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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faces, 이득영

2011-08-09  

 

 

생각하는 기관들

 

투수는 투수판을 밟은 뒤 포수의 사인을 지켜본다. 고개를 한 번 돌리더니 이내 끄덕거린다. 깊은 심호흡을 내쉰다. 그리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면서, 왼쪽 다리를 허리 높이까지 들어올린다. 양 팔과 왼쪽 다리가 만난다. 잠시 정적. 그는 0.3초가량 동작을 멈췄다가 왼쪽 발로 마운드를 내딛으며 상체를 앞으로 밀고 나간다. 글로브에서 투수의 오른손이 빠져나온다. 공의 실밥을 쥔 손가락 그립이 얼핏 보인다. 이제 투수는 오른쪽 귀 높이까지 서서히 공을 들어 올린 뒤 정통파 오버핸드의 자세로 던질 것이다. 어깨는 회전하고, 팔꿈치는 꺾이고, 손목은 낚아채고, 손가락은 뿌린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느린 직구처럼 보이지만, 포크볼이 분명하다. 보통 투수가 던지는 공은 회전한다. 직구든 변화구든 상관없이 공은 제 몸을 끊임없이 빙빙 돌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주변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공기를 좌우로 물리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종종 회전수가 많은 공은 그 끝이 살아 있는 듯 홈플레이트 앞에서 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포크볼은 다르다. 회전하지 않는다. 회전을 거부한다. 그것은 아무런 보호의 장막 없이 제 앞의 공기와 계속 부딪친다. 그러니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점점 속도가 감소하다가 결국 낙차가 큰 포물선을 그리며 지상을 낙하한다. 멀쩡하게 날라 오던 공이 그렇게, 뚝, 떨어진다. 타자는 포크볼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아마도 약 0.4초도 못되는 시간이 지난 후에 공은 홈플레이트 50cm 밑에서 약 15cm 정도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무릎 정도의 높이를 통과해 그를 스쳐지나간 후 포수의 미트에 꽂힐 것이다. 포크볼의 낙차가 예상보다 더 크다면, 포수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블로킹을 해야 할 것이다. 판단은 순간적으로 이뤄진다. 타자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기관들의 견해를 존중한다. 그 견해들의 총합이 자신을 더 자신답게 만든다고 타자는 믿는다. 이미 그의 눈은 투수의 손가락 그립에 대한 정보를 온 몸의 기관들에 전달했다. 그 이후에도 공의 이동 속도와 궤적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중이다. 스윙은 시작되었다. 그의 왼쪽 다리는 리듬을 타듯 가볍게 들려 올려지고, 오른쪽 어깨는 활을 잡아당기듯 배트를 뒤로 잡아끈다.

다른 기관들도 부산하다. 그것들은 눈이 보내준 정보를 바탕으로 포크볼에 대한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중이다. 생각은 머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기관들이 그 뒤를 따르는 방식으로는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 사색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기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따로 또 같이 생각해야 한다. 몸의 자연스러운 중심이동을 돕는 왼쪽 엄지발가락부터, 타격 시 공의 반작용에 탄력을 불어넣는 오른쪽 손목의 관절까지. 타자는 오랜 시간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스윙연습과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배트는 그의 기관들 중 하나가 되었고, 몸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몸의 기관들 역시 근육의 반복적인 길항을 통해 기억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그렇게 기억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위계도, 중심도 없었다. 스윙이 있고 기관들이 있을 뿐이었다. 타자는 기관들의 만장일치를 선호했다. 모든 기관들이 동일한 해결안을 내놓는 순간, 그는 자신의 스윙에 자신감이 넘친다는 걸 알고 있다. 비록 잘못된 판단의 결과였고 팀의 패배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바로 그 순간이 그의 기관들이 바로 그를 그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판단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기관 들 중 하나가 의견을 제시하면, 다른 기관들은 동의를 표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만일 다른 기관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견해의 만장일치가 이뤄진다. 만장일치에 실패할 경우, 그의 양 어깨와 손목은 무리를 해서라도 스윙을 멈추려고 할 것이다. 어설픈 다수결로 의견이 나뉠 경우, 스윙하는 도중 타자의 폼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내야 땅볼이나 헛스윙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여전히 공은 비행 중이다. 실밥이 보인다. 회전하지 않고 있다. 제일 먼저 의견을 제시한 기관은, 타자의 오른쪽 팔꿈치다. 이미 가슴 밑까지 내려온 팔꿈치는 공이 낙하하는 포물선의 궤도를 계산한 후, 정확히 타격 지점을 제시한다. 그의 기관들은 경험 많은 팔꿈치의 견해를 신뢰한다. 타자는 원래 투수였다. 그것도 포크볼 구사에 정평이 난 투수였다. 그러나 그는 포크볼을 던지면 던질수록 자신의 팔꿈치 인대가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팔꿈치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수술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간의 재활. 결국 그는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이길 포기하고 포크볼을 칠 수 있는 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흥미롭게도 그가 기관들의 옹알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그런 결심을 한 후였다. 지금, 그는 이 상황에서 팔꿈치가 대처방안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팔꿈치는 포크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몰아의 상태에서 팔꿈치가 지휘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이제 곧 투척의 궤적과 스윙의 궤적이 교차할 것이다. 선과 선이 서로 만나는 점, 오른쪽 팔꿈치가 정확히 예측했던 바로 그 점에서 타자의 배트는 공을 맞출 것이다. 기관들이 응축했던 에너지가 그 점을 향해 폭발할 것이며, 야구장의 좌표적 공간이 그 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하나의 홈플레이트와 세 개의 베이스와 아홉 명의 수비수와 네 명의 심판도 "딱"하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점으로 빨려 들어간 후, 마치 최신의 분사엔진을 단 듯 유유히 창공을 활공하는 비행 물체만이 남을 것이다. 적어도 타구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야구장을 지배하는 것은 타구와 그것에 작용한 힘들의 크기와 방향뿐이다. 야구장은 일시적으로나마 그렇게 벡터적 공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야구장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관중석의 누군가는 우측 펜스 뒤쪽에 떨어졌던 공을 집어들 것이다. 그는 그 공이 짧았던 처녀비행의 기억뿐만 아니라, 타자의 기관들이 행했던 판단과 행위들의 흔적까지 제 몸에 새겨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글   박해천 (이득영의 <테헤란> 전시 서문)

 

 

이득영_테헤란_피그먼트 프린트_95×8500cm_2009_부분

이득영_테헤란_피그먼트 프린트_95×8500cm_2009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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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영_테헤란_피그먼트 프린트_95×8500cm_2009

이득영_테헤란_피그먼트 프린트_95×8500cm_2009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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