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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하지만 주변적이지 않은 : 리암 길릭과의 인터뷰

2009-12-23  

First published by Third Text, London, 2008

Cliff Lauson 당신은 아티스트 존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 해왔다. 하지만 당신의 방식은 지난 80년대의 다른 영국 아티스트들의 그것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그 세대의 아티스트들과 같은 과거를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보여지는 이 차이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Liam Gillick 내가 골드스미스(Goldsmiths)를 다녔던 그 시기 동안, 전후 고등교육은 자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했다. 즉 예술 학교(art school)는 인생에서 다양한 여러 일들을 하는 산만한 사람을 만드는 곳에서 예술가를 생산하는 곳으로 바뀌어갔다. 비록 이것은 예술 학교가 학위를 제공하면서 나타난 일차적인 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1980년까지도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만이 아닌 계층과 배경에 실질적인 다양성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는 학생들이 충분히 자급적으로 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인 지원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는 이제는 완전히 사려져 버렸고 재정적 지원이 없는 지금은 고등 교육을 받기가 매우 복잡해졌다. 오히려 지금은 다양한 계층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모이는 순간이 특이한 순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망상과 산만함의 동시적 감각을 이끌어주는 도시 근교 출신이다. 그것은 내가 작업을 발전시키는 방법 안의 이데올로기적인 복잡함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목표지향적인 자기의식적인 사람들, 심지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의식적 아티스트 사이에서도 나는 딱히 초점을 맞출 곳도 그리고 추구할 지향점도 가지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행동하고 그들이 작업을 하는 방식에 담기게 된다. 내 위상은 좀 더 상대적이고, 내가 하는 작업은 모더니즘의 실패의 아이러니한 떠맡음을 직선적으로 표출하지도 않는다. 내 몇몇 작업은 극단적으로 정확하고 정치적이며, 매우 몇몇은 형식주의와 교섭이기도 하다. 내 작업에서 당신은 두 개의 특성을 볼 것이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에 관심을 가지는데,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결여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작업 속에서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에 대한 모델은 Richard Hamilton의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국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영국의 역사적 맥락의 외부를 살피면서 적절한 모델을 찾도록 노력했었다.
아티스트가 되는 것에 대해 많은 캐릭터 타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로 수렴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예술 학교들을 본다면, 그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the Slade or the Royal College of Art의 스타일은 포스트모던 색채가 강한 비정향 스타일(non-style)인 골드스미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비록 골드스미스의 교육 담론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비평의 덕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공을 위한 비책으로도 종종 지각되기도 한다.

