도 혹은 허상이 드러날 수 있다.

홍성민: 나는 사운드 아트라는 단어가 등장을 하면서 홍대 인디씬같이 또 하나의 하부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정치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성기완: 학교에서도 디자인하는 사람들도 소리에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무언가를 폭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앞에 얘기했듯 소리로 갤러리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난다. 소리가 들어감으로써 화이트 큐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리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면이 있다.

홍철기: 분명히 권력 관계가 어떻게 사운드에 반영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는 게 맞다.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어떤 창조를 할 것이냐 하는 출발점에서 보면 된다. 정치적이라는 말에는 행위적인 측면과 일종의 맥락을 드러내는 폭로의 차원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전자가 더 핵심이다.

홍성민: 행위적 측면이란?

홍철기: 예를 들어 청계천을 드러냈을 때, 구청에 가서 어떻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창조적 예술적 행위로 풀어 낸다던가... 말하기엔 좀 애매하다.

성기완: 사실 정치적으로 하려면 커뮤니티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사운드 커뮤니티? 멤버가 한 열 명 되려나?

홍성민: 시어터나 무용에서는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 즉흥)이 너무나 중요하다. 또 언젠가 아비뇽에서 한 버벌퍼포먼스(verbal performance)에서는 너무도 지루한 30분을 견뎌낸후 감동을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사운드의 즉흥은 어떠한가?

홍철기: 여러가지 층위가 있는데… 코넬리우스 카듀(Conelius Cardew) 같은 경우에는 즉흥적 연주로 정치성을 드러내려 한 편이다. 또한 증폭된 악기를 사용하는, 임프로비제이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AMM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대체로 그런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또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60년대 말 이후부터 유럽 프리재즈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시도를 한 데릭 베일리(Derek Bailey)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즉흥은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 카듀, 베일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대가와 음악 초보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였다. 교류의 측면에서 보면 즉흥이 비위계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또 한편으로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이 있다. 어딜가나 공간은 다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공연을 다니면 다른 장비들을 만나게 된다. 결국 완전히 소리만 가지고 작업을 할 경우에는, 공간과 장비와 뮤지션의 즉흥 밖에는 방법이 없다.

홍성민: 즉흥의 비위계성이 해방일 수 있다는 점이 수긍된다.

최수환: 즉흥은 위계적인 부분에서 어느 정도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 나도 즉흥적 연주 경험이 있지만 어느 정도 선경험이 필요하다.

홍철기: 나 역시 음악을 배운 적은 없지만 악기나 소리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최수환: 그 점이 중요하다는 거다.

홍철기: 그런데 그 과정은 금욕적인 노력과 주관이 필요하다.

성기완: 즉흥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홍철기: 잘하거나 못하거나 즉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기 주관을 확신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힘,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건 필요하다. 그렇지만 공식적인 대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위계를 설정할 것인가. 게다가 교육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훈련을 쌓지 않은 이조차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홍성민: 랑시에르의 책 『무지한 스승』에서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법에 관해 나온다. 요즘은 너무 많이 가르치는 것이 문제이다.

성기완: 최수환씨가 이야기한 랜덤의 개념 있지 않은가. 즉흥과 연결 시킬 수 있는 것이 랜덤이다.

최수환: 지금의 즉흥이 교육적인 담론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랜덤이라는 것은 완전히 무작위가 아니라 의사 난수(pseudo-random)라는 말처럼 기본적인 알고리즘이 있고 구성하는 틀이 있다. 음악에 있어서의 즉흥은 결국 틀을 가지고 있다. 학교 밖에서 하든 안에서 하든, 경험이 있어야 하고 훈련이 전무한 사람이 하기엔 곤란하다는 말이다.