CL 그래서 만약 당신 작업을 형성하는 아이디어, 테마가 당신이 교외와 골드스미스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에 의한 것이라면, 당신의 작업은 지역화(localised) 되었고 특성적(specific)이거나 혹은 어떤 주어진 지역성과 역사적 순간에 동등하게 상응적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LG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것은 어느 정도 골드스미스의 지적, 이데올로기적인 당파가 교수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너무 바빠서 아티스트의 개념을 재고하지 않는다. 골드스미스에서는 두 개의 큰 당파가 존재한다. ‘Michael Craig-Martin visiting critics’ 당파는 구성된 세계 안에 것들에 대한 언어와 아이디어의 구축을 통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당신은 이를 쟈크 데리다(Derrida)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Jon Thompson’ 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그룹이 있다. 이들을 바타이유와 푸코 파(‘Bataille and Foucault 파’) 정도로 불러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정신분석학적 단어와 개념들 즉, 우울증, 섹스 그리고 죽음 등을 선호한다. 그들은 오히려 문화적인 분석이나 모순으로 되기 보다는, 그들의 작업의 토대는 근본적으로 섹스, 죽음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둘러싼 이미지로부터 포스트모던한 텅빔으로 발전하게 된다. Sarah Lucas와 Damien Hirst는 섹스와 죽음을 생각해 보자. 나 자신과 아마도 한 두 사람은 예술이 발전하고 의미를 도전하며 이데올로기가 예술 안에 흔적을 남기는 명백한 역설과 모순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이것은 섹스와 죽음이 그들의 시간 그 이상을 가진다는 것, 즉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접근이 언제나 어느 정도는 어떤 식으로 전유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은 벨기에 헨트(Ghent)에서 1320년경에 살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섹스와 죽음에 관심이 있다’. 이것을 마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의 한 부분처럼  ‘근본주의’로 환원해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시기에 그렇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재현의 양식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CL 당신은 Nicolas Bourriaud가 주창한 개념인 ‘관계 미학 Relational Aesthetics (1998, English translation 2002)’ 의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전시전(group exhibitions)에 참여한 비슷한 개념과 태도 혹은 방법론을 보여주는 또 다른 아티스트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관계 미학’ 안에서 포함된 아티스트들은 각각 독자적인 자신만의 방식을 가진다. 그래서 당신은 이 그룹 짓기가 얼마큼 응집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LG 그것은 꽤 오랫동안 계속 지속되고 있다. 나는 9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전시에 참여했다. 물론 어떠한 점에서, 나 자신과 Philippe Parreno, Rirkrit Tiravanija 그리고 Dominique Gonzalez-Foerster 등은 공통 관심사를 가졌다. 하지만 우리는 Nicolas Bourriaud가 그의 텍스트에서 작업들 사이의 풀리지 않는 긴장감을 이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그 개념을 발전시키기 전부터 함께 일해왔다. 나는 1990년 초반에 독일 쾰른, Christian Nagel Gallery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유산 안에 위치 지었는데, 이 아티스트들은 Clegg & Guttmann, Andrea Fraser, Renée Green, Fareed Armaly 등이다. 형식주의 미학 그리고 비판적 분석 (critical analysis)을 선언한 것으로 Stephen Prina 역시 매우 중요한 아티스트이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지배문화의 음모를 단순하게 노출하는 것 그리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예술가로 활동하는 것만이 오직 유일하고 가능한 방법이라는 비판적 계약에 대한 이상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룹이 아닌 사람들과도 일을 했는데, 여기에는 함께 공유하는 부차적 이야기가 있다. 우리 중에 우리가 보이는 것과 사실 상 일치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Rirkrit를 태국 아티스트로 언급할 때도 있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고 공부했다. Philippe 역시 알제리(Algeria)와 스페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서 자라왔고 교육받았다. Jorge [Pardo] 역시 쿠바(Cuba)의 하바나 (Havana) 태생이지만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라고 살고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게 해준 것은 이런 생물학적 관점이다. 그것은 작업 안에 내재된 것이 아닌 우리에 자신에 대한 투사였다. 나는 이것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양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나 복잡한 정체성과 차이가 문화적으로 투명한 작업 안에 우리가 Nicolas를 포함하여 몇몇 비평가가 인식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공유한다는 것과 또한 더불어 담론을 조절하며 무의적으로 투명성을 조장하고 사람에 대한 의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역동적이고 도전적인 그룹은 지배문화로부터의 투명성에게 도움 받지 않는다. Sinn Fein는 만약 그들의 투쟁의 작업 방식이 모든 스테이지에서 완벽하게 투명했었다면,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CL 당신이 언급한 아티스트들은 단순 발전적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와 거부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일상적 삶으로부터 예술을 분리시킨다는 것인가?

LG 우리는 디자인과 공공 장소가 창조성의 성별화(the gendering of creativity)를 기반한 치열한 전투의 유산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한 아티스트의 세대이다. 내가 학생일 때 디자인과 데코레이션(장식)은 성별에 기반을 한 경멸적(gender-based pejoratives) 의미를 지녔었다. Jorge와 Rirkrit 그리고 나는 우리 문화의 비평 안에 담긴 그리고 교환의 위상을 표현해주는 이러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기능적 유토피아(functional utopias)’ 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화에 기능이란 흔적을 남긴 ‘진보적 모더니즘’의 특정한 국면을 다시금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우파(the right)는 ‘변형된 모더니즘’ 안에 진보를 향한 어떠한 움직임도 ‘극단적 유토피아’라는 죄명으로 비난할 것은 명백하다. 문화와 정치적 역동성으로 모더니티(modernity)의 과정은 모더니즘(modernism)의 과정으로부터 점차 느슨해졌다. 나는 검증되지 않은 모더니티(modernity)의 그 파괴의 맹위 반대편에 있을수 있는 우리는 모더니스트(modernist) 프로젝트와 그 요소들을 다시 소개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전후 막시즘(Marxism)적 해석과 미학에 기반한 몇몇 비평이 그들의 우울한 자기 준거적 붕괴의 감각으로 모더니즘과 모더니티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성찰을 풀어내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CL 당신의 작업에 영국적 요소는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Annlee’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던 프랑스 아티스트의 프로젝트인 ‘Pierre Huyghe and Philippe Parreno’s project’ 에 참여하는 것이 당신의 작업 안에서 잘 녹아 들어갔는가?
이런 문화적 횡단의 공동 작업으로 확장 시킬 수 있는가?

LG 나는 예술을 정치적 매트릭스의 부분으로 가는 결정적인 하나의 입구로 보고, 예술을 단순히 문화적 그리고 지역적 특수성으로 보는 태도에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치는 매우 실용적일 수 있고 그리고 기회주의적 영국 역사 전통의 의식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사물을 주변화시키고 다시 그것을 찬사 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특수성의 오만한 환영을 뒤섞는 것, 이것이 바로 영국 사람들이 언제나 해왔던 것이고, 비밀리에 해적 국제주의를 했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러한 역설과 흥정한다. 내 관심은 예술이 문화적 구성의 복합체 안의 떠도는 기표로서 예술이란 개념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the Annlee project’와 같은 협력적인 교섭은 어렵다. 나는 이것을 다루는데 무척 힘들었다.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구조와 시스템 내의 내나 자신의 의식을 탐구하고 탐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쓴 작품의 제목은 프랑스 문법 구조 Annlee You Proposes를 사용하게 되었고 나는 상업분야에서 온 덴마크-오스트레일리아 애니메이터 와 함께 일했다. 텍스트는 다양한 감독관들부터 핀란드 출신의 좀 더 가까운 협력자에 의해 검토되었다. 나는 특히 프랑스 남자가 일본 여자 애니매이션 캐릭터를 전유한다는 사고가 특히 맘에 거슬렸다. 나는 검토의 정교한 과정을 겪어 나갔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는 저자와 캐릭터 간의 분리라는 프랑스 유산만큼이나 캐릭터에 대한 내만의 개념을 가지고 다른 아티스트처럼 열심히 노력했다.

CL 유머와 나이브함(naiveté)이 당신의 작업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당신은 회사 건물에 무관심한듯한 간섭을 하고 있고 또한 동일하게 학교에서도 그러고 있다. 물론 아이들이 당신의 기능적 공동체라는 글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LG 그것들은 일부는 런던에서의 삶과 관련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들은 셀틱(Celtic)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성은 당신의 삶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 적용된다. 초반부터 나는 당신이 아마도 ‘논리적 비논리(logical dislogic)’라고 부르는 그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내가 Lawrence Weiner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모두 언어와 전략적인 정치성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히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그것에 더 끌렸다. 내 미대 논문 제목은 ‘Horseness is the whatness of allhorse’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모더니즘 문구이다. 그것은 추상을 내포하며 그것의 외부에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해되고 문화적 식별 가능한 단어 안에서 이미지를 기능화시킨다. 이것은 등장했을 때부터 비판적 구조에 인접하여 새롭게 작동하는 상(picture)이 되었다. 이를 내 작업의 이해에 좋은 등식이다.
처음 프랑스에서 일했을 때, 사람은 플레이‘play’ - 자의식의 복잡한 방식 안에서의 상황주의적 분열을- 이야기했었다. 지속적으로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역할을 바꾸면서도 그것은 영향력을 가져왔었다. 앵글로색슨(Anglo-Saxon) 문화는 게임은 언제나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play’는 앵글로색슨의 위트(wit)의 사용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이 ‘play’에 몰입하였다. 당신은 내 작업에서 ‘So were people this dumb before television?’ [1998](그림4)라는 문구를 봤을 것이다. 이 작업 역시 ‘play’의 유산으로 이는 문화적 수사학이 기능적으로 그러나 모순적인 문장으로 재변화 하는 것이다.