홍철기: 그러한 즉흥의 모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쉽게 배제할 수 없지 않은가?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각기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다르고 실천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공식적으로 교육을 받았거나 경력을 쌓는 경우에만 참여가 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임프로는 학교 안에서 십 년 한 사람과 산에서 십 년 한 사람이 한 판 붙는 게 아니다. 오토모 요히시데 같은 경우는 지적 장애 어린이들을 데리고 작업을 했다. 물론 얻을 수 있는 부분은 각자 다르다. 그러나 위계를 깨뜨리지 않고 훈련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임프로냐,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류한길: 나에게는 즉흥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서 인지하게 된 사실은 공유의 가능성이다. 그건 꼭 음향적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다수든 소수든 사람들에게서 공유 가능한 즉흥이 존재하고, 그 자체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에 음악으로써의 즉흥으로 시작을 했다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음악을 떠나서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공유 가능한 형식들을 생산할 수 있을지, 그리고 국적과 같은 우리의 사회적인 부분과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더욱 중요성을 느꼈다. 물론 음악적인 즐거움도 많다. 그러나 즉흥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지는 순간이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교육이나 음악에서는 즉흥이 대가들이 모여서 초월하는 일련의 방식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로써의 즉흥을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다. 즉흥은 그 자체로 민주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의 측면을 생각해봐도, 공부하는 그 지점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퍼지는 지점에서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홍철기: 완전히 관점이 다른 사람끼리 작업을 할 경우, 어떻게 결과를 낼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음악과 기타 조건들을 매개로 삼으면서 누구 한 명이 지시하지 않는 그런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해 준다는 점에서 나는 즉흥에 가치를 둔다.

홍성민: 원거리의 충돌 가능성이 있고 거기서 과정 중심의 수행성이 생기겠다.

홍철기: 점점 많은 협업을 하면서, 잘 맞는 동질의 소수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충돌에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류한길: 즉흥을 하면서 신기한 것은 친구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성기완: 프리재즈와 연관이 있다. 그 맥락들이 중요하다. 70년대와 60년대 차이점이 맥락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말콤 X 강연 전에 함께 듣는 오네트 콜먼인지 아니면 집에서 혼자 앉아 듣는 오네트 콜먼인지 그 둘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런 맥락들이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지점들이 곁들여지면 더 재미있겠다.

홍성민: 흥미롭다. 마지막 질문으로 사운드 아티스트들이 좋아하는 사운드아트나 음악은? 추천을 부탁한다.

홍철기: 오토모 요히시데 퍼레이드 2009. 학교 고적대부터 시작해 아마추어들을 모아놓고 퍼레이드 겸 즉흥을 한 것이다. 재미있다.
ENSEMBLES parade 2009 1/2, Otomo Yoshihide
ENSEMBLES parade 2009 2/2, Otomo Yoshihide

성기완: 글 쓰는 것 때문에 요즘 음악을 잘 듣지를 않는다. 아, 하나 있다. 일종의 퍼레이드이다. 1967년을 Summer of Love라고 하지 않았나. 히피들의 여름. 1967년 1월의 어떤 퍼레이드가 시발점이었는데 그 때 LSD를 점심에 나누어주는 등의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주 재미있었다.
Americal Experience - Summer of Love (Documentary), 1/6

류한길: 내 작업이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게 있다. 지향하는 사회성이나 정치성이 비슷한 서점 ‘북소사이어티’에서의 사운드아트 설치작업이다. 처음에 오픈할 때 음악 대신 기능적 사운드를 설치하자고 내가 제안해서 이뤄진 것이다. 서점에 들어가면 동전 짤짤이 소리가 난다. 사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해지긴 한다. 그러나 나에게 굉장히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류한길 솔로 @ Cafe Oto, London.
사운드 설치 @ Book Society

최수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음악에 관심이 많다. 앰비언트 음악. 에릭 사티도 짐노페디(gymnopedie)로만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괜찮은 음악들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가 연주한 그의 피아노 모음집을 들어보라. 또한 앰비언트 음악 중에선 해럴드 버드(Harold Budd)를 추천한다. 앰비언트 음악은 음악 자체가 공간의 배경으로 존재한다. 버드의 음악은 편안한 음악이 무언가를 알게 해 줄 것이다.
Neil's Theme, OST, Harold Budd & Robin Guthrie

김남윤: 나는 사운드 엔지니어라 그런지 작년에 인터넷 마약이라고 나왔던 아이도저(I-Doser)에 관심이 있다. 기술적으로 재미있다 효과는 미미하지만 앞으로 발전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엠씨스퀘어도 뇌파로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음악에도 접목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새로운 장르의 스타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I-Doser 웹사이트

김영은: 나는 애니멀 컬렉티브(Animal Collective)의 음악을 추천한다. 사실은 내용보다도 형식적으로 더 관심이 있다. 스토리텔링과 소리, 예를 들어 라디오디제잉의 방식. 또한 뮤직비디오. 그리고 랩이나 판소리같이 서사가 있는 보이스퍼포먼스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경우에도 관심이 있다. 뮤지컬,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Winter’s Love, Animal Collective
Tokyo, The Books
Furniture Music, Erik Satie

Tag :
s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