CL 당신의 작업은 다양한 미디어와 방식을 사용하며 그것들은 다원주의적으로 보인다. 추상적인 것 혹은 직접적인 것 사이에서 다채로운 미디어와 형식의 선택은 결국 다른 관객을 연결 짓고, 일반화된 철학 안에서 다양한 변용을 의도하는 것인가?  

LG 만약 당신이 산만하고 쉽게 착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마치 여러 입구를 지각하는 거울로서 복잡한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예술이 반대하고자 했던 것을 예술이 역사적으로 찾는 방식까지도 당신의 관심은 커져갈 것이다. 이것들은 문화적 거부와 거리 두기 안에서 자의식의 개념들을 어쩔 수 없이 포함시킨다. 나는 항상 형식과 내용의 통합이 힘들게 느껴졌다. 최근의 또 큰 어려움을 느끼는데 이는 다음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당신 작업의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내 많은 작업은 바로 단일성(singularity)의 문제를 피하는 것으로 나는 하나의 원천이 아닌 다양한 곳에서 무엇인가를 도출된다. 때때로 자기 창조적인 다양성이 바로 작업의 시작점이다. 특히 내 구조물과 프로젝트는 당신을 숭고의 순간으로 반드시 이끌지 않는 특별한 것, 혹은 예술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것과는 또 다른 것들의 어떤 것을 다루는 감각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나의 개념들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점들은 항상 복수(multiple) 이다. 텍스트의 웹 안에서는 다른 것들은 당신을 벗어나게 해주는 동안 특정한 것들은 매혹으로 작동한다.

만약 당신이 중용의 비평을 하고 싶다면, 당신은 우연성, 전략, 교섭, 타협 그리고 거절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 된다. 이러한 것들은 작업의 중심에 있는 추상적 개념이다. 나는 최근에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문화적 생산과 관계 안에 차이의 개념에 대한 재탐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CL 당신은 어떻게 사람들을 갤러리로 불러들이고 동시에 이러한 덧없는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보기엔 당신의 작업이 어느 정도 상호작용의 촉매로서의 모순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잇는 것 같다.

LG 나는 무관심한 관객이란 개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티스트는 사회에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관계와 협상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의무이다. 내가 British Land Company 통로에 만들었던, Euston Road [Reciprocal Passage Work, 2003]을 생각 보자. 나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길에 멈춰서 관심을 가지거나 또는 그것을 감식할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공간은 절반은 공공적이고 절반은 사적이라서 복잡하게도 정치적이다. 이 작품은 사설 백화점이 두 개의 공공 도로를 연결하는 길에 일부이다. 나는 흔적으로 남겨지는 이데올로기, 부드러운 이데올로기를 운반하는 구축된 길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나는 발전의 도처에서 공간의 조작을 통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 길의 양쪽 끝 문은 만약 필요하다면 잠길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보자. 천장에 작업을 보다가 이 출입문이 어디 있는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 문들의 현존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본질주의’나 길 자체와 관련이 없다. 오히려 특별한 부드러운 압박에도 불구하고 길의 구조가 의미를 바꿀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좀 낫고 더 섹시하고 우아하게 보이고자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한다. 나는 이러한 코드들을 가지고 놀고자 하며 이 코들은 조합되고 분해된다. 나는 사회적 영역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이 진술이 단지 예술의 용어 안에서 의미 작용하길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섬세하고 예술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이데올로기와 형상들이 무너져서 다양성으로 깜빡이는 순간을 찾고자 한다.

CL 당신의 작업은 사회 안에 이데올로기가 형태를 찾는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LG 내가 건축이나 도시의 변화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일할 때,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재현하는 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티스트가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가는 여전히 일반적인 관념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영역 안에서, 아티스트의 역할과 개념은 사실상 약 50년 전부터 하나였었다. 그것은 아티스트가 추상을 다루고 추상 안에서 개념과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나머지와는 다른 무엇을 만드는 과정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소외되지 않게(to de-alienate)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람들은 그들 주변을 둘러싼 기능적인 세상과 벗어나 새로운 숭고(neo-sublime)의 순간들을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감각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디자인된 순간의 반-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의도된’ 세상의 지속적인 확장이란 전략을 통해 형태를 가지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현재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이의 간극에 관심을 가진다. 나는 지속적으로 새롭게 되는 공간에 의해 창조되는 모순과 열망과 함께 공공의 영역에서 고급문화가 빠져 나오는 것을 분석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CL 이것이 당신의 최근 런던의 ‘New British Home Office building’ (그림5)에서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나?

LG 초기 드로잉 작업은 건축물의 다양한 부분 안에서, 예술처럼 보이는 사물을 의도하기 위한 공간을 보여줬었다. 그것은 예술이 장소에서 작동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준비였다. 그들이 어떻게 읽히거나 보여줄지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 없이, 그들은 내 작업이 건물과 연결되어서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를 결정해 버렸다. 나는 결국 건물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 아티스트를 초대하는 건축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매일의 건물의 형태에 대한 회의에 참여했었다. 우리는 결국 작가가 누구인지, 누가 건축물의 작가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까지도 이르게 되었다.
나는 건물의 ‘diagram’을 계속 유지하길 원한다. 나는 나의 작업을 다른 이들과 교섭하길 원한다. Home Office에서의 작업 아이디어는 상징과 실질적 기능이 부여된 하나의 복합체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간섭주의자로 실험이었고 나는 그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내 문화적 작업을 복잡하게 만드는 수준에서 사실상 초대되었다. 그것은 내 초기 작업, Discussion Island/Big Conference Centre [1997](그림5) 과 관련된 기능적 실험이다

CL 그들은 ‘Euston Road passage way’과 같은 지난 건축 작업을 보고 당신을 선택했나?
그들은 그들의 빌딩을 위한 색채 플렉시 유리(Plexiglas)를 희망했던 것인가?

LG ‘The Government Art Collection’은 작업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무엇인가를 노출하고 밝히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제에 직면했다. 왜나 하면 나는 상황과 협상하는 내 형상적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예술에 대한 소비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으로 복잡한 프로젝트에 접근하는 내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당신이 내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최종 결과물인, 유리 캐노피(canopy)는 사실 공동 작업 방식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건축가들은 내 작업을 가지고 구조의 특성에 맞도록 작업을 한다. 영국의 건축가, Terry Farrell는 함께 일하고 매우 좋은 사람이다. 그는 예술이 건물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Giles Martin과 함께 일을 친밀하게 하는데, 그는 존재하는 모든 구조적 요소들을 대체하게 작업을 해주었다.

CL 유리 캐노피는 당신의 개입을 가장 쉽게 드러내고 이를 통해 건축물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핵심적 요소이다. 나는 그것이 보통 당신의 단독적인 공헌으로 가정했었다.

LG 어떤 것이 문화에서 이용되고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지식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사회에서 ‘사용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 안에서 공유되는 기능을 지닌다. 그것은 미적 맥락에서 보여지고 이해되고 그리고 공공의 영역에서 이해된다. 캐노피가 Liam Gillick의 작업을 닮았다고 해서 이를 내가 원작자(authorship)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 작업이 아닐뿐더러 건물의 다른 부분들 역시 건축가의 작업이 아니게 된다.

CL 체계가 아닌 시각적인 것을 읽는 것은 단순하다.

LG 맞다. 나는 건축의 외적 구조를 받아드리고 내 아이디어를 그것의 맨 위에 놓는다. 당신은 원래의 건물을 보는 능력을 유지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사고가 적용된 레이어를 통해 그것을 보게 된다. 이것의 한가지 징후는 바로 건물의 커튼월(curtain wall)의 표면 바로 뒤에 있는 텍스트 패널(text panels)의 시리즈이다.  독해에 저항하고 있는 슈퍼-텍스트는 문화 안에서의 논쟁적인 공간으로서 장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CL 당신 작업의 텍스트성은 당신의 사인(sign)이나 조각 작업뿐만 아니라 종종 당신 전시에서나 다른 작업들과 함께 하는 산문이나 시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이 글쓰기가 조각과 설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가?

LG 나는 단어를 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글쓰기가 압축적이길 제안한다. 사고의 핵심을 응축한 창조를 향하는 텍스트 지향 속에서 당신은 다양한 예술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나는 종종 영국 중류층의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 대신에 애니메이션으로 작업을 하고 오페라 대신 뮤지컬을 발전시키며 그리고 장편 서사보다는 짧은 개인의 역사에 관한 짧은 책을 쓴다. 문화적으로 특수한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을 다른 영역에서 쓴다면 혹은 새로운 내용으로 채우기만 해도 의미가 변화하는 구조적 전략에 관한 작업에는 서브 텍스트(subtext)가 있다.
 
CL ‘기능적 유토피아functional utopia’의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유토피아는 마치 예술 제도로 편입되면 상호성을 향한 어떤 사회적 태도로 묘사되는 방법으로 단어가 되었다.

LG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내가 ‘Utopia Station’라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 되었다. 왜나 하면 나는 상황을 더 낫게 만들자고 시도하는 제안들에 진저리가 났다. 나는 상황을 낫게 만드는 어떠한 시도가 유토피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작업에 실용적인 점이 오히려 그곳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Hans Ulrich Obrist는 Cedric Price에 관심을 가졌죠. 이 건축가는 기차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 이동식 대학(mobile university)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나는 오히려 어떻게 셰필드(Sheffield)에 적절한 집을 짓는가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고 이를 작업으로 했다,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아마도 나는 이것이 유토피아인지 확신하진 못한다. 근대(modern) 프로젝트의 특수한 점은 그것이 사람들의 전면을 따라 다니고 그리고 철회하게 되고 결국 썩게 되는 정지척이고 심리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유토피아Utopia [1515] 를 집필한 토마스 무어(Thomas More)는 현실과 지나치게 분리된 것들을 주창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었다.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적으로 교섭하고 어떻게 실제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가 이다. 나는 기능적인 유토피아에 참여하며 이것이 바로 Cedric Price보다는 내가 로테르담 (Rotterdam)에 1952년에 공동 주택을 만든 건축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다.
주택과 택지가 비록 위태롭고 잘 변하지 않는 구조가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인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무의미함, 아이러니 그리고 지나친 상대주의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CL 전형적인 갤러리 공간을 넘어선 개입과 설치가 결과적으로 그 공간이 매우 유명하거나 유토피아적이거나 혹은 단순히 유형을 따르는 카페 등이라는 비판과의 괴리는 어떠한가?

LG 만약 당신이 영어판 관계미학 Relational Aesthetics의 커버를 본다면, 당신은 한 여자가 그녀의 조용한 방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방은 프랑스의 한 장소로, 시장 옆의 공공 장소 장소이기도 하다. 많은 보통의 사람들은 그냥 이곳 저곳을 들어가고 돌아 다닌다. 파티도 아닌, 페스티벌도 아닌 조용한 방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이다.

내가 하는 공공 프로젝트들에서 사람들은 내가 토론의 구조를 보거나 텍스트 작업을 했기 때문에 나를 초대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순수한 미학적 개입을 하지 못하고 대신에 협상이 시작되게 되면 그것들은 분투적인 토론을 수반하게 된다. 한번은 나는 Brussels 시(city)에서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위한 공공 예술 작업을 하도록 요청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더 나은 현관인터폰 시스템과 휴게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결심했다. 나는 분리된 계층 구조에 대한 숙고나 사회적 계층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이나 대신에 그것을 얻기 위해 매 미팅에서 미친 듯 논쟁했었다. 결국 그들은 내 활동을 예술작업으로 부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설을 제공하거나 혹은 예술과 유사한 것으로 대체하는 ‘시스템에 반복되는 실패’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예로는 Whitechapel 갤러리에서 작업이었던 [The Wood Way, 2002](그림7)를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이곳은 내가 일했던 곳이고 Whitechapel의 자신의 미팅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그것은 또한 제도 안에서의 예술의 일상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나에게 두어 달이 전시를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주기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그것은 예술작업이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디렉터의 요청에 의한 예의나 맞춤‘an amenity’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전시의 구조 안에서 보여지기 위해 열심히 작업했고 결국 Whitechapel나 관람객에게 어떠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CL 당신의 작업에서는 다른 ‘관계relational’작업들에서는 꼭 필요하진 않는 이타주의적 요소들이 있는가? 현실적인 함축과 실제의 충격을 만드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LG 나는 저항의 형태로서의 사고의 구현에 매우 관심을 가진다. 이는 배타적으로 되는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며 그것은 오만한 사람들에 대한 질문 역시 아니다. 더불어 상품에 대한 것 역시 아니다. 나는 이타적이지도 않고, 단지 사람들이 충분히 지적 (intelligence)이라고 믿을 뿐이다. 이것은 오래된 문구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도시와 교섭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술과 분명히 관계를 맺게 된다. 기관과 제도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선심을 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술을 그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재 묘사하는 해서도 안 된다. 기관과 제도는 작품의 안에서 항상 명백하지 않는 복잡한 개념들을 키워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약 당신이 이와 작업을 한다고 결심한다면,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CL 당신의 작업은 관객에게 심각한 숙고와 가벼운 마음의 무관심함 사이에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LG 그렇다. 나는 형식적인 특성을 강조하거나 매 순간의 난해함을 제공하는 무거운 작업에 치중하지 않는다. 나는 내 작업이 보통 가볍고 매우 낮은 칼로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2차적인 현상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이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주변화(marginal)되는 것이 아닌 분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아일랜드 전통(Irish Heritage)의 유산이자 책인, [Literally No Place: Communes, Bars and Greenrooms, 2002]에서 나는 군사 지역에 가까운 Derry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아이디어를 본다. 이 생각은 길로 나아가서 쓰레기통 뚜껑을 쿵쿵 치는 것이 아니며 혹은 군인을 사진 찍는 것이 아닌,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IRA(Irish Republican Army)가 그것의 군용 검문소에 반하여 사회적 역할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참조할 지점은 검문소 바로 아래 벙커 속, 그 안 바(술집) 안에 있다는 것 것이다. 천장에 걸린 투박한 것들, 멋진 붉은 벽돌집, 나이든 여자와 어린아이 등, 금요일 밤에 일반적인 바 등. 외부로부터는 이것은 콘크리트 벙커이고 저항의 놀라운 공간이며, 내적으로는 차이의 공간으로 그것은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지배적 시스템을 다시 반사하지 않을 것이다. 분리되지만 주변부가 아닌, 자가당착이라기 보다는 차이의 명백한 표현.

 


그림1 Övningskörning (Driving Practice), 2004 (Courtesy The Artist)



그림2 Relieved Production Cycle, 2007


그림3 Consultation Partition, 2000

 

 

 

 

 

 

 

 

 

 

 

 

 

 

 

 

 

 

 

 

 

 

 

 

 

 

 

 

 

 

 

 

 

 

 

 

 

 

 

 

 

 

 

 

 

 


그림4 SO WERE PEOPLE THIS DUMB BEFORE TELEVISION?, 1998 A line from the book DISCUSSION ISLAND: BIG CONFERENCE CENTRE. A post-textual device in relation to the project in general.

 

 

 

 

 

 

 

 

 

 

 

 

 

 

 

 


그림5 New British Home Office Building, 2004

 
그림6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표지


그림7 The Wood Way, Whitechapel galler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